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일곱 교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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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요한계시록 2장 1-7절
제목 :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서론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초대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이 땅에 남은 사역자들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의 불모지였던 소아시아 지역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소아시아 지역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대표적인 일곱 교회 외에도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들 교회는 모두 복음의 감격과 기쁨 위에 세워진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교회의 복음의 감격과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크게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로마의 탄압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는 황제권의 강화를 위해 자국뿐만 아니라 속국들까지도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섬기는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신으로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로마 황제는 괴씸한 기독교인들을 잡아 고문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였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성도들이 두려움 때문에 믿음을 배신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교회의 감격과 기쁨을 앗아간 일은 여기에 멈추지 않습니다. 교회 곳곳에 이단들이 득세했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은 잘못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미혹했고, 수많은 성도들은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문제는 오늘 날과 다르게 말씀의 사역자들이 현저히 부족했다는 겁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말씀 사역자를 양육할 신학교나 그 어떤 교육기관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소수의 말씀 사역자들이 이 교회, 저 교회를 순회하면서 교회들을 돌봤습니다. 예를 들면 이번 주는 밀알교회, 다음 주는 크리스찬 교회, 그 다음 주는 하늘빛 우리교회 이런 식으로 소수의 사역자들이 교회를 순회하면서 돌보고 말씀을 가르쳤다는 겁니다. 이단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주로 이단들 중에는 말쟁이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한 순간에 좌중을 울렸다, 웃길 수 있는 현란한 말솜씨로 성도들을 미혹했고, 수많은 성도들은 이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이처럼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세워진 교회는 밖으로는 로마의 탄압, 안으로는 이단들의 공격 때문에 온통 진통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로마의 탄압과 이단들 때문에 고통 받고 신음하고 있는 교회를 돌보시고 위로하시기 위해 사도 요한이라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로마 황제 도미티안에 의해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 당시 나이가 80이 넘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어쩌면 사도 요한 자신도 사역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80이 넘은 노인 사도 요한을 향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사도 요한을 통해 “요한계시록”을 집필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환상을 글로 기록한 편지입니다. 편지 앞부분은 일곱 교회에게 쓴 편지와 뒷부분은 장차 이 땅에서 일어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을 통해서 지금 소아시아 교회들을 돌보고 계시는 겁니다.
본론
특별히 오늘 편지는 에베소 교회에 쓴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에베소 교회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전에 당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형식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발신인이 나옵니다. 이어서 교회에 대한 칭찬이 나오고, 책망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향한 권면의 말씀이 나오고, 권면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얻게 될 약속의 복이 등장합니다. 대부분의 편지들이 이런 형식을 따릅니다. 물론 당시 교회의 상황에 따라 ‘책망’이 생략된 교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편지는 방금 설명해드린 형식을 따르고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도 동일한 형식에 따라 쓰인 것을 보게 됩니다.
먼저 편지를 보낸 발신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름 세 글자만 적는 오늘 날 편지와 달리 당시에는 발신인의 모습이 묘사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 보낸 편지를 살펴보게 되면 이 모습은 교회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데요 보통 그 교회에 필요하거나 부족한 믿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에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1절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으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일곱별은 뭐고, 일곱 금 촛대는 무엇일까요? 바로 전장인 1장 20절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말씀에 따르면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입니다. 당시 사자는 교회 안에 말씀을 맡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곱 별, 즉 말씀 사역자들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계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서 “붙잡다”라는 동사는 경찰이 범죄자를 포승줄로 묶을 때 쓰는 동사와 같습니다. 경찰이 범죄자를 포승줄로 묶을 때 강하게 묶습니까? 아니면 느슨하게 묶습니까?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하게 묶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성령의 포승줄로 강하게 붙잡고 계시다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을 말씀 사역자들에게 부어주셔서 때마다 교회에 필요한 말씀이 담대하게 선포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지칠 때마다 다시 일어나게 하셔서 교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리심이 임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모습으로 에베소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말씀에 따르면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니다”라는 동사는 현재 분사형으로 쓰여졌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단 한 번 교회에 방문하셨다는 단회적인 사건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수시로, 그 교회에 머물다 시피 직접적으로 방문하셔서 그 교회를 친히 손수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임재가 교회 가운데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이 당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요? 당시 에베소 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 이단과의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이 악물고 이단들과 싸웠습니다. 자신들이 물러서면 교회는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력을 다해 싸웠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오랜 시간 이단과의 싸움 때문에 지치고 또 지쳐있었습니다. 더 이상 버티고 견딜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무너지면 교회는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물러서지도 못하고 간신히 버티고 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사도 요한의 편지가 들려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그들은 이 편지의 내용을 듣고 한없는 위로와 힘을 얻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만의 싸움인지 알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의 사역자들을 붙잡아주시고 계실뿐만 아니라 친히 임재하셔서 가장 선봉에서 싸우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단과의 싸움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말씀의 사역자들을 결코 놓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잡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 교회 문턱이 닳도록 찾아오셔서, 아니 머물다 시피 상주하셔서 이단과의 치열한 싸움을 직접 주도하시고 이끌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이 새삼 다시 한 번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지키시고 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을 봤습니다. 그리고 이 열심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이 지쳐 쓰러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다시 일어나게 만들었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히 식을 대로 식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적용) 여러분 교회가 망할 수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능력 있는 목사 때문입니까? 기도가 뜨겁기 때문입니까? 예배가 살아있기 때문입니까? 재력 있는 성도들이 많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교회가 망할 수가 없는 이유는 지금도 지치지 않으시고 교회를 돌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열심히 말씀 사역자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강한 오른팔로 붙잡고 계시고, 교회 문턱이 닳도록 교회에 찾아오셔서 직접 교회를 사랑으로, 공의로, 은혜로 다스리시고 돌보시기 때문에 교회의 생명은 결코 꺼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이 밤에 우리가 무엇을 바라봐야 하겠습니까? 코로나 때문에 텅 빈 교회의 좌석수입니까? 코로나 때문에 예배가 끊어진 구역원과 자녀들입니까? 교회를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세상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이 밤에 바라봐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전히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이 땅에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말씀의 사역자들을 붙잡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손! 교회 문턱이 닳도록 교회 가운데 임재 하셔서 교회를 돌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래서 그 그리스도의 열심히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때 우리는 잃어버린 주의 교회를 향한 마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근심과 염려의 마음이 아니라 장차 교회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실 소망과 기대의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언제 또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될지 모릅니다. 어쩌면 세상은 이전까지보다 더 교회를 향해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거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장차 앞으로도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최고의 열심‘으로’ 교회를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주님과 함께 발맞춰 잃어버린 교회의 영광이 회복될 것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칭찬)
이어서 우리가 살펴볼 편지의 내용은 칭찬입니다. 2-3절입니다.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긴디고 게으리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우리가 방금 읽은 2-3절을 살펴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수고를 굉장히 상세하게 기억하고 계신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네 행위를 안다”라고 칭찬하고 넘어가시지 않으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업을 위해 땀 흘리며 수고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행위와 2) 진리를 지키기 위해 거짓 가르침이나 거짓 교사를 물리친 성도들의 수고와 3) 로마의 탄압 속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핍박을 견뎌낸 성도들의 인내를 상세히 언급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편지를 통해 예수님의 상세한 칭찬을 들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황홀하지 않았겠습니까? 한없는 위로를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적용1) 그래서 이 말씀을 저에게 적용해봤습니다. 나중에 예수님 앞에 서게 될 텐데 그때 예수님께서 “한목사 수고했어” 이렇게 딱 한 말씀하시고 끝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한 목사, 네가 못된 성격 다 누르고 고등부 애들 살릴려고 영혼 품는 것 내가 다 봤다”, “카톡, 문자, 전화 다 씹혀도 어떻게 든 예배 한 번 나오게 하려고 애쓰는 거 다 봤어”, “아이들하고 친해지려고 평소에 하지도 않는 게임하러 PC방 가서 고생한 것도 다 안다” 고생했다. 수고했어. 설교를 쓰면서 상상만 했는데도 위로가 되요. 여러분 우리 주님은요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해 나를 드리며 헌신한 작은 것까지 놓치지 않고 기억하시는 분이세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 날 우리 주님은 다 기억하시고 알아주시고 칭찬해주신다는 겁니다.
(적용2) 저만 이 말씀을 적용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도 이 말씀을 각자 삶 속에서 적용해보세요. 주를 위해 드린 작은 것 하나까지도 전부 다 기억하시고 진심으로 칭찬을 상상해 보길 원합니다. 힘이 나지 않습니까? 위로가 생기지 않습니까?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 날, 우리가 얻게 될 위로는 지금 우리가 상상을 통해 얻는 것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클 줄로 믿습니다. 그 날 예수님의 풍성한 칭찬과 위로를 기억하며 하루하루 주를 위해 살아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책망)
그러나 이렇게 칭찬 받은 에베소 교회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책망은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처음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이단들과 싸운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이단과 싸운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위해 하나뿐인 아들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 위에서 살 찢고 피 흘려 모든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단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정죄하고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 속에서 그만 이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그것을 책망하고 계시는 겁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일은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별거 아닌 일이 아닙니다. 5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게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무슨 말입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회개치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신다는 겁니다. 그 교회를, 그 사람을 더 이상 쓰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심판의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이 담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내게 맡겨진 사명이 짐으로 느껴진다는 겁니다.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감당하면서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일이 맡겨지면 그 일을 감당하기 전부터 피곤함을 느낍니다. 여러분 이런 마음 가운데 기쁨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오히려 섬기면 섬길수록 하나님의 평안으로 마음이 가득하기는커녕 점점 영혼은 사막해져가고 피폐해져 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원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영혼이 더 망가지기 전에 그 사람에게 맡긴 촛대를 옮기신다는 겁니다.
(적용) 여기 앉아 계신 성도님들은 처음 사랑을 지키고 계십니까? “나를 위해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낮고 천한 말구유에 누우셨다”,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살 찢고 피 흘리셨다” 이 단순한 진리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이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을 강타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이 진리가 무미건조하게 들린다면 우리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교회 일을 많이 한다 해도, 주님을 위해 물질을 드리고 헌신을 드린다할지라도 내 영혼이 살찌고 기쁨은커녕 점점 피폐해지고 망가져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이 더 망가지기 전에 촛대를 옮기시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점이 있습니다. 촛대를 옮기시는 일은 우리를 향한 배려와 사랑이면서 동시에 처음 사랑을 지키지 못해 우리에게 내려진 징계임을 기억해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 번뿐인 인생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지 못하고 구경꾼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복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일 날 간신히 예배드리며 살아가는 선데이 크리스찬을 복된 인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한 번뿐인 인생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을 때 가장 가치 있고 복된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권면 - 하나님의 처방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5절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한 마디로 회개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회개가 아니라 철저하게 회개하라는 겁니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어디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고 거기서부터 회개하라는 겁니다.
당시 이 가르침은 6절에 나오는 니골라당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니골라당은 공의 하나님은 전혀 강조하지 않고,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되며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율법이나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 지역에는 각종 우상숭배와 음탕과 부도덕한 모습이 판을 쳤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어떤 양심의 찔림이나 죄책감을 느끼질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6절입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여 회개를 가볍게 여기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5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철저하게 회개하라는 겁니다. 여기서 “회개하다”라는 동사는 단순히 감정적으로 느끼는 뉘우침 정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감정의 변화를 넘어 행동의 변화까지 일으키는 깊은 회개, 철저한 회개를 말하는 겁니다.
(적용)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땅의 교회들이 주님의 엄중한 회개의 말씀을 무겁게 듣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날 교회의 메시지들을 자세히 한 번 들어보십시오. 니골라당의 가르침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느낍니다. “죄 지어도 괜찮아!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야! 회개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용서해주셔!” 회개를 말하긴 합니다. 그러나 “죄가 얼마나 사람을 끔찍하고 비참한게 만든는지”, “죄와 끝까지 싸워야 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성도들을 위로하기에 바쁩니다. 교회는 반쪽짜리 복음, 반쪽짜리 위로를 말할 뿐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의 목적은 내 삶 속에 거룩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는데도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죄로부터 돌이킴을 일으키지 못했다면 그건 반쪽짜리 복음, 싸구려 복음, 오늘 본문에 니골라당의 회개라는 겁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쪽 눈 가리고 단순히 내 죄를 못 본채 하며 가려주시는 싸구려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향한 온전한 사랑이기 때문에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내 안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시고, 들추시고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죄와 직면하게 만들어서 “내가 어떻게 이런 큰 죄를 지었을까!” 가슴을 치며 실토하게 만듭니다. “다시는 그 죄의 자리로 가지 않겠다” 결단을 이끌어내고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죄의 사슬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원하시는 회개의 모습이며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원하시는 회개의 모습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주십니다. 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무슨 약속입니까?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인간은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에덴동산에 쫓겨나자 그들은 다시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을 살펴보면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이 다시 열립니다. 열릴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생명나무에서 열리는 과실을 먹고 즐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 생명나무의 열매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무엇입니까? 잠언 3장 18절입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이어서 잠언 11장 30절입니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생명나무와 지혜가 병렬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생명나무와 지혜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겁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첨단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선택하는 기준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타락 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고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 긍휼하심, 사랑하심, 용서하심, 자비하심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누리는 것이 바로 지혜 있는 자의 모습이며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깐 지금 하나님께서 삶 속에서 우리와 매일 매일 매순간마다 만나주시겠다는 겁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에게 생명나무 열매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이 약속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예배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감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생명나무의 열매를 삶 속에서 누리는 성도님들은 설거지가 다릅니다. 설거지를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이 물밀 듯이 갑자기 마음속에 밀려와 그 순간 울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혼자 부흥회를 합니다.
운전할 때도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을 강타해 눈물범벅으로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합니다.
밤에 잠 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속삭임 속에서 스르르 잠이 듭니다. 의지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가 우러나온다는 겁니다. 내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성품을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이 복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다는 겁니다.
(적용) 그런데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약속하고 있는 생명나무의 복들을 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개”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물가로 나아가기는 하지만 그 앞에서 손과 발만 담궜을 뿐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영혼을 담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과 발만 씻을 때와 온 몸을 물에 적시며 샤워 했을 때 느끼는 개운함이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온 영혼이 회개의 물가에 푹 잠겨서 우리가 다시 깨끗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이 다시 태어날 때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하나님과의 친말감을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친말감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 그로 인해 내 영혼이 만족한 그 상태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상황도 빼앗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걸로 하루하루를 살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더라도 고개 푹 숙이고 한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회개의 깊은 물가에서 날마다 새롭게 된 영혼으로, 거기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느라 몸은 피곤에 쩔어 있지만 그러나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은혜로 너무나 기쁘고 만족되어 찬양이 끊이지 않는 삶이 우리의 삶이라는 겁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명나무의 열매를 누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해주시기를 간구합시다. “성령님 내가 어디서, 왜, 무엇 때문에 처음 사랑에서 떨어졌는지 그 죄의 자리를 떠올려 주시옵소서. 그 죄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시 한 번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회개의 깊은 물가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담기게 하시고, 그리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나무의 열매를 누리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라기는 이 은혜가 오늘 저녁에 말씀 붙잡고 기도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충만히 임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가 384장 / 새찬송가 585장
예수님께서 오른손으로 주의 사역자들을 강하게 붙들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 문턱이 닳도록 교회에 찾아오셔서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최고의 열심히 교회를 다스리시고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 밤에 바라봐야 할 분은 누구이십니까? 코로나로 약해진 교회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1) 주님 오늘 이 밤에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에 우리의 영적인 눈이 고정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2)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히 나의 열심, 우리의 열심, 우리 교회의 열심히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찬양하는 자, 설교하는 자, 기도하는 자, 예배하는 자, 주차 봉사하는 자, 안내하는 자 모두 그리스도의 열심으로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3) 걱정과 염려로 교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실 교회의 영광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이 시간 다같이 그리스도의 열심을 내 마음에 부어 달라고, 그 열심에 발맞추어 소망 가운데 교회를 섬기는 인생 되게 해달라고 우리 다같이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단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칭찬해주셨습니다. 단순히 “수고했다”가 아니라, 작은 수고부터 큰 수고까지 기억하시며 하나하나 짚어 가시며 칭찬해주셨다는 겁니다. 우리 말씀 붙들고 다같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1) 주님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의 영광스러운 칭찬과 위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2) 주님 우리가 세상에서 칭찬 받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그 날 주님의 칭찬에서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하늘의 영광을 삶 속에서 크게 더 크게 보여주시옵소서. 3) 그 하늘의 영광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점을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책망의 목적은 책망 그 자체가 아닙니다. 회복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복을 위한 처방전을 주셨습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라”는 겁니다. 이는 니골라당의 회개와 달리 철저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힘으로 회개의 자리로 나갈 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께서 역사해주셔야지만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1) 성령님, 우리가 어디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는지, 무엇 때문에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는지 왜 잃어버렸는지 그 죄의 자리를 이 시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2) 성령님, 우리의 심령 가운데 애통의 마음을 부어주셔서 내 죄를 아파하게 하시고, 미워하게 하셔서 죄와 싸우게 하소서. 죄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3) 그리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나무의 열매를 우리의 삶 가운데 충만히 누리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마지막으로 탁주희 집사님 남편 되시는 김기영 성도님과 김은영 집사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시고, 각자 기도제목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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