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은 의인 앞에 엎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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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설교 / 2021.05.26
본문 : 잠언 14장 11-19절
제목 : 악인은 의인 앞에 엎드러진다 / 찬송가 357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설교자 : 윤영준 목사
주제: 하나님은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정직한 자를 높여주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도입] 잠언 - 비교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해준다.
잠언은 히브리어로 ‘마샬’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비교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언의 목적은 대조적인 것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것에 있습니다. ‘악인 - 선인’ ‘슬기로운 사람 - 어리석은 사람’ 등을 비교하면서,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진리를 오늘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에서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에서 삶의 기본은 하나님의 관계에서 규정된다고 알려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저 잘 살기 위한 비법이 아니라 옳다라는 개념도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나오고, 그르다라는 개념도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나오고, 도덕적인 행함도 하나님의 관계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11절은 악인의 집 / 의인의 장막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11절입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어떤 이에게 집과 장막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집에 사시겠나요? 천막에 사시겠나요?’ 집과 천막을 동시에 보여주며 어디에 살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집을 택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천막보다는 집이 튼튼하고 안정되고 평안함을 허락해주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반대로 집은 망하겠고, 장막은 흥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한다고 말합니다. 단순한 거주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이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그 집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집이 화려해보이고, 견고해보여도 악한이의 집은 악한 자가 거하기에 망하고, 상대적으로 장막은 초라해보이고 비바람에 흔들리고 휘청거려보여도 선한 이가 거하기에 선한 이의 장막은 흥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악한 집이 망하고, 정직한 자의 장막이 흥하기 위한 전제는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사람은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선악을 내가 판단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대로,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대로 행합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세상은 결코 평화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누가 더 잘 살고, 누가 더 잘 되게 될까요? 이런 세상에서는 온갖 부조리 속에서 불의한 사람이 더 잘살고, 악인들은 더 흥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악인의 집은 더 번창하며 의인과 정직한 자의 장막은 더 초라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악인이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자가 의인의 문에 엎드리는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예시] 무대 뒤에 계시는 하나님 / 드라마나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 장면을 보면, 자막으로 영화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쭉 올라갑니다.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 배우들뿐만 아니라 촬영감독, 조명감독, 로케이션팀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고했고, 애썼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제일 중요한 이름을 하나 뽑으라한다면, 누구를 뽑을 수 있을까요? 영화 감독입니다. 그런데 정작 영상 안에는 감독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름도 등장하지 않고, 음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는 그 어느 누구도 감독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비록 감독의 모습과 음성은 화면을 통해서 비추어지지 않지만, 관객들은 감독의 존재를 느낍니다. 배우들의 연기와 배경음악, 배경들을 통해서 감독의 존재를 끊임없이 느끼게 되고, 과연 이 장면을 통해서 이 대사를 통해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관객과 감독 사이의 교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는 감독이 원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적인 존재에 대해서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영화감독의 존재에 대해서 인식하듯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영화감독이 엔딩 장면을 결정하듯이, 하나님도 엔딩 장면을 이미 정해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결론으로 세상을 인도해가십니다.
그 결론은 무엇인가요? 잠언 14장 11절입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19절입니다.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하나님 이야기의 결말은 선인은 흥하고, 악인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2)악한 집이 망하고, 정직한 자의 장막이 흥하기 위한 두 번째 전제는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공의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중에 하나이며, 하나님은 완전하고 의로운 기준으로 잘못된 것과 잘된 것을 가감없이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공의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재는 악인이 득세하는 것 같고, 거짓과 속임수가 범람해보이는 것 같아도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 가운데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 모든 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창세기 말씀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말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장 15절의 배경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사단의 유혹으로 인하여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깨져버렸습니다. 사람의 타락의 순간,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의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정해져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 분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 또한 정해져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게획 안에서 악인의 불의의 소망이 무너지고, 선인은 높임받는 메시지가 잘 드러나는 성경은 구약의 ‘에스더서’입니다. 사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고, 누구든지 에스더서를 읽는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그 역사 속에서 함게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이인자였던 하만이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하여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하여 그 하만의 음모를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만은 자신의 꾀에 자신이 빠지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통쾌한 역전승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려하고 견고하여 무너질 것 같지 않은 하만의 집을 무너뜨리시고, 유대민족에게 구원의 기쁨과 소망을 선사하셨습니다.
에스더 9:22
“유대인들이 대적들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이 날을 유대인들은 ‘부림절’로 부르면서 기념하였는데요. 이 부림절이 되면 모여서 에스더서를 낭독하고 잔치를 연다고 합니다. 재밌는 것은 에스더서에서 ‘하만’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레거’라는 장난감을 요란한 소리로 돌리면서 시끄러운 소음을 발생시킵니다. 에스더서를 읽어나가지만, 에스더를 통한 하난미의 일하심과 역사를 읽어나가지만, 하만의 이름이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것이죠.
악인들과 불의를 행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득세할지라도, 자신들의 이름을 높인다할지라도, 그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하고 불리우지 못하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악인과 의인의 결말은 정해져있습니다.
잠언 11장 7절은 말합니다.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모든 사람들은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악인이 품었던 소망은 그들과 함께 죽습니다. 세상 속에서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붙들고 있었든지… 얼마나 화려하고 견고한 집을 세웠든지… 내일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든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악인의 불의의 소망은 결국 끊어지지만, 의인의 소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0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의인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음은 없어질 자신이나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살아계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때문에 이 소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둔다면, 오늘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모든 일들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혜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음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3)하나님의 백성은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경외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쉽지 않다. 타인의 일에는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막상 내 문제가 되면 하나님 신뢰의 모습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이번 주간, 특이하게도 밤 11시에 두 통의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날짜에 다른 사람에게 온 전화였습니다.
1) 첫 연락은 지난 교회 고등부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고3 친구인데,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 학교나 사회적으로 보면 막나가는 친구입니다. 술담배도 하고, 피어싱도 한 친구입니다. 그래서 처음 고등부에 왔을 때, 학생들이 굉장히 꺼려하고 힘들어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친구가 매주 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왔습니다. 기억나는 일은 같이 다니던 친구가 교회에 안나오자 그 친구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는데 욕을 섞어서 기도하는 겁니다. 그것 하나 하나가 참 기특하고 애뜻한 친구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아무래도 고3이다보니 공부는 안하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도 되고, 힘든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고, 그 자리에서 인내하고 버티다보면, 보이지 않던 길도 보이게 된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2) 이틀후 밤 11시에 또 전화가 왔습니다.이번에는 남동생에게 온것이죠. 사실 동생이 전화가 오면 기뻐야하는데 마냥 기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밤늦게 전화가 오면, 대부분 도움을 청하고 연락할 때가 많아서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 월급 받은 돈을 코인에 투자했다가 잘 안되서 핸드폰 요금을 대신 해달라고, 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한참동안 감정적으로 훈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너가 한 이야기는 형으로서 동생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너는 나를 진짜 신뢰하면서 동생과 통화했니? 너는 나의 마음으로 동생을 대했니?” 하나님께서 물으시는데 드릴 말씀이 없더라고요.
제 이야기는 옳은 이야기들로 가득했지만, 하나님을 배제한체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 가운데 임하시고 일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없이 온갖 감정적으로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단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끔 우리는 가까운 문제일수록 하나님을 배제하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자녀, 내 가족, 내 사업, 내 재정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 뭐하나 잘못될까 두려워하고 전전긍긍하며 매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세상의 패배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가운데 일하고 계십니다.
무엇 하나 잘못될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하는 나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엎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그 분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듣고 귀기우리는 사람입니다.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이렇게 되면 안될 것 같다는 내 생각과 판단,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사람입니다.
하만의 음모가 진행되던 그 때에 황후 에스더에게 모르드개가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너는 홀로 목숨을 부지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가만히 있음으로서 혼자 안전을 보상받을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였습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너의 자리가 안정되고 평안하다고 해서 가만히 있지말고, 지금 하나님은 뜻이 무엇인지 묻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에스더는 삼일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고백으로 왕께 나아갔습니다.
비록 둘 사이의 대화 가운데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보여주었던 모습은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이였습니다. 현재 나의 처지와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 뜻 가운데 자신을 던져내어드리는 삶, 끊임없이 하나님께 듣고 순종하는 삶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통해서 자신의 공의와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하만은 자신이 준비했던 나무장대에 자신이 매달림으로서 자신의 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을 존귀히 여겨주셨습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는 진리가 성취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창조만 하시고 그저 뒷짐지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무대 뒤 감독처럼 자신의 뜻을 이 땅 가운데 펼치시고, 완성해가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우리의 인생 깊은 곳까지 개입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오늘의 행함과 수고는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그 분은 자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펼쳐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분의 결말, 놀라운 영광의 결말로 인도해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결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온 땅의 주인이 되어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세상’이십니다. 빌립보서의 말씀이 성취되는 시간이다.
빌립보서 2장 9-11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 때에는 예수님은 더이상 믿는 자 가운데에서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 날에는 믿는 자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도 자신을 계시하시고, 온 만물이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이 무릎을 꿇을 것이며, 모든 입이 주를 시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하는 그 자리에 우리가 서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신 이 결말을 보시면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망설이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선악을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려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끊어내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뜻을 묻고, 그 분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결말을 알면서도,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 어리석은 발걸음을 돌이키십시오.
오직 생명의 길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며,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 가운데 구현시켜내가는 온 사랑의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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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하나님 오늘도 하님께서는 살아게시며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고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한 편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저의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배제한체
나의 뜻과 계획만을 고집하였던 저의 모습을 용서하여주옵소서.
또한 타인에게도 그러한 믿음없는 시선을 강요했던 저의 모습 또한 회개합니다.
하나님 또 한 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충성되이 살아가지 못하는 나의 모습도 용서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실거야 / 하나님이라면 하셔야 되는거 아니야
하나님을 내 편견으로 판단하고, 나태하고 게을렀던 저의 모습을 용서해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의 약속과 결말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저희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