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2]세마포 울타리와 유일한 문

출애굽기, 성막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33 views
Notes
Transcript
20210512 수요기도회
찬송 82 533
기도 김정숙 권사
본문 출27:9-13 (구p.123)

서론

성막은 이동에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조립식 천막이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이제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 받은 후 그들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이동하게 될 것이다. 그 길은 광야길이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낮에는 거친 모래바람이 불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뜨거운 열기바람이 부는 곳이다. 해가 지면 기온이 툭 떨어져서 덮을 것이 없으면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추운 곳이다. 문제는 이런 험난한 기후도 기후이지만 더 중요한 특징은 계속 이동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에 따라 멈추라 하시면 성막을 중심으로 각 지파들이 동서남북으로 진을 쳐야 하고,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다시 성막을 중심으로 모든 지파들이 행진을 시작한다. 즉 성막은 수시로 이동을 위해 포장되었다가 다시 정착할 때면 설치 되었다가를 반복해야 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로 성막은 이처럼 기동성을 위하여 가죽들과 끈, 천들을 엮어서 대강 세워둔 것으로 상상할 수 있겠지만, 성막 전체의 뼈대와 안에 있는 기구들은 모두 정금으로 입혀졌다. 그 안에 들어가는 나무재료나 보석, 온갖 진귀한 재료들을 오늘날 값어치로 환산한다면 대략 20억원을 뛰어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출25:2 의 말씀을 보면 성막과 성막의 모든 기구와 재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헌물로 만들어졌음을 감안한다면, 성막에 엄청난 헌신과 감사와 봉사가 들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난 주 수요기도회에서 출25:1-9까지를 통해서 성막에 대한 서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성막에 대해 살펴볼 것인데, 앞으로의 설교방향은 성경에 기록되는 순서에 따라서 진행하진 않을 것이다. 즉 출25:10-22 까지의 본문으로 증거궤를 살펴보고, 또 이어지는 본문인 23-30절을 통해서 진설병 두는 상을 살펴보고, 31-40절까지 등잔대와 기구들에 대해 살펴보고… 이처럼 성경에 기록되는 순서대로 가지 않고, 성막의 바깥에서부터 지성소까지 들어갈 때 마주하는 순서대로 살펴볼 예정이다.

울타리

우리가 성막에 대해 생각할 때에 단순한 텐트식 건물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성막은 일반 텐트식 건물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는 바로 울타리였다. 캠핑을 다니시는 분들은 아마 아실 것이다. 텐트를 설치했는데 그 지역이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면 바람에 텐트가 무너지지 않도록 윈드스크린을 설치한다. 윈드 스크린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목적은 바람을 막아주는 용도이다. 그러나 이것이 점점 바람만 막아주는 용도만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내 공간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도 하고, 또 야생짐승들로부터 텐트를 보호해주는 역할도 감당하기 시작하고 또한 요즘은 감성적인 면들까지 부각시킴으로 하나의 인테리어 기능까지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집인 성막의 주변에는 울타리가 쳐저 있었다. 당연히 성막 안으로 들어오려는 자들은 유일한 성막의 문을 통해서만 입장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친히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 가운데, 특별히 사랑하는 자기 백성 가운데 머무시며 그들을 그곳에서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데도 왜 울타리를 치게 하셨을까? 그냥 울타리 없이 성막의 사면을 다 열어서 이왕이면 모든 사람들이 사방에서 하나님께로 나아오고, 사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며,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시는 것이 더 쉽고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막 주변에 울타리가 쳐저 있는 것에도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울타리의 기능

울타리의 기능은 무엇인가?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목적은 밖으로부터 안을 보호하는 것이다. 성막 울타리의 주 목적 역시도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울타리는 단순하게 성소만을 보호하기 위하여 쳐 둔 것은 아니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앞에 무분별하게 나아와서 죽지 않게 하시기 위함에 울타리를 치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까이 두시길 원했으나 무분별하게 자기들만의 방식을 고수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가 공의로우심 앞에 죽는 걸 원치 않으셨다. 본문 출27:9를 보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막에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하기 위해 그 주변을 세마포 울타리로 쳐 놓았다. 세마포는 예수께서 장사되실 때에도 사용되었던 하얀색 깨끗한 천이다. 세마포는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를 표현할 때에 사용되곤 했다. 또한 놋은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을 강조하실 때에 사용되었었는데, 이 의미가 그대로 본문에 반영된다면 놋받침 역시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인간이 죄를 계속하여 짓고 있는 이상, 울타리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 앞에 나아오는 것을 막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전한 순종이다. 그리고 그 완전한 순종에 대한 말씀을 두 돌판에 새겨 주셨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만일 인간이 그 중 한가지라도 범하게 된다면 반드시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응징을 받아야만 한다. 야고보도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데, 약2:10을 찾아보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우리가 99개의 율법을 지켰다 하더라도 단 한가지의 율법을 어기면 100개 전체를 어긴 죄인이 된다. 우리가 9,999개의 율법을 지켰더 하더라도 단 한가지의 율법을 어기면 10,000개 전체를 어긴 죄인이 된다. 고로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내 의로, 내 능력으로, 내 순종으로, 내 헌신으로 도저히 하나님의 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율법은 철저하게 우리의 죄인됨을 지적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인간이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한다해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따라갈 수 없으며, 우리가 아무리 도덕을 잘 지킨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지저분한 죄인일 뿐이다. 따라서 결론은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율법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할 수 없다.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다. 율법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좌절하고 쓰러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세마포 울타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을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 그 공의로우심 앞에서 격리시켰다. 철저하게 죄인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수 없음을 나타나는 역할을 했다. 마치 율법과도 같았다.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아니라면 결코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울타리였다. 죄인은 누구든지 '접근 금지, 혹은 입장 금지'의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길이 있었다. 죄인은 세마포 울타리를 넘어서 들어오거나 부수고 들어올 수 없었다. 오직 특별하게 마련된 유일한 문을 통해서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성막,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성막 뜰 동편 끝에 있었다. 또 다른 말씀인 출38:18을 찾아보자.
뜰의 휘장 문을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짰으니 길이는 스무 규빗이요 너비와 높이는 뜰의 포장과 같이 다섯 규빗이며
문은 세마포 울타리에서 열린 유일한 곳이자 성막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문은 폭이 9미터, 높이가 2미터가 조금 넘었다. 너비가 9미터라는 것은 그만큼 활짝 열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이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아름답게 수 놓아져 있었다. 물론 이 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훗날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 역시 행4:12에서 공회원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친히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 뿐만이 아니다. 문에 수 놓아진 네 가지 색 역시도 주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포장은 하얀 새마포로 만들어졌으며, 곱게 꼰 베색,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 놓은 무늬가 있었다. 이 4가지 색은 문에만 수놓아진 것이 아니라 성막 안에 여러 부분에 동일하게 수 놓아져 있었다.
당시 자색은 왕권의 표시이며 왕을 의미할 때에 주로 사용되던 색이었다. 또한 홍색은 피의 색으로서 희생을 의미한다. 베색은 하얀 색으로서 완전함과 의를 의미하며, 또한 청색은 당시 하늘을 상징할 때에 사용하던 색으로 알려져 있다. 이 네가지 색이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에 수 놓아져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가운데로 이끄시는 유일한 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에, 유일한 문에 치장된 이 4가지 무늬 역시 아무 의미없이 그저 이쁘게 치장하기 위해서 수 놓으라 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색들은 온전히 유일한 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왕으로써 이 땅에 오신 분이자 희생하는 종으로 오시었고,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묘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기록한 사복음서에서도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그리고 있으며, 마가복음은 그리스도를 고난 받는 종으로 그리고 있다. 누가복음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나타내며, 요한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성소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4가지 색 역시도 불쌍한 죄인을 위해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복된 소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너비 9미터에 이를만큼 넓은 문은 누구나 이 문을 통해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했다. 신약이 기록되던 시대에 팔레스타인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첫째는 유대인이었는데 마태복음의 1차 독자들이었다. 둘째는 이스라엘을 정복했던 로마인으로 마가복음의 1차 독자였다. 셋째 부류는 헬라인이었는데 누가복음의 1차 독자가 헬라인이었으며, 넷째 부류는 기타 민족들로서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신자들의 무리였다. 요한은 이 부류에게, 특별히 교회의 모임 가운데 요한복음을 기록하여 복음을 전해 주었다. 결국 당시 사람들 중 아무도 복음에 도외시 되거나 배척당한 자들이 없었다. 모두에게 들어갈 수 있는 대책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갈 수 있는 성막의 문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을만큼 넓은 문이다. 하나님의 초대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말씀 가운데 비교되고 있는 것이 두개가 있다. 그것은 울타리와 문이다. 율법의 울타리는 '죄인은 접근 금지'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문은 '누구든지 들어오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왕이자 종이며 사람이자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벗어나서는 절때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다른 문은 없다.
허나 악한 사탄은 다른길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많은 길들을 고안해 두었다. 그러나 그 모든 길들은 기만의 길이다. 그 끝은 영원한 멸망일 뿐이다. 잠14:12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전무후무한 기만의 시대요 타락의 시대며 착각의 시대이다. 수 많은 거짓 음성들이 일어나 죄인들을 향하여 자기들만의 참된 길을 증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신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오늘날 이 시대 가운데 외쳐지는 수 많은 거짓 복음에 흔들리지 않고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경의 가르침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하는 것이 유일하게 살 길이다.
말씀을 정리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하고자 한다. 사랑하는 하동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날마다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시는가? 그리고 이 예배의 자리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하게 경험하시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울타리가 쳐저 있다 하더라도 울타리 밖에서 서 있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성소 안으로 드러갈 수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께 선택을 받지 못하여, 혹은 유일한 문을 알지 못하여 아직도 울타리 밖에 서 있는 자들은 성소의 겉 면만 보게된다. 해달의 가죽, 그 뒤숭숭한 색으로 덧씌워진 투박한 모습밖에 볼 수 없다. 성소의 진정한 가치와 아름다움, 그 고귀함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투박한 겉면만을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성소 안으로 들어가 피를 흘리고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은 후, 거룩한 향을 힘입어 지성소로 들어가는 자들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성소 안의 거룩하고 화려하게 수놓아진 성전기구들을 대면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온몸으로 경험한다. 우리가 앞으로 계속해서 성소와 지성소에 대해 살필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의 상징인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유일한 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가야 하며, 피를 흘리고 수족을 씻으며 향기로운 향을 피워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온갖 무늬들이 수놓아져 있는데, 그 그림들은 그룹들의 그림이다. 출 36장에 보면 지성소를 제작할 때에 장인들이 정교하게 그룹들을 수놓았음을 살펴볼 수있다. 천사들이 지성소에 들어온 제사장과 함께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무늬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장면이겠는가? 상상해보라. 하나님께 나아가기 까지 온갖 절차를 밟고 그 순서대로 진행하여 주의 거룩하신 지성소로 들어가니 천사들이 지성소안을 날아다니며, 들어온 제사장과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광경이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음에 성막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며 나눌 말씀이지만, 우리는 외인이 아니다. 세상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렇기에 예배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하게,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천사가 무릎꿇고 예배하며 경배하네 영원한 생명 말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주"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신 임재를 느끼고, 천사들과 함께 이 거룩한 공간 안에서 오직 홀로 존귀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감격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그 유일하신 문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여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날마다 우리의 몸을 말씀으로 정결하게 씻어내고, 죄인의 죄를 덮어주시는 거룩한 향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과정이 아니라면, 그것이 아무리 우리 눈에 선하게 보일지라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 수 없다. 죄인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울타리를 치시며, 그저 막으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문을 두셔서 사람과 교제하려하신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자. 그리고 우리에게 유일한 문을 허락하신 그분의 뜻에 따라 오직 유일한 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