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금요)

일곱 교회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20 views

금요 기도회

Notes
Transcript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개요]
서머나는 어떤 도시인가?
지리적 위치
경제적으로 풍요로움(관광업, 로마 황제에게 충성)
기독교인들은 환난과 궁핍 가운데 거함 ->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옥에 갇히고, 전재 산이 몰수 당했지만 주님의 눈은 다르다. 우리는 이 기준을 붙잡아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긴 것 같으나 진 사람이 되고, 성공한 것 같으나 망한 것이 되며, 부유한 자 같으나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만 평가한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쌓아 올리기 위해 애쓴 그 사람의 눈물과 노력과 애씀을 보신다는 것이다. 성경에 아무것도 쌓은 것 없이 그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을 죽음을 맛보지 않게 하셨다. 그분의 기준은 세상과 다르다. 얼마나 쌓았는가, 얼마나 남겼는가가 아니다. 사데교회는 금과 관련된 사업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선교도, 봉사도, 헌신도 많이 했다. 그러나 죽었다고 말한다.
사단에게 공격 받는다. 사단의 하수인 노릇하고 있는 유대인으로부터 훼방을 받고 공격을 받음. 사탄과 그의 하수인이 우리 공동체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사탄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않고, 우리의 삶이 사탄의 나라를 위협할 만큼 위협적이지도 않는다면 사탄은 우리를 공격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여러 환난이 다가온다. 고난이 다가온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고 지나친다. 경제적인 이유, 정치적인 이유 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모든 정황을 살펴보니 그 배후 뒤에 사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정 받은 것이다. 세상에는 회색지대는 없다. 하나님께 속한 자이든, 사단에게 속하자 이든 둘 중에 하나이다. 만약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공격이 있다면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속한 자인 줄 확신하고 기뻐해야 된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단의 훼방과 공격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서머나 교회는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환난과 궁핍의 단어 뜻에서 찾아보는 그들의 고난들! 길드조합 가입으로부터 제외 / 색출하려는 자와 피하려는 자! 항상 쫓기는 긴박감과 압박감 속에서 사는 삶! 사탄의 불 같은 공격 앞에 마음이 많이 약해졌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고난과 핍박을 받아야 되는지 의문도 생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와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9절)
내가 너를 안다. 위로의 말.
우리 마음속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환난과 궁핍이 끝나겠구나! 이 고난으로부터 주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구나!” 자연스럽게 이 사실을 우리가 기대하게 됨.
3.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 요약하자면 무엇인가?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예) 오늘 날로 표현하자면 머지 않아 곧 우리가 예배 할 때 불한당들이 들이 닥쳐서 우리 중에 몇명을 죽일텐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충성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편한 기독교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드리면 주님께서 복을 주신다. 아니다. 천국 은행은 이율이 30배, 60배, 100배라서 주님께 드리면 적어도 30배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 아니다. 젊은 청년들에게 지금 현재의 시간과 헌신과 열정을 드리면 나중에 주님께서 장미빛 미래로 갚아 주신다? 아니다. 성경은 이러한 진리를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말한다. 이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삶? 쉽지 않다. 믿음대로 살면 살수록 더 큰 재정적인 압박과 심적인 고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너무하지 않은가? 지금 툭 치면 퍽 하고 쓰러질 것 같은 서머나 성도들인데, 그 환난에서 구원해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꺼내시는 마지막 카드를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게 된다.
4. 그리스도께서 꺼내시는 카드(1절, 10절, 11절)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았났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 예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생은 예수 믿지 않은 자들도 마지막 부활의 날에 경험한다. 우리가 얻은 영생은 영광의 영생이다. 우리는 둘째 사망의 해를 경험하지 않는다. 둘째 사망이 무엇인가? 첫째 사망이 영적인 죽음이라고 한다면, 이긴 것 같으나 진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결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찌어다"
생각해봐야 할 주제들
1.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인가? 서머나 교회는 부요한 교회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상은 서머나 교회가 부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은 다르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면 성공한 것 같으나 실패할 수 있고, 부요한 것 같으나 가난한 자가 될 수 있고, 이긴 것 같으나 지는자가 될수 있다. 사무엘상 16장 7절을 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은 이 땅에서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가?를 집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 그래서 에녹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 없이, 그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루하루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을 뿐인데 기라성 같은 수많은 위대한 성경의 위인들을 나두고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들림받는 은혜를 맛보게 되었다. 어떤 것이 성공한 삶인가? 어떤 것이 풍요로운 삶인가? 어떤 것이 승리자의 삶인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는 내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
2. 내 안에 사단의 공격이 있는가? 무엇이 있는가? 마음의 공격, 생각의 공격(낙심과 좌절)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신앙으로 바로 설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단에게 그것이 위협이 된다. 그것을 통해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사단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속한 자다. 기뻐해야 한다.
3. 하나님을 잘 믿는데, 자꾸 내 삶이 힘들어진다면? 경제적으로 힘들어진다면? 서머나 교회처럼 재산을 몰수당하고, 극심한 환난과 궁핍을 겪는다면? 하나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결코 망하지 않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왔는데 그 믿음이 흔들릴만큼 환난과 궁핍을 겪게 된다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의심이 생긴다. 목사라도, 장로라도 의심이 생긴다. “하나님 정말로 살아 계시는가?”, “살아계시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예화) 니체 아닌가?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한 니체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 중에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런 그가 왜 신은 죽었다고 말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에 대한 의심 때문이 아니다. 당시 그가 경험한 타락한 교회의 현실 때문이다. 부도덕과 부패가 세상과 별반 다를바 없는 교회와 성도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며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중에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당한 환난과 궁핍을 당한다면 과연 몇명이나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성경의 3대 의인 중에 하나엿던 욥마저도 흔들렸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말한다. “왜 내게 침 삼킬 틈도 주시지 않을 만큼 큰 고통을 주십니까?”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욥의 마음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큰 고통과 환난 가운데 하나님께 더 나아가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이 마음 때문에 나아가지 못한다. 존재에 대한 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다. 하나님께 내 마음을 알아주신다. 내가 주님을 우해 환난과 궁핍 가운데 처함을 알아주신다. 의심이 해소가 되면 확신이 되고 굳은 믿음이 된다.
말씀 : 요한계시록 2장 8-11절
제목 :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본문]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론
5주 전 저번 시간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도 요한계시록 말씀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사실 요한계시록 말씀은 설교하기가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아시겠지만 당시에만 쓰였던 단어와 상징 언어가 주로 쓰였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설교자들이 요한계시록 말씀은 피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요한계시록 말씀을 고집하는 이유는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오늘 날 한국 교회의 필요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일곱 교회에만 전할 내용이 있으셔서 일곱 교회에게만 편지를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생각할 때, 일곱은 “완전” 또는 “전부”를 뜻합니다. 즉 계시록에 일곱 교회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를 상징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존재했던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 날 한국교회, 우리교회에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오늘은 특별히 일곱 교회 중 예수님께 칭찬 받은 서머나 교회를 살펴볼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책망에서 피한 온전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서머나 교회가 예수님께 칭찬만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바라기는 서머나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우리 교회, 우리 가정,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들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론
(배경)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 30만 명의 아름다운 항구도시였습니다. 서머나는 그 어떤 소아시아 도시보다 자랑할 것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1) 먼저 서머나는 그 어떤 소아시아지역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서머나는 관광업이 발달했고, 그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2) 또한 서머나는 유럽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쓴 작가인 호메로스를 배출한 도시입니다. 3) 무엇보다도 당시 서머나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에 대한 충성심입니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자신의 신상을 모든 공공 기관 앞에 세우라고 명령했을 때, 가장 먼저 신상을 세우고 보고 했을 만큼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다른 도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이 충성심 덕분에 서머나는 다른 도시와 달리 정치적으로 독립된 의회를 가질 수 있었고, 또 로마의 보호 아래 엄청난 부와 자유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서머나는 이 정치적인 혜택과 안정감을 자신 세대뿐만 아니라 자녀 세대들까지도 이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눈에 밉보일 만한 어떤 작은 일도 도시 안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서머나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양심상 황제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상시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유순하고 착한데 황제 신상 숭배에 관해서는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서머나의 안녕이 위태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서머나는 도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서마나 그리스도인이 당한 핍박을 9절에서 “환난”과 “궁핍”이라는 두 단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환난입니다. 환난이라는 말은 헬라어 뜻을 살펴보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압박 상태”를 의미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30만 명의 서머나 시민들의 눈이 감시카메라가 돼서 365일, 24시간, 1분, 1초도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떤 사람의 눈에 띄어 고발당하고, 색출되어서 잡혀갈지 모릅니다. 예화) 마치 70, 80년대 한국사회에 간첩과도 같은 존재가 당시 서머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사회는 신고제를 도입하여 간첩을 색출하는데 혈안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간첩을 신고하거나 잡게 되면 포상금의 규모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간첩 잡아서 팔자 고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온 도시와 모든 국민들에게 소탕 대상이 바로 서머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곤고했을까요?
문제는 ‘궁핍’입니다. 궁핍이라는 말은 헬라어 뜻을 살펴보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무게 아래 짓눌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어의 뜻만 보면 이들을 짓눌렀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체감이 쉽게 되질 않습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속국 사람들은 대부분 장사를 통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당시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상입협동조합”, 즉 “길드”를 반드시 가입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길드에 가입하기 위해선 로마 황제를 향하여 “내 주여”라고 충성을 고백한 사람만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일단 길드에 가입하게 되면 막대한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길드원이 되지 못하면 그 순간 재산을 몰수당하고 모든 경제적인 활동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었습니다. 사실 당시 서머나 교회가 당했던 궁핍의 문제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쉽게 와 닿지는 않습니다.
예화) 그래서 예를 한 번 들겠습니다. 우리가 직장에 다니는데 국가 정책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만 경제적인 불이익을 준다고 생각해봅시다. 월급의 70%를 세금으로 내야 되고, 사업을 운영하는 성도들은 허구헌날 세무감사를 받아야 되고, 심지어 나중에는 개인 소유를 일체 허락하지 않고 국가에서 몰수해간다고 생각해봅시다. 이런 불이익 오늘 날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버틸 재간이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건 바로 눈앞에서 자식들이 배고프다고 우는 모습을 봐라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당시 서머나 그리스도인이 당한 궁핍의 강도는 이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버티고 견디고는 있지만 금방이라도 툭치면 털썩하고 주저앉기 일보직전의 상황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가운데 놓여져 있는 서머나 교회는 일곱 교회 중 빌라델비아교회와 함께 예수님의 책망을 피한 교회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무엇이라고 칭찬하셨을까요? 또 그들이 칭찬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9절입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머나 그리스도인들은 지독한 환난과 궁핍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교회를 바라보시는 기준 자체가 다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교회를 바라보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다른 교회에 쓰신 편지에도 잘 나와 있지만 특별히 사데교회에 쓰신 편지에 분명하고 선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데교회를 향하여 “너가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교회를 바라보실 때 ‘그 교회가 지역에서 얼마나 영향력 있는가?’, ‘성도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선교는 얼마나 하는가?’, ‘구제는 얼마나 하는가?’ 여기에 관심 있으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예수의 생명이 흘러넘치고 있는가?’, ‘예수의 생명을 지키기 성도들이 사력을 다하는가?’ 이것을 보신다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 서머나 교회는 쇠퇴하는 교회였습니다. 망한 것처럼 보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서머나 교회만큼 예수의 생명이 흘러넘치는 교회는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마음속에 예수 생명을 지켜내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9절 하반절에 보면 사단은 그들 마음속에 “예수 생명의 불”을 끄기 위해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그들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속에 “예수 생명의 불”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로마 황제를 향하여 “주여” 그 한 마디만 하면 경제적으로 풍족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는데도 끝끝내 그들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황제 신상 앞에서 머리 한 번만 숙이면 되는데 그들은 숙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도시 사람들의 차갑고 따가운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우리 예수님께서 최고의 칭찬을 하십니다. “네가 실상은 부요한 자다”, “네가 실상은 살아있는 자다
(적용) 여러분 우리가 구원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작은 예수 생명의 불씨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 예수 생명의 불씨를 우리의 힘으로 지켜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예수 생명의 불씨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말씀 장작”을 공급해야 합니다. 주일 날 한 번 “말씀의 장작” 공급하는 걸로는 이 예수 생명의 불씨를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아침이 되었든, 저녁이 되었든 “말씀의 장작”을 공급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의 장작을 끊임없이 공급할 때 그 위에 성령의 기름이 부어지면 우리 마음은 예수 생명의 불로 활활 타오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하여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도전1) 오늘 이 저녁에 여기에 모여 있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도전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의 예수 생명의 불씨가 되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모여 있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만이라도 예수 생명의 불씨를 끄지 않고 지켜주신다면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불쌍히 여겨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신다면, 코로나 때문에 잠시 주춤하는 우리 교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한 번 예수 생명이 넘치는 교회로 다시 회복되는 겁니다.
(도전2) 여기 앉아 계신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코로나 때문에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아이들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 있는 선생님들이 예수 생명의 불씨를 끝까지 지켜낼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실 때 우리 마음속에 작은 불씨로만 존재했던 예수 생명의 불씨가 아이들의 심령 가운데로 옮겨 붙어 예수 생명으로 충만한 교회학교가 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님께서 예수 생명을 지켜낸 우리 교회, 우리 가정을 향하여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라는 칭찬을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생명 끝까지 지켜내어 예수님의 칭찬을 듣는 귀한 삶이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계속 읽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환난과 궁핍 가운데 끝까지 견뎌내며 예수 생명의 불을 끄지 않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9절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이것은 공감과 위로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고생을 아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면서 그들의 모든 고생을 보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서머나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들의 아픔과 고생을 이해하시고 보셨다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10절과 같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앞으로 더 큰 환난이 올 텐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한없는 공감과 위로를 경험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이제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 고난에서 건져 주실 거야” 이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분이 나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가 겪는 환난과 궁핍을 아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계실 수 있겠습니까? 당장이라도 건져주실 거라는 기대하는 것이 당연한 신앙인의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장차 너희 중 몇 사람을 감옥에 넣어 믿음을 시험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정한 날까지 계속되는 환난을 겪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굉장히 당황스럽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당한 환난을 아실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당할 환난까지 아십니다. 그런데 건져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쉽게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예화) 예전 우리나라, 아니 지금도 어떤 전도자들은 예수만 믿으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어려움이 해결될 것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전도합니다. 막다른 골목길과 같은 상황에서 신적인 도움을 받길 원하는 사람들의 종교심을 이용하는 전통적인 전도법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그런 기독교는 없다”고 말합니다. 교회를 열심히 섬겨도 사업이 망해 경제적으로 쪼들릴 수 있고, 몸이 아픈데 병이 낫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법규대로 차선을 운전했어도 음주 운전자가 반대 차선에서 나를 향해 달려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잘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도와주셔서 당대뿐만 아니라 자녀까지 복을 누리며 천국 갔다는 간증들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은 삶에서 그런 기적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물론 성경에서 복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 복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복, 이 땅에서 고난 없이 사는 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까지 약에 취한 듯 이 땅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현실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사는 게 참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땅을 힘들게 살아가도록 방치하시는 하나님께 원망이 나오기도 합니다. 상식적으로 사랑하는 자녀가 힘들면 도와주는 게 옳은 일인 것 같은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신다고 말씀은 하시지만 우리를 방치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인생의 곤고함 때문에 참 많이 웁니다. 여기 오신 분들 중에서 기댈 곳이 없어서, 울 곳이 없어서 여기 앉아 계신 분도 있는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그러시는 걸까요? 자녀의 고통을 보시면 아프실 텐데 왜 우리를 내버려두실까요? 무언가 준비하신 다른 카드가 있으신 걸까요?
오늘 본문 곳곳에 그 카드에 대한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8절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라사사대”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관자요, 부활의 주님으로 서머나 교회에 방문하셨습니다. 이어서 10절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끝까지 싸워서 이기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둘째 사망의 해가 무엇입니까? 첫째 사망의 해가 죄로 인한 영적인 죽음이라면, 둘째 사망의 해는 영원한 죽음인 지옥에서의 죽음, 즉 완전한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권세, 즉 완전한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자유 한다는 겁니다.
위에 모든 힌트들을 종합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짜 복은 “영원한 생명”, “영생”입니다. 그런데 그냥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영광의 영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의 복”은 불신자들의 영생과는 다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신자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우리와 함께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영생과 우리의 영생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의 영생은 지옥 불의 권세 아래 놓인 고통의 영생입니다. 치욕의 영생이며, 후회의 영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생은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께서 직접 씌어주신 생명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며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하는 영광의 영생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편지 곳곳에 이 영광의 영생을 보여주시며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죽도록 충성해라! 내가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줄 것이다. 이 땅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조차 안 되는 영광의 영생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찬란한 영광을 기억해라!”
예화) 얼마 전 교역자들과 함께 캐비넷 난로를 정리했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옮기면 될 것 같지만 간단한 작업이 아닙니다. 안에 남아 있는 기름을 뽑아낼 때 기름이 손에 묻고, 바닥에 흐르고, 잘 닦이지도 않는 기름을 몇 십번을 문질러서 다시 닦고, 무거운 기름을 안전하게 별관 출입구 쪽으로 옮겨야 됩니다. 사실 이 작업은 힘든 작업은 아닙니다. 그냥 귀찮은 작업입니다. 그 날도 “이걸 내가 왜 해야 되나?” 하기 싫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입버릇처럼 부르는 찬양이 하나 있는데요, “나를 사랑하는 주님”이라는 찬양입니다. 많이 들 아시는 찬양이죠? 그 날도 작업을 하면서 이 찬양을 입버릇처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유독 제 마음을 울리는 한 가사가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주님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어서 나의 주가 되셨네
나를 사랑하는 주님 나의 목자 되시어서
나를 항상 인도하니 주만 따라가리라
제 마음을 울린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 오시면 천국에서 주님과 살리라 영원토록
주 오시면 천국에서 주님과 살리라 영원토록
천국의 영광이 제 마음을 강타한 겁니다. “아니 나 같은 자가 어떻게 주님과 영원토록 천국에서 살 수 있지?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그 순간 주를 향한 충성심이 불처럼 일어났습니다. 바닥 10번 문지를 거 20번 문지르고, 10번 쓸 거 20번씩 쓸었습니다. 너무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편지의 내용을 들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도 주를 향한 감사와 충성심이 불처럼 일어났을 겁니다. 이 감사와 충성심이 그들을 좌절과 낙망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을 겁니다. 그들로 하여금 십자가만 바라보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달려가게 만들었을 겁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는 이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충성하는 사람들입니다. 나 같은 자에게 천국을 주신 주님이 너무 감사해서 말 징그럽게 안 듣는 교육부서 내 돈 써가면서 교사로 섬기고, 구역장으로 섬기고, 안내로 섬기고, 주차 봉사로 섬기고, 교회 청소로 섬기다는 겁니다. 누구 하나 알아줍니까?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오시는 날 주님께서 알아주십니다. 내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 씌어주시며 영원토록 알아주신다는 겁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 환난과 궁핍에 시달리는 교회였습니다. 그 어떤 교회보다 예수 생명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예수 생명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 죄의 자리를 피했습니다. 황제를 주라고 시인하지도 않았고, 신으로 숭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기도제목 1. 주님 주일마다, 금요일마다, 수요일마다 예수 생명이 넘치는 말씀이 선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 사역자들은 강단에서 예수 생명을 선포하게 하시고, 듣는 모든 성도들은 삶 속에서 받은 예수 생명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 죄와 싸우고, 더욱더 경건에 매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교회에, 교육 부서에, 우리 가정에 예수 생명의 불이 충만하게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