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 없는 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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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 없는 찐빵’이라고 제목을 정해두고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팥 없는 찐빵’에 달달한 팥소가 없어서 심심한 맛으로 즐겨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만 찐빵을 샀는데 팥이 들어있지 않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당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찐빵 안에 달달한 팥소가 들어있는 것은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단팥빵을 정말 좋아하시는데 아버지에게 단팥빵이라고 하면서 안에 소가 들어있지 않은 빵을 드리면 그것은 불효일 것입니다.
‘팥이 들어 있지 않은 찐빵’, ‘팥이 없는 붕어빵’, ‘속 빈 강정’ 이런 말은 속은 아무 실속 없이 겉만 그럴듯 한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설교시간에 빵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고, 찐빵 안에 팥이 들어 있는 것이 정상이라면, 교회 안에는 무엇이 있어야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 무엇이 있어야 정상이고, 무엇이 없다면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살펴보고, 우리도 그런 교회로 더욱 더 굳건히 세워지기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새 계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이고, 이미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길게 말하고 있지만 이 새 계명은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요, 미워하는 자는 여전히 어두움에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기준으로 삼아 신자들을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들을 구별하고 또 경고한다는 점에서 요한서신을 받아보는 공동체 안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대립은 아주 심각해서 사도 요한은 18절에서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적그리스도는 참된 신앙을 미혹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같은 신앙공동체 안에 있지만 저들은 한 가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대립에 왜 사랑이라는 문제가 들어와 있는지 우리는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다 같은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심판자 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도신경을 함께 예배 시간에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았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런 신앙고백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 공동체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 고백하는 내용이 사랑이라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 고백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 고백의 내용을 제대로 소유하고 있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 고백 자체가 진실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랑합니다"라는 말만으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행동이 따라오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행동이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일서 3장 13절 이후의 말씀에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넘기셔서 이 부분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잘 아시다시피 형제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 요한은 지금 ‘형제를 사랑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이 지금 잘못 인쇄가 되어서 오류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 삶의 모습에서 ‘사랑’이 나타나기에 그 사랑을 통해서 그 사람의 신앙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한 아무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나에게 영생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는 그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인지, 구원을 받은 것인지, 영생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직 삶의 모습을 보임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증명된다고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 드리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고 계십니까? 교회의 명부에 적혀 있으니 그것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까? 우리 담임 목사님을 알고 있으니 그것이 증거가 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참 감명깊게 들어서 이전에도 말씀 드린적이 있는데 수업 중에 들은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는 행위의 조건이 붙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 받은 자로서 나타나야 하는 삶의 열매와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과연 그 사람이 구원 받은 자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자는 말씀을 들으면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반응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도록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나로서는 힘들고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가능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과 불가능을 뛰어 넘어 사랑하게 하실 하나님을 믿고 바라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 역시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 역시 말로만 해서는 진실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의 증명도 사랑이고, 신앙고백의 열매도 사랑이라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입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옳고, 크고, 대단하더라도 사랑과 분리되어 있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옳기 때문에 사랑을 놓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옳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옳은 것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옳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있어서 어떤 명분이나 진리도 사랑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능력들이 우리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것은 쓸모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시끄러운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왜 이렇게 사랑이 중요한 것입니까? 왜 이렇게 계속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든 것이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사랑이라는 말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성령님 역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삼위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넣지 않으면 기독교 복음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아무런 자격과 조건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아무런 논리가 성립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빠진 기독교는 기독교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오늘 제목처럼 ‘팥 없는 찐빵’입니다. 찐빵을 샀는데 팥이 없는 것은 가짜이고 사기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에 사랑이 빠지면 그것은 이단이고 사이비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사랑은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을 위하는 것 중에서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상대방을 소유하고, 통제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에게 찾아와 이런 요구를 하는 성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분들은 목사님을 찾아와서는 꼭 ‘저는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설교할 때 제발 웃어 주십시오. 설교할 때 큰 소리 치지 말아 주십시오’ 그 반대도 있다고 합니다. ‘목사님, 예전이 더 좋습니다. 요즘은 부드럽게 하시니까 맥이 빠집니다’ 목사님을 존경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목사님을 자신이 통제하려고 하는 이런 잘못된 마음과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이 사랑을 여러분의 삶에서 실천하라고 하면 여러분은 정말로 실천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친구가 직접 겪은 일인데 이 친구가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자 그 설교를 들었던 친한 친구가 ‘니나 잘해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자에게 이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고 둘 사이가 너무 친하기에 있었던 헤프닝이지만, 설교를 듣는 청중에게 이런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던 한 사건이었습니다.
제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성도님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말이 쉽지 실제로 하려고 해보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하나님 안에서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려고 하면 잘 안됩니다. 원수 정도가 아니라 나에게 작은 실수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커녕 용서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해가 잘 안됩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그 살인마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양자로 삼으면서까지 사랑하니 이 목사님이 정말 사람인지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우리의 사랑의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감정이나 신앙으로 사랑이 흘러넘쳐서 누구를 보아도 괜찮고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이 특출나거나 원래 사랑이 많아서 원수까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수였던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근거할 때 원수를 사랑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래 신앙 생활을 하고, 직분자인 나에게 아직도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다는 것에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랑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결국은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마치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은혜를 입어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이, 그 어떤 원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함도 얻을 것이요, 우리와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모든 것들을 누릴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 때문에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수 같은 그 사람, 눈에 밟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변화될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원수였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그렇게 될 것을 믿음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넘쳐날 때 자연스레 이웃들을 사랑하는 자로 바뀌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속 빈 강정, 팥 없는 찐빵이 되지 않기 위해서 교회 안에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팥 없는 찐빵과 같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것처럼 교회 안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아직은 내가 사랑해야 할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저 사람도 내가 은혜 받은 것처럼 변화될 것을 믿을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의지가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을 믿고 바라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할 때 그 사랑이 이어져서 이웃 역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가 팥 없는 찐빵처럼 겉만 멀쩡하고 속은 형편 없는 그런 교회가 아니기 바랍니다. 붕어빵 전도할 때 만든 붕어빵 속에 맛있는 팥소가 가득 들어서 정말 맛있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가 사랑이 넘쳐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 저 사람 먼저, 목사님 먼저, 장로님 먼저, 권사님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 사랑하여서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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