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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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기간 게으름을 극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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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잠언 6:9-11
제목 : 게으름 시리즈1
서론
시험 기간에 지친 여러분들을 위해 목사님이 퀴즈를 하나 내볼까해요. 퀴즈를 맞춘 친구에게는 목사님이 기프티콘을 하나 보내줄게요. 목사님이 2가지 그림을 보여줄 텐데요, 이 두 가지 그림을 볼 때 떠오르는 단어를 한 번 맞춰보세요. 첫 번째 사진이에요. 뭐 떠오르는 거 있나요? 아직 잘 모르겠죠? 처음 본 그림 같죠? 자 그러면 결정적인 힌트를 담은 두 번째 사진이에요. 그래도 모르겠나요? 그러면 세 번째 사진을 보여줄게요.
(맞추든, 못맞추든 설명 시작) 정답은 바로 ‘나태’에요. ‘게으름’이라과도 하죠. 첫 번째 그림은 나태를 상징하는 ‘벨페고르’라는 악마 사진이에요. 그리고 두 번째 그림은 신과 함께 영화에 나오는 ‘나태 지옥’이죠. 마지막 그림은 ‘나태 지옥’을 관장하는 초성대왕이에요. 목사님이 왜 설교 초반부터 ‘게으름’이란 단어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있을까요? 오늘 설교 주제가 바로 게으름이기 때문이에요.
[모든 사람이 겪고 있는 게으름의 문제]
여러분 중에 혹시 “나는 게으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나요? 없죠. 여러분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게으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이 사실은 유튜브 조회수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유튜브에 “게으름”과 관련된 단어를 검색해보세요. 게으름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다양한 강의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어요. 우리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뭐예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게으름의 문제를 겪고 있고, 또 그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경험상 알 수 있듯이 게으름을 이기는 것이 쉽나요, 어렵나요? 어려워요. 시험기간만 해도 그래요. 우리는 자꾸 공부를 뒤로 밀어요. “조금만 쉬고 나서 공부해야지!”, “간식만 먹고 공부해야지”, “조금만 자고 공부해야지”, “이것만 보고 공부해야지!” 그러다가 해가 졌어요. 그러면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없다 생각하고 공부를 해야 되는데, “오늘은 못했지만 내일부터 진짜 열심히 해야지”하고 잔다니깐요. 이렇게 공부하는데 중간고사를 잘 봤겠어요? 망하죠. 이처럼 우리는 게으름의 문제 때문에 피해를 봤었고, 또 지금 보고 있는지도 몰라요.
[게으름 정의의 문제]
여러분 그런데 게으름과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어요. 사람마다 내리고 있는 게으름의 정의가 다르다는 거예요. 목사님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민하 선생님은 부지런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에요. 시험이 다가오기 전부터 계획을 세워서 공부를 하고, 과제도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서 준비하는 선생님이에요. 목사님 20살 때를 생각해보면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실해요. 그런데 놀라운 점은 민하 선생님 본인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성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다는 거예요. 오히려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탓하는 거예요. 반면에 목사님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이름은 밝히진 않겠지만 정말 게으른 사람이 한 명 있어요. 시험 기간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가 시험이 코앞에 다가오자 벼락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점은 뭔지 알아요? 이 친구는 자기 자신이 전혀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처럼 게으름은요 사람마다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게으름의 정의가 다 달라요. 그래서 우리는 게으름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게으름이 무엇인지? 어떤 삶이 게으른 삶인지 정의를 내려야 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게으름은 무엇일까요? 게으름은요 삶의 목표와 그 목표를 향한 방향성이 없는 삶이 바로 게으른 사람이에요. 목표가 있는 사람들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미약하지만 조금이라도 발전된 삶을 살아요. 그런데 게으른 사람은 목표 자체가 없기 때문에 삶의 방향성도 없을뿐더러 삶의 발전이 전혀 없어요. 이것을 기준으로 “내가 게으른지, 게으르지 않은지?”를 분별해야 된다는 거예요. 어떤 친구가 1분 1초를 쪼개가며 치열하게 사는 삶을 살아요. 그런데 그 친구에게는 어떤 목표도 없고, 방향성도 없고, 발전성도 없어요.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거예요. 주위 사람들도 정말 열심히 산다고 말해요. 하지만 그 친구에게 삶의 목표와 방향성과 발전성이 없다면 그 친구가 아무리 치열하게 산다할지라도 그 친구는 게으른 삶을 사는 거예요. 반면에 어떤 친구는 굉장히 여유로운 삶을 살아요. 하지만 뚜렷한 삶의 목표와 방향성이 있어요. 미약하지만 어제와 다르게 오늘 발전된 모습이 보여요. 그렇다면 그 친구는 게으른 친구가 아니에요. 오히려 그 친구에게 있는 여유는 게으름이 아니라, 앞으로 더 높이, 더 멀리 뛰기 위한 쉼이 된다는 거예요.
(적용) 여러분 이처럼 게으름은 “내가 하루에 얼마나 움직였나?” 운동량으로 판단해서는 안돼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 게으름의 기준을 운동량으로 판단해서 자기 자신을 게으르다고 탓하는 친구가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목표와 방향성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있다면 그 친구들은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 친구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붙인 “게으르다는 꼬리표”로부터 자유 할 필요가 있어요. 비록 학교 끝나고 곧바로 학원 갔다 밤늦게 들어와서 책가방 던지고, 씻기 귀찮아서 침대에 바로 눕는다 할지라도 삶의 목표와 방향성을 향해 가고 있다면 그 친구를 결코 게으르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반면에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 생각하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침대에 눕는다 할지라도 그 친구에게 삶의 목표와 방향성과 발전이 없다면 그 친구는 그 날 게으른 삶을 산거에요.
[게으름의 폐해]
여러분 게으른 삶을 사는 사람은요 결코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삶을 살 수가 없어요.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1) 먼저 게으른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보다 일찍 죽어요. 심라학자 댄 크립케라는 사람이 그의 동료들과 6년에 걸쳐서 100만 명의 수면 패턴을 연구했데요. 그런데 그 결과가 매우 놀라워요. 평균 7-8시간을 잔 그룹과 10시간 이상 잔 그룹의 수면 패턴을 비교 연구했는데, 여러분 이 두 그룹 중에 어떤 그룹에 속한 사람이 건강했을까요? 10시간 이상 잔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7-8시간 잔 그룹에 속한 사람들보다 사망률이 무려 1.5배가 높았데요. 여러분 게으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도 전에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거예요.
2) 그리고 또 하나 심리학 용어 중에 “똥줄 의존중”이라는 용어가 있어요. 게으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벼락치기에요. 게으른 사람은 결코 미리 시험을 준비하지 않아요. 시험이 눈앞에 닥치고 나서야 공부를 해요. 그런데 벼락치기를 해본 친구들은 알겠지만 시험이 몇 시간 남지 않은 급박한 상황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가 돼서 생각보다 시험을 잘 본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사람이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 몸에서 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이 분비가 된데요. 이 호르몬이 분비가 되면 평상시보다 높은 긴장감과 집중력이 발휘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벼락치기가 가끔 통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이런 효과는 벼락치기를 하면 할수록 약발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우리 몸이 아드레날린 호르몬에 내성이 생기기 때문이에요. 이것도 모르고 벼락치기를 계속하면 처음 했을 때와는 다르게 긴장도 되지 않고 집중력도 높지 않아서 시험을 망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거예요. 결국 게으른 사람은 벼락치기에 성공해도 문제에요. 게을러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학습이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성실히 시험을 준비하기보다는 요행을 바라며 게으름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결국 그 인생은 요행만 바라다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죠.
사실 우리 안에 게으름의 문제는요 단순히 여러분의 학업 성취도를 낮게 할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쳐요. 여기 앉아 있는 친구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여러분들의 삶이 갑자기 거룩해지나요?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의 성품으로 다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여전히 옛 사람의 성품이 남아 있어요. 마치 탕자와 같아요.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가 그 순간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나요? 아니에요. 여전히 탕자에게 음주벽과 술로 인해 망가진 몸이 남아 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새사람의 성품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옛 사람의 성품인 시기, 질투, 미움, 증오, 분노, 음란 등 이러한 옛사람의 성품이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매일 매일 성실하게 성령 안에서 말씀 앞으로 나아가 내 자신을 비추고 기도로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게으른 사람은 결코 옛 사람의 성품을 죽일 수가 없어요. 옛 사람의 성품은 단순히 고등부 예배 시간에 은혜 한 번 받았다고 해서 절대로 죽지 않아요. 고등부 예배 시간뿐만 아니라 날마다 삶 속에서 죽여야 돼요. 날마다 생각 속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고, 말씀 앞으로, 찬양 앞으로 나아가야지만 옛 사람의 성품이 죽고, 새 사람의 성품으로, 예수님 닮은 성품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게으른 친구들은 고등부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받는다 할지라도 결코 신앙이 성장하지 않아요.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비참해요? 목사님 아들 겸이가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라질 않아요. 여전히 아기 때 모습 그대로에요. 다른 애들은 걷고, 말도하고, 어린이집도 가고 그러는데 여전히 겸이는 자라지도 않고 아기의 모습 그대로에요. 그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찢어지죠. 슬프죠. 아프죠.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구원 받은지는 오래됐어요. 그런데 여전히 아기의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프냐는 거죠.
여러분 게으름은요 우리의 전반적인 삶을 병들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를 병들게 해요.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2가지]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던져야할 질문은 이거에요. 우리는 어떻게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올바른 목표를 세우세요. 여러분 목사님이 목표를 세우세요! 라고 말하지 않고, 올바른 목표를 세우라고 말했어요. (예화) 손으로 파지를 주워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분이 계셨어요. 이 분은 동료가 수레로 파지를 옮기는 모습을 보고 한 가지 목표를 세우셨어요. “나도 열심히 일해서 수레를 구입해야지!” 이 분의 목표는 올바른 목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만약 이 분이 도로에 지나가는 “람보르기니”를 보면서 목표를 세웠어요. “나도 열심히 일해서 람보르기니를 사야지!” 여러분 이 목표는 올바른 목표가 아니에요.
(적용) 여러분 목표는 희망사항이나 망상과는 구분될 필요가 있어요. 물론 여러분 나이 때에 높고 넓은 꿈을 갖는 건 바람직한 일이에요. 그러나 목표는 터무니없는 망상이나 희망사항과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올바른 목표는 내 안에 헌신을, 열정을 불러 일으켜요. 내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 자신을 불태워 보겠다”, “내가 가진 체력을 다 쏟아 내 보겠다”, “내 모든 것을 헌신하겠다” 이런 마음속에 강한 열정과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목표라는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변화도 일으키는 것이 진정으로 올바른 목표라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세운 목표가 내 안에 어떤 그 마음의 동기도, 열정도, 내 삶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건 단순히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게으름을 탈피하고 싶다면 먼저 여러분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올바른 목표”를 세우세요. 여러분을 침대 위 이불 안에서 박차게 나오게 만드는 “올바른 목표”를 세우라는 거예요.
(예화)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에요. 처음 사도 바울의 인생의 목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의 인생의 목표가 180도 바뀌는 사건이 발생하게 돼요. 바로 다메섹 도석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경험한 일이에요.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어요. 그리스도의 영광만 생각하면 심장이 뛰고, 행복해지고, 눈물이 났다는 거예요. 그 순간부터 바울의 인생의 목적이 바뀌어요. 바울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로마 시민권도, 자신의 학식도, 재산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하기 위해 전도 여행을 떠나요. 여러분 “여행”이라고 해서 낭만을 생각해서는 안돼요. 사도 바울이 떠난 여행은 고난 그 자체, 고난뿐인 “여행”이었어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말도 안되는 고난을 당했어요. 고린도후서 11장은 당시 바울이 당한 고난이 기록되어 있는 장이에요. 중요한 부분만 읽어줄께요. 23절이에요.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절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절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절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여러분 이런 여행 가고 싶어요? 그런데 바울은 마치 고난이 자신의 운명이라도 되는 듯이 전도 여행을 무려 4번이나 떠났어요. 1차 여행은 주후 46-48년, 2차 여행은 주후 50-52년, 3차 여행은 2차 여행으로 상한 몸이 채 회복이 되기도 전인 주후 53-57년에 떠났다는 거예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바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기 때문이에요. 이것 때문에 바울은 게으름에 이 땅에서 찰나의 불과한 시간을 내어주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 우리가 게으름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마음속에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동기부여를 일으키라는 거예요. 여러분 바울이 아무리 다메섹 도석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영광에 마음이 온통 빼앗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하는 타오르는 갈망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저절로 살아지는 건 아니에요. 그는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했던 마음의 동기가 일어났기 때문에 고난이 다가와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는 거예요.
(예화) “트리거 : 행동의 방아쇠를 당기는 힘”이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은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고질병 중에 하나인 게으름을 극복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책이에요.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게으름 극복 방법 중에 하나는 날마다 삶 속에서 트리거를 일으키라는 거예요. 트리거는 “방아쇠를 당기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에요. 이 책에서는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방아쇠”라는 의미로 굳이 번역을 하자면 ‘동기부여’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트리거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찾아오는 트리거와 찾아야 되는 트리거에요. “갑자기 늘어난 몸무게”나 “건강 악화 신호”는 아침 운동을 일으키는 찾아오는 트리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트리거가 우연히 찾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지 말고 사소한 일상에서 트리거를 찾으라는 거예요. 그 중 책의 저자가 강력하게 말하는 것 중에 하나가 “최선을 다했는가” 공식이에요. 목표를 정하고 나서 단순히 달성했는지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했는가”를 스스로 물어보라는 거예요. 결과가 아니라 노력을 측정하라는 거예요. ‘오늘 운동을 했는가?’가 아니라 오늘 운동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는가?를 물으라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 노력을 했는가?’를 물으라는 거예요. 우리가 결과가 아니라 노력을 체크하게 되면 실패더라도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노력을 했다” 실패했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한 내 자신을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다음에 다시 도전할 마음의 동기, 트리거가 된다는 거예요.
(적용)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도 마찬가지에요. 은혜 한 번 받았다고 게으름을 탈피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실하게 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오늘 설교 한 번 듣고 마음으로 결단했다고 게으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여러분 예배당 문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건 승리의 열매가 아니라, 실패의 쓰라림이에요. 그때마다 우리가 실패에 집중한다면 우리 안에 찾아오는 감정은 뭐예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죄송한 사람만 되는 거예요. 죄책감이 나를 덮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격려가 내 삶 속에 끊겨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사랑과 격려가 있어도 게으름을 이겨낼 수 있을까, 말까인데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우리가 게으름을 이겨낼 수 있겠어요? 절대 못 이겨요. 그러니깐 결과만 봐서는 안 돼요.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드리기 위해 내 안에 게으름을 죽이기 위해 애썼던 작은 노력들을 보라는 거예요. 게으름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드리기 위해 아침에 30분 일찍 일어났던 노력,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 독서실 갔던 노력, 공부하기 위해 스마트폰 껐던 노력, 가요 대신 CCM을 들었던 노력, 밤에 잘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잤던 이런 노력들을 생각하라는 거예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애썼던 작은 노력들을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는 죄책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어요. 그 뿐만 아니라 다음 주는 이번 주보다 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보겠다! 라는 도전과 결단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결론
말씀을 마칠게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시험 기간을 통과하고 있어요.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안에 있는 게으름이 작동하기 좋은 환경이죠. 이때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오늘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2가지를 나눴어요. 첫 번째는 올바른 목표를 설정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공부 왜 해요? 여기 앉아 있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대학 진학이, 좋은 직장 취직이, 편안한 삶이 목적일 거예요.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돈, 대학, 편안한 삶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아요. 왜요? 우리는 복음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에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위해 말구유에 누우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살 찢고 모든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 “장차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하늘의 영광” 이런 복음들을 생각하고 묵상하게 되면 돈 잘 벌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기 위해 돈 벌게 되고, 대학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기 위해 대학 가게 되고, 부자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과 나누는 부자되는 것이 목표가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바울이 다메섹 도석에서 부활의 영광을 경험한 것은 어떤 신비한 현상을 경험한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복음이 바울의 마음을 강타했다는 거예요. 바라기는 이번 시험 기간에 복음이 내 마음을 강타하게 해 달라고 우리 함께 소망했으면 좋겠어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위해 말구유에 누우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살 찢고 모든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 “장차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하늘의 영광”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감격으로, 눈물로, 감사 가운데 복음의 은혜를 누리는 친구들이 되기를 바래요. 그래서 내가 공부하는 목적이 나의 유익과 만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임을 고백하는 우리 친구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복음의 트리거를 찾으라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한다 할지라도 게으름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일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에요. 우리는 앞으로 수없이 게으름의 발목을 잡히고 넘어지게 될 거예요.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될 일이 있어요. 실패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애썼던 작은 노력들에 집중하라는 거예요. 비록 그 날 잠자리에 누웠을 때 하나님 앞에 내밀 수 있는 건 부끄러운 성적표뿐이지만, 그래도 그 성적표라도 내밀기 위해 애썼던 우리의 작은 노력들에 집중하라는 거예요. “가요 들을 수 있지만 CCM 듣고”, “마음으로 어제보다 하나님 한 번 더 찾고”, “시험기간이지만 선생님과 성경도 읽었던 작은 노력들에 집중하라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죄책감에 파묻혀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의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힘 입어 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드리는 힘을 얻게 되는 줄로 믿어요.
바라기는 우리 고등부 친구들, 이번 시험 기간 말씀으로 꼭 승리해서 게으름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드리는 우리 친구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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