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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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계 2장 12-17절
제목 :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
[말씀]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서론
여러분 혹시 ‘동조현상’에 대해 들어봤나요? 권위를 가진 사람이 명령하여 지키는 것을 ‘복종’이라고 한다면, ‘동조현상’은 나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서 동일한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사회 현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겨울이 되면 동조현상의 대표적인 예를 발견할 수 있는데요, 바로 롱패딩이에요. 우리 중에 그 누구도 강압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롱패딩 입는 친구 있어요? 없잖아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겨울철에 10명 중 7-8명은 롱패딩을 입고 있잖아요.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심리적인 압박감” 때문이라고 말해요. 사람들은 자신을 제외하고 롱패딩을 입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볼 때 “나도 롱패딩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심리적 부담을 느낀다는 거예요.
이와 같은 동조 현상에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어요. 먼저 장점부터 살펴보죠. 동조 현상은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검증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 주변에 인터넷 쇼핑몰이 굉장히 많죠. 쇼핑몰에 물건을 검색하고 최종적으로 구매를 결정할 때 여러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이 무엇인가요? 바로 “상품평”이에요. 상품평이 많으면 많을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매 버튼을 최종적으로 클릭한다는 거예요. 또 이렇게 구매한 제품은 실패할 확률이 적어요.
그러나 동조 현상에는 단점도 있어요. 왜 학교에서 ‘왕따’가 잘못된 것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왕따 당하는 아이의 편에 서게 되면 자신도 무리로부터 따돌림 당할 것이 두렵기 때문에 그 친구가 나에게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왕따 현상에 동조하는 거예요. 인터넷 댓글도 마찬가지에요. 첫 댓글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에 따라서 이후에 달리는 댓글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처럼 동조현상의 단점은 개인의 의견이 묵살된다는 거예요. 모두가 ‘Yes’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모두 반 친구들이 한 친구를 왕따 시키는데 그 친구 편에 쉽게 설 수 있겠어요? 모두 다 정부를 욕하는 댓글을 달고 있는데 갑자기를 정부를 옹호하는 댓글을 달 수 있겠어요? 쉽지 않죠. 동조현상에 저항하려면 상당히 큰 용기를 요구해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감추고 주류의 흐름에 동조해서 편하게 살아가요.
그런데 동조현상의 가장 큰 단점은 따로 있어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용기를 내어 소신 발언을 했다고 쳐봅시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까요?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박수 쳐 줄까요?” 박수는커녕 “너만 잘 났냐”며 눈총을 주고, 그뿐만 아니라 불이익도 줘요. 이게 동조 현상에 가장 큰 단점이에요.
본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버가모교회 성도들도 이 동조 현상 때문에 따가운 눈총과 불이익을 경험했어요. 버가모는 그 어떤 지역보다 우상 숭배가 팽배한 곳이었어요. 당시 버가모 거리를 지나가게 되면 어렵지 않게 이교 신전과 신상과 목상들을 발견할 수 있었죠. 이처럼 버가모 시민들에게 우상 숭배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고, 그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어요.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1. 버가모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면 버가모 시 언덕 위에 웅장하게 지어진 제우스 신전에 찾아갔어요. 제우스는 모든 신들의 왕이면서 동시에 다른 신들과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제우스를 잘 섬기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면 너나 할 것 없이 제우스 신전에 올라가 제우스 신을 숭배했죠.
2. 또 버가모 사람들은 질병에 걸려 몸이 아프면 의사에게 가기 전에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치료 방법이 조금 독특해요. 치료를 사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뱀이 해요. 일단 환자가 찾아오면 칠흑같이 어두운 방으로 안내를 해요. 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방에서 무엇을 하겠어요? 자연스럽게 환자는 잠이 들어요. 사제는 환자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 뱀을 풀어 환자를 치료해요. 오늘 날 생각하면 전혀 이해가 안되지만 당시 이 치료방법은 먼 곳에서 찾아와 치료를 받을 정도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어요.
3. 이어서 버가모 사람들은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할 일들이 생길 때 지혜의 신인 아테나를 찾아갔어요. 또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때 관료들은 단체로 아테나 신에게 찾아가서 효과적인 전략을 구했죠.
4. 마지막으로 버가모에서 가장 활발하고 왕성했던 우상 숭배는 황제 숭배에요. 버가모 시의 황제숭배는 버가모 도시 내에서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그 어떤 도시를 견주어도 황제 숭배에 대한 버가모 시의 열정을 따라 잡을 수 있는 도시는 없었어요. 그러니 로마 정부가 보기에 버가모 도시가 얼마나 예뻐 보였겠어요? 그래서 로마 정부는 그 어떤 도시에도 주지 않았던 막대한 권한을 버가모 도시에 주었어요. 그 권한이 바로 “유스 글라디”라는 권한이에요. 이 말은 번역하면 “칼의 권세”에요. 당시 버가모 도시에는 로마 총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어떤 도시의 총독과는 다르게 버가모 총독만 “유스 글라디” 즉 칼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어요. 이 말은 버가모 총독만 죄수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도시는 기껏해야 겁을 주고,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는 것이 끝인데 버가모 도시는 사형이에요. 죽음이에요. 실제로 당시 버가모 도시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많은 기독교인들 끔찍하게 사형 당했어요.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 총독이 휘두르는 칼의 권세 앞에 두려워 떨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격려하시기 위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모습”으로 방문하세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온유하시고 선하시며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세요. 그런데 버가모 교회를 방문하실 때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방문하시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불꽃같은 눈으로 상대를 쏘아 보고, 한 손에는 좌우의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드시고 천하를 호령한 권세자의 모습으로 버가모 교회를 방문하셨다는 거예요. 왜요?
버가모 교회 성도들에게 진짜 권세자가 누구인지를 알리고 계시는 거예요. 비록 눈앞에 보이는 상황은 로마 황제의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보다 더 강한 것처럼 보여요. 고난당하는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제 3자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어쩌면 기독교인들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로마 황제의 권세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지 몰라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편지를 통해 그들의 의심을 단 한 순간에 물리쳐주세요. 예수님께서는 좌우에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들고 계시는 이 기세등등한 모습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진정한 권세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자신의 권세임을 각인 시켜주고 계시는 거예요.
이 사실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지자 그들은 자신들의 고난을 다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힘을 얻게 되었어요.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의 칼의 권세에 우리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잠시 내어주신 것 뿐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의 권세에 우리를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잠시 허락해주신 것뿐이라는 거예요. 여전히 예수님의 권세는 기세등등하며, 그 권세 앞에 설 자가 없고, 맞설 자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마음 먹고 로마 제국을 향해 칼을 휘두르시면 로마 제국과 황제의 권세는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거예요. 그들은 이 세상에 진정한 황제이시며, 권세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가짜 권세자인 황제를 숭배하지 않았고, 진짜 권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섬길 수 있었다는 거에요.
적용)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의 인생은 명문대 입학의 권세에 달린 것이 아니에요. 돈의 권세에 달린 것도 아니에요. 외모의 권세에 달린 것이 아니에요. 스펙의 권세에 달린 것도 아니에요. 여러분의 인생은 이 세상의 진정한 황제이시며 진정한 권세자이시고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달린 거예요. 눈에 보기에 명문대의 권세가, 돈의 권세가, 외모의 권세가, 스펙의 권세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실상은 막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여전히 지금도 말씀으로 다스리고 계시다는 거예요. 그분의 말씀 앞에 저항할 자 없고, 그 분의 능력 앞에 버틸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누구를 섬겨야겠어요? 돈을 왕으로 섬겨야겠어요? 대학 간판을 왕으로 섬겨야 겠어요? 외모를 왕으로 섬겨야겠어요? 아니면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겨야겠어요?
이어서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예수님의 칭찬이에요. 13절이에요.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안디바라는 인물이 새롭게 등장해요. 성경은 오늘 본문 외에 안디바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이상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아요. 다만 그 당시 역사적인 사료를 살펴보면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셨고, 끝까지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가 순교 당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버가모 교회 교인이에요. 그런데 담임목사님께서 끝까지 황제숭배를 거부하다가 결국 로마의 칼의 권세에 목숨을 잃으셨어요. 그러면 교회가 어떨 것 같아요? 두려움이 교회를 덮치겠죠. 한 순간에 지도자를 잃은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이리 저리로 흩어지겠죠?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버가모 교회는 약해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더욱더 안디바 담임 목사님께서 보여주신 숭고한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지켜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킨 버가모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칭찬하세요.
예화) 터툴리안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고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여러분 교회는요 안디바 담임 목사님처럼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사람들 때문에 견고하게 세워지는 거예요. 교회는 돈 많은 사람이 많다고 해서, 성도수가 많다고 해서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안디바 담임목사님처럼 목숨 걸고 진리를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든든하게 세워져 간다는 거예요.
적용) 오늘 말씀이 목사님에게 큰 찔림과 도전으로 다가왔어요. 목사님이 고등부를 4년째 지도하고 있는데 학생들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 같아서 늘 항상 불만이 있었어요. “다른 교회 고등부는 애들은 믿음이 쭉쭉 성장한다는데 우리 애들은 왜 이렇게 믿음이 자라지 않을까?” 늘 학생 탓만 하고 있었는데 오늘 말씀을 보니깐 그 이유가 목사님 때문인 거예요.
그렇잖아요. 1) 목사님이 거짓말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죽이는데 여러분들이 밥 먹듯이 거짓말 할 수 있겠어요? 2) 목사님이 기도의 자리를 지키려고 벌벌 떠는데 여러분들이 기도의 자리를 외면할 수 있겠어요? 3) 목사님이 음란과 싸우는데 여러분들이 음란의 죄를 밥 먹듯이 지을 수 있겠어요? 4) 목사님이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여러분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5) 목사님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을 대하는데, 여러분들이 서로가 서로를 차가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겠어요?
오늘 날 고등부의 영적인 현실은 가장 먼저 교역자인 목사님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예요. 말씀 전할 때만 거룩한 척 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도 말씀대로 살려고 부들부들 떨며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목사님이 제 2의 안디바가 되었을 때 알게 모르게 선생님들이,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삶을 보며 감동 받을 때 고등부 안에 영적인 갱신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목사님만 고등부의 영적인 분위기에 책임이 있을까요? 아니에요. 여기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어요. 목사님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3의 안디바가 되어주셔야 돼요. 그 모습을 보고 여러분들도 감동 받아서 여러분들 가운데 제 4의 안디바가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때서야 고등부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반석 위에 점점 견고하게 세워져 가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오늘 이 시간 목사님을 비롯하여 거룩한 부담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고등부 영적인 분위기는 내게 달려 있다” 한성일 목사가 안디바를 닮아가려 애를 쓸 때 고등부는 거룩 위에 세워져 간다. 교사인 내가 안디바를 닮아가려 애를 쓸 때 우리 반에 거룩이 세워진다. 학생이 내가 안디바를 닮아가려 애를 쓸 때 고등부가 거룩으로 세워져 간다. 우리가 이런 거룩한 부담감을 안고 교회인 고등부를 세워갈 때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 고등부를 바라보시며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구나!”, “끝까지 믿음을 지켰구나!”라며 칭찬해주신다는 거예요.
바라기는 우리 고등부 안에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행하는 제 2의, 제 3의 안디바가 많이 나와서 예수님께 “충성된 증인”이라고 칭찬 받는 우리 고등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점은요 순교자를 배출한 버가모 교회지만 예수님의 책망은 피해갈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14-15절이에요. “14 하지만 몇 가지 네게 책망할 일이 있다. 너희 가운데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을 왜 그대로 보고만 있느냐? 발람은 발락을 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도록 부추겼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고, 음란한 죄를 지었던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15 또 니골라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도 너희 가운데 보인다”
버가모 교회 안에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이단들이 일어났어요. 바로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와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에요.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같은 말이에요. 우리가 에베소 교회를 다룰 때 잠깐 설명했지만 니골라당은 한 번 구원 받은 백성은 더 이상 죄를 지어도 회개할 필요도, 율법도 지킬 필요다 없고 주장한 이단들이에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니골라당의 가르침에 넘어갔어요. 왜요? 이들의 가르침이 굉장히 매력적이기 때문이에요. 당시 상황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로마는 황제숭배를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칼의 권세로 숙청했어요. 이때 니골라당이 말해요. “구원 받은 백성들은 황제 숭배해도 돼! 마음속에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정절만 지키고 있다면 황제 숭배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을 섬겨도 괜찮아!” 얼마나 달콤한 말씀이에요. 이들은 신앙의 양심상 교회를 떠날 수는 없었어요. 그렇다고 신앙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때 이들의 귀에 니골라당에 말씀이 들려온 거예요. 그 순간 타협한 거죠. 그로 인해 버가모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거예요. 한 부류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순교를 각오하는 신자들과 또 한 부류는 황제숭배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까지 섬기는 신자들이에요.
그런데 참 놀라운 점은 무엇인지 알아요? 16절이에요. “그러므로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거예요. 이 말이 왜 놀라워요?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에요? 신앙을 타협한 니골라당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에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순교를 각오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들이 회개할 것이 무엇이 있어요? 14절이에요. “너희 가운데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을 왜 그대로 보고만 있느냐?” 지금 예수님께서는 신앙을 타협한 자들을 방관한 버가모 교회 믿음의 성도들을 책망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예화) 여러분 혹시 연대책임이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어요? 군대 가면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에요. 내가 잘하더라도 내 옆에 동기가 잘못하면 같이 책임을 지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잘해도 같이 기합 받고, 벌칙 받는 거예요. 왜 군대 조교는 연대책임을 지게 할까요?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에요. 그래서 한 명이 잘못해도 다 같이 벌 받고, 기합 받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보실 때 여러분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 보실까요, 아니면 고등부 전체를 하나로 보실까요? 고등부 전체를 하나로 보세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잘한다 할지라도 내 옆에 친구가 죄 가운데 빠져 있는 모습을 방치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그 친구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물으신다는 거예요.
예화) 그 대표적인 성경 구절이 어디에요? 마태복음 18장이에요. 예수님께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처음에는 한 사람이 찾아가서 죄에서 돌이키기를 권면하라는 거예요.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두 번째로는 두 세 명과 함께 가서 죄에서 돌이키기를 권면하래요.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마지막 세 번째로 교회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권면하라는 거예요. 그래도 그 마지막도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는 교회 공동체에서 끊어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곧바로 끊어내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무려 세 번이나 찾아가라고 우리에게 명하셨어요. 세 번이나 찾아가서 형제를 끌어 않고 형제가 죄의 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눈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예화) 그런데 여러분 목사님 경험상 이게 쉽지가 않아요. 상세하게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어요? 목사님은 많아요. 믿음 생활도 잘하고, 예배 생활도 잘하는 친구였는데 갑자기 교회를 안 나와요. 그래서 연락을 해서 혼내보기도 하고 타일러보기도 했는데 더 이상 나한테 관심 갖지 말래요. 여러분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순간 목사님이 받는 상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 친구를 사랑으로 포기하지 끝까지 품어요? 그래서 내버려 두는 거예요. 방치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호되게 질책하시는 거예요. 니골라당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버가모 교회 성도들을 질책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그 친구를 질책하지 않으시고 목사님을 질책하시는 거예요. “너 상처 조금 받았다고 그 친구를 그렇게 오래 동안 방치하면 돼?”, “영혼을 방치하는 네가 그러고도 목사야!”
그리고 다음 구절이 눈에 들어와요.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무슨 말이에요? 방관했던 태도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해서 방관하면 예수님께서 목사님에게 벌을 주시는게 아니라, 그 친구에게 속히 임해서 막강한 칼의 권세로 그 친구와 싸우신다는 거예요. 그건 아니잖아요. 나의 방관 때문에 그 친구가 고통 가운데 처해지는 모습을 어떻게 봐요? 그것만큼 큰 고통이 없잖아요. 그제서야 목사님 마음속에 회개가 터져나왔어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약해서 그 친구를 더 품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미워할 줄만 알았지 이 미움을 해결하기 위해 무릎 꿇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그 친구 때문에 상한 마음도 치유해주셨어요. 예수님이 목사님 마음을 아신다는 거예요. 정말 그래요. 예수님께서도 목사님처럼 믿었던 베드로에게 배신을 당하셨어요. 목사님의 아픔과 속상함과 분노를 이해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예수님의 그 말이 목사님에게 한없이 위로가 되었어요. “예수 나의 좋은 치료자” 이 찬양의 가사가 어떤 의미인지 새롭게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목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목사님처럼 약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겠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하시기 때문에 연약한 목사님을 때로는 질책하시고, 때로는 위로하시면서 목사님을 사용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결론
말씀을 맺을게요. 우리 오늘 나눈 말씀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째는 진짜 권세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거예요. 둘째는 제 2의, 제 3의 안디바가 되어 고등부 안에 무너진 거룩을 세워나가자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죄의 사슬에 빠져 있는 형제, 자매를 구원하자! 이렇게 나누었는데요 사실 그 어느 말씀 하나도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어요. 우리 찬양 한 곡 부르고 기도하기를 원하는데요, 그 찬양의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세상의 유혹 시험이 내게 몰려 올때에 나의 힘으로 그것들 모두 이길 수 없네 거대한 폭풍 가운데 위축된 나의 영혼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이고 있을 때. 이게 딱 우리의 영적인 상황 아니에요?
그런데 후렴을 보게 되면 막막한 상황을 뚫고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 나와 있어요. “주를 찬양 손을 들고 찬양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 아니니 주를 찬양 손을 들고 찬양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말씀 순종은 연약한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거예요. 내가 하려면 넘어지고 실패하지만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그때서야 가능하다는 거예요.
우리 이 찬양 붙들면서 함께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기를 원하는데요, 하나님 말씀 순종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주님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순종함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함께 찬양합시다.
상처 받은 치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내 옆에 죄의 사슬에 매여 있는 내 친구, 우리 오빠, 우리 누나, 언니, 동생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들을 방치하지 않게 하시고 그들에게 받은 상처가 있지만 나의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회복되어 이제는 그들을 회복시키고, 그들을 치료하는 상처 받은 치료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210425 말씀노트
제목 :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
말씀 : 계 2장 12-17절
그러므로 ( 회개하라 )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 싸우리라 )
[말씀 요약]
1. 위에 빈 칸을 채워보세요.
2. 버가모 지역은 우상 ( 동조 ) 현상으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따가운 ( 눈총 )과 ( 불이익 )을 경험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로마 황제의 칼의 권세보다 강한 칼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며, 그 강한 권세로 버가모 성도들을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리시기 위해 어떤 모습으로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셨나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모습
4. ( 순교자 )의 ( 피 )는 교회의 ( 씨앗 )이 되고 교회는 ( 순교자 )의 ( 피 )를 먹고 자란다. - 터툴리안 -
5.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께 질책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방관했기 때문에...
[나눠보세요]
1. 예수님께서 항상 나를 지켜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한 번 나누어 보세요.
2. 예수님께서는 고등부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계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고등부에 편지를 쓰신다면 우리는 죄에 빠진 형제와 자매를 방관하고 있다는 예수님의 질책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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