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입성

종려주일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36 views

부활절 설교

Notes
Transcript
말씀 : 행 7장 55절
제목 : 부활의 소망
[말씀]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서론
오늘은 부활주일이에요. 부활주일은 기독교 여러 절기 중에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하며, 기쁜 날이죠. 부활주일은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도대체 우리가 가장 기뻐해야 될까요?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이에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한 번 죽은 자들은 죽음으로 끝이었어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으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서 영원한 삶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이에요? 이 세상 모든 권세와 부와 명예의 정점에 서 있던 진시황제 조차도 얻지 못했던 것이 바로 영원한 삶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 주어졌다는 거예요. 물론 지금과 같이 코로나와 남녀 차별과 불공평과 사회 부조리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영원히 사는 건 복이 아니라 저주에요. 그러나 성경에 말하는 영원한 삶이 펼쳐지는 무대는 아픔도, 슬픔도, 남녀 차별도, 불공평도, 그 어떤 사회 부조리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는 거예요.
이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 모두는 다 죽으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완벽한 하늘 처소에서 살게 될 거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기쁘고, 소망이 있는 삶이에요? 여러분 이 사실을 믿어요?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내게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믿음으로 천국을 소망하면 1) 이 땅에서 조금 힘들고 어려워도 아니 많이 힘들고 어려워도 견뎌낼 수 있어요. 2) 세상 사람들이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며 부자가 되고, 잘나간다 할지라도 천국의 소망이 있다면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지키며 살 수 있게 돼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본다 할지라도 말씀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웃으면서 손해보고 희생하면서까지 하나님 말씀의 가치를 내 삶에서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사단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 사단은 천국의 소망이 기독교인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삶의 원동력을 주는지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단은 이 부활의 소망을 빼앗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요.
1) 예수님 부활하신지 얼마 않았을 때 사단은 부활의 소망을 빼앗기 위해 도둑설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도둑설은 말도 안되는 말이에요. 당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고 미리 예언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신은 삼엄한 로마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어요. 심지어 예수님의 무덤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가로 막고 있었어요. 생각해보세요. 전문적으로 군사 훈련도 받지 않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로마 군사들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올 수 있겠어요? 말도 안되는 말이죠.
2) 또 사단은 환각설을 만들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으로 꾸미려고 했어요. 환각설이 뭐에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너무나 간절히 기다린 나머지 제자들의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진 예수님의 부활을 현실과 착각했다는 설이에요. 마치 임신을 너무 기다린 나머지 상상 임신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 그런데 환각설도 말이 안되는 거짓 가설이에요. 왜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 앞에 직접 나타나셨을 때에야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환각설은 말이 안돼요.
도둑설도 환각설도 반박 당하자 사단은 이제 부활의 소망을 빼앗기 위해 전략을 바꿨어요. 바로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삶, 그 중에서도 “지금이라는 시간”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거예요. 방탄 소년단의 노래 중에 “고민보다 GO”라는 노래가 있어요. 그 가사를 잠깐 읽어줄게요.
열일 해서 번 나의 pay
전부 다 내 배에
티끌 모아 티끌 탕진잼 다 지불해
내버려둬 과소비 해버려도
내일 아침 내가 미친놈처럼
내 적금을 깨버려도
WOO 내일은 없어
여러분 지금 이 가사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뭐예요? 미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미래보단 지금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깐 열일해서 번 돈 맛있는 음식으로 내 베에 탕진하라는 거예요. 적금도 깨고 과소비하면서 지금을 즐기라는 거예요.
이런 사회적 현상이 바로 Yolo 아니에요? Yolo가 내건 ‘캐치 프레이즈’가 뭐에요? “한 번뿐인 인생 너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거잖아요. 미래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의 행복에만 집중하라는 거잖아요. 그래서 예전과 다르게 장년층 사이에서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 치고, 적금을 해약하고, 갑자기 해외여행을 떠나요. 다음 달 카드 값 생각하지 않고 플렉스 해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현재 사단은요 온통 “지금에만” 집중하는 문화를 만들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 만족을 느끼고,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하지 않으면 마치 불행한 인생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며 지금의 시간을 소망 가운데 인내하는 건 쉽지 않아요. “지금”이 중요한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며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답답하고 미련해 보인다는 거예요.
본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금”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사회의 유혹을 이기고 부활을 소망하는 삶,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이 땅에서 살아낼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늘 죽음을 생각해야 되요. 여러분 로또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2만분의 1이에요.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그런데 사람들은 복권을 사요. 확률이 극악임에도 불구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복권을 산다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뭔지 알아요? 사람들은 100% 일어나는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데 죽음 이후의 부활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겠어요? 안하죠.
우리는 죽음을 생각할 때 죽음 이후 부활에 삶을 소망하기 시작해요.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 병상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포자기하고 좌절해 있을 것 같죠? 아니에요. 그 누구보다도 강해요. 목사님은 여러 번 경험했어요. 그들은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 이후 부활의 삶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 묵상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는 거예요.
예화1) 목사님이 예전에 호스피스 병원으로 3박 4일 동안 자원 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어요. 호스피스 병원은 여러분이 알 듯이 일반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한 환자들이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편하게 맞기 위해 오는 병원이에요.
목사님이 3박 4일 동안 맞게 된 환자는 40대 여자 집사님이셨어요. 이 집사님은 이미 온 몸에 암세포가 퍼진 상태였어요. 배에는 복수가 차서 배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어요. 복수 때문에 누우시면 숨이 막혀서 항상 앉아서 주무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셨죠. 설사가상으로 통증이 너무 심해서 밤에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어요. 당연히 통증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해서 온 몸이 뼈처럼 앙상하게 말랐어요. 또 목을 가눌 힘 조차 없으셔서 항상 머리를 아래로 숙이시고 계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자 집사님께서 엉엉 눈물을 흘리시며 우시더래요. 그래서 엄마가 딸에게 물어보았데요. “딸, 왜 울어? 아파서 그래?” 아니래요. 딸이 설명하기를, 전날 밤에 새벽에 옆 방에 계시는 장로님이 하나님 나라를 가셨는데, 그 날 새벽에 장로님 방안으로 하얀 옷을 입으신 분이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는 거예요. 그리고 하얀 옷을 입으신 분이 장로님 손을 잡고 저쪽 끝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물었어요. “장로님 예수님 손 잡고 천국 가면 좋은 거잖아. 그런데 딸, 왜 울어?” 그러더니 이 여자 집사님께서 “엄마, 나도 천국 갈 때 예수님이 마중 나오셨으면 좋겠어. 나도 꼭 예수님 손 잡고 천국가고 싶어” 결국 이 집사님은 예배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시다가 소망 가운데 하나님 나라로 가셨어요.
적용) 여러분 이 모습이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들은요 누구보다 강해요.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 무서워서 죽는 순간까지 1분 1초라도 더 살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쳐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죽음은 달라요. 죽으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천국의 삶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소망 가운데 눈을 감는 거예요. “이제 육신의 장막 집을 벗어버리고 우리 주님께로 간다” 부활의 소망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마저 극복케 하고, 소망 가운데 잠들게 한다는 거예요.
적용) 여러분 죽음을 생각하세요. 그리고 죽음 이후에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삶을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 부활의 소망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세요. 부활의 소망이 여러분을 강하게 만들 겁니다. 부활의 소망이 여러분을 거룩으로 이끌겁니다. 부활의 소망이 여러분을 참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 겁니다. 부활의 소망이 여러분을 다시 일어나게 만들겁니다.
두 번째 우리가 부활을 소망하는 삶을 살려면 하늘의 영광을 크게 봐야 돼요. 성경에 보면 말씀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이 몇몇 등장해요. 스데반 집사님도 마찬가지에요. 스데반 집사님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다가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었어요. 여러분 사람이 돌에 맞아 죽으려면 얼마나 돌에 맞아야 될까요? 10대, 20대? 눈이 터지고, 살이 찢어지고, 피투성이는 되겠죠. 그러나 이 정도로는 죽지는 않아요.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끈질긴데요. 여러분 사람이 돌에 맞아 죽을 정도면 돌 때문에 몸의 형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야 될 정도로 맞아야 죽어요. 생각해보세요. 이 정도면 스데반 집사님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아마 인간으로써 참기 힘든 고통 가운데 놓여져 있을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건 스데반 집사님은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까지 부활하신 주님을 전했다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사도행전 7장 55절에 나와 있어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봤기 때문이에요. 물론 이전에도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에 대해 말씀을 들으면서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경험했어요. 그러나 돌을 맞으면서 경험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은 차원이 달랐어요. 마치 하늘이 열리고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봤다는 거예요. 그 영광이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을 강타했고 그 순간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하늘의 영광으로 가득 찼고, 그 영광이 순교자의 길로 스데반 집사님을 인도했다는 거예요.
적용1) 여러분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천국의 영광이 내 안에 크게 들어와야 돼요. 내 마음을 가득 매워야 돼요. 그냥 목사님 설교 듣고 천국은 좋은 곳이구나! 천국은 행복한 곳이구나! 이 정도로는 안 돼요. 천국의 영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사로잡고 천국을 생각할 때마다 벅찬 감격이 내 안에 있어야만 우리는 이 땅에 무게 중심을 두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에 무게 중심을 두며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예화1) 저번 주에 친척들과 함께 겸이 돌잔치를 했어요. 그때 모인 자리에서 층간소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처음으로 숙모가 이야기에 대해 의견을 말씀해주셨어요. “위층 사람들도 삶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저녁 6-9시 사이에 뛰는 건 이해를 해줘야 된다는 거예요” 목사님은 그 의견에 동의했어요. 왜냐면 목사님이 실제 겪은 일이기 때문이에요. 목사님 위층에 7살짜리 남자 아이하고, 4살짜리 여자 아이가 살았어요. 얘들이 한 번 뛰기 시작하면요 온 집안이 쿵쿵 울려요.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요. 그래서 결국 참다 참다 못해 한 번 올라갔어요. 그러자 부모님이 너무 미안해하시면서 주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셔서 내려왔어요. 그리고 집에 내려와 보니 조용하더라구요. 그런데 문제는 딱 하루만 조용했다는 거예요. 오히려 기존보다 더 시끄러워졌어요. 애들이 뛸 때마다 엄마가 “뛰지마!!!” 소리를 지르셨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쿵쿵 거리는 소리보다 더 큰 거예요. 올라갈까 말까 하다가 한 번 참았어요. 그러다가 엘리베이터에서 6층 아줌마를 만났어요. 그런데 그 아줌마가 목사님 눈치를 보면서 “저희가 많이 시끄럽죠? 죄송해요”라며 미안해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쫌 조용해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날도 여전히 아줌마의 목소리와 애들 뛰는 소리가 환상의 콜라보레이션을 이루면 목사님을 괴롭혔어요. 또 올라갈까 말까 하다가 목사님이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어요. 다른 층간소음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적어도 애들 때문에 발생한 층간소음은 부모의 힘으로 컨트롤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나이 때 아이들을 활동적으로 만드셨는데 그걸 엄마가 제한한다고 되나요? 며칠은 되겠지만 아이들도 인내심이 바닥나면 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내가 올라가는게 맞을까, 참는게 맞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참는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 뒤로 층간소음 때문에 자다가 놀래서 깨도 단 한 번도 올라가지 않았어요.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숙모가 말할 때 목사님도 동의하면서 의견을 보탰어요. 그런데 참 놀라운 점은 뭔지 알아요? 하나님을 믿는 숙모와 목사님을 제외하고 나머지 친척들은 층간소음은 어떤 경우로도 용납할 수 없다는 거예요. 심지어 삼촌은 목사님 의견을 비꼬면서 “그건 목사 이야기구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관리실에 연락을 하든, 위층에 올라가서 싸우든 조용한 삶을 보장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때 목사님이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어요. “아, 어쩌면 이 모습이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겠구나”
적용) 여러분 이 땅의 시간이 전부이면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권리를 목숨 걸고 싸워 지켜야 돼요. 우리는 여기서 승부를 봐야 돼요. 안 그러면 바보죠? 이 땅의 시간이 전부이잖아요? 남에게 상처를 주든 말든, 남을 짓밟고 일어나서 성공한 삶을 살아야 돼요. 여기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잖아요. 친구가 노트 필기 보여 달라고 하면 절대 보여주면 안돼요. 나보다 시험 잘보면 내 내신성적이 뒤로 밀리잖아요. 친구가 모르는 문제 알려달라고 하면 절대로 알려주면 안돼요. 나 공부할 것도 많은데 시간 빼앗기면 안 되잖아요. 오직 나만을 위해! 내 성공만을 위해 살아가야 돼요.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해요. 여기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죽으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내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아요. 이 땅에서 장차 예수님께서 꽉 안아주시며 “수고했다. 고맙다” 이 한 마디 칭찬 듣기 위해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 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천국의 영광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 누구보다 반짝 반짝 빛나는 천국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죽음 이후 영원한 삶에 무게를 두며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참 이렇게 사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머리로는 천국의 영원한 삶이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그 날 천국의 삶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이 경험한 천국의 영광을 경험해야 돼요. 우리 예수님과 함께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그 영광이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실제가 되어 내 마음을 강타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영광에 온통 마음과 생각이 빼앗겨 이 땅에서 희생하고, 양보하고, 손해보는 그 일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쁨으로 느껴질 정도로 천국의 영광에 매료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천국의 영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를 덮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 이후의 삶에 무게를 두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결론
말씀을 맺을게요. 부활절 마다 목사님이 드는 예가 있어요. 목사님 손에 끝을 알 수 없는 무진장 긴 실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이 실 한 쪽 끝에 작은 점이 찍혀 있어요. 이 작은 점을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점 이후에 실의 길이를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시간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우리가 어느 시간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울까요? 바라기는예수님의 부활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친구들 되어서 그 날 천국의 영광에서 떨어지는 친구들이 한 명도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기도]
주님, 우리 마음속에 천국의 영광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