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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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0:13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 오늘 설교도 영상을 함께 보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2015년 미국 하원 법사위원회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산부인과 전문의 앤토니 라바티노의 증언이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그가 낙태 과정을 자세히 묘사할 때 객석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머리를 떨구고 울먹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인상적이었던 게 자신이 왜 임신중절수술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장면이다. 이전까지는 그게 사람의 살덩이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입양한 딸의 죽음 후에 그게 사람의 신체조직으로 보였고 누군가의 아들,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부분이다.
- 2019년에 우리나라에서도 낙태죄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났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낙태에 대한 논쟁이 더욱 뜨겁다.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먼저인가, 아니면 태아의 생명권이 먼저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요즘에는 태아의 생명권보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더 중시되고 있는 분위기다. 여성은 자신의 몸이기 때문에 임신할 권리도, 임신을 중단할 권리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 여성의 권리가 너무나 무시되고 억압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여성의 권리가 태아의 생명권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산모의 건강이 위태로운 경우나 산모가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거나,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임신을 했거나, 태아가 장애아임을 확인한 경우 등이다. 우리나라 통계는 아니지만 미국의 임산부 중 90%가 태아가 다운증후군으로 판명되면 아이를 포기한다고 한다. 정말 쉬운 문제가 아니다.
- 예전에 한 번 말씀드렸지만, 랜디 앨콘이라는 의과대학 교수가 자신이 가르치는 의대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매독에 걸려 있었고, 어머니는 결핵을 앓고 있었다. 이 부부가 낳은 자녀 중에서 첫째는 눈이 먼 채로 태어났고, 둘째는 죽었으며, 셋째는 태어날 때부터 귀 먹고 말 못하는 아이였고, 넷째는 결핵에 걸려 있었다. 이 여성이 또다시 임신을 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말해 주겠는가?” 그러니까 모두 한 목소리로 아이를 지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 때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 낙태에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다. “출생하기 전에 태아는 인격을 가진 존재인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태아는 단순히 세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지타운 대학교의 생물학자인 다이앤 어빙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단지 인간 생명만을 소유한 한 인간의 단순한 일부(정자)와 또 다른 인간의 단순한 일부(난자)가 유전학적으로 유일무이하고 새롭게 존재하게 된 하나의 새로운 개체, 즉 완전한 살아 있는 하나의 인간 존재로 변화된다. 즉, 두 사람의 일부들은 수정을 통해 실제로 이전과는 아주 다른 존재로 변화된다.” 태아의 인격성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한다. 누가복음 1:41에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여기서 ‘아이’는 헬라어로 ‘브레포스’인데 태어난 후의 아이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단어와 동일하다. 또한 태아가 ‘기쁨으로 뛰놀았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태아가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 행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이 태아는 마리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를 듣고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 앞에서 제가 낙태에 대한 이야기만 했지만, 우리가 살펴보는 6계명은 낙태 외에도 자살, 안락사, 사형, 전쟁 등 정말 많은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 윤리학에서 6계명보다 더 중요한 계명이 없을 정도다. 자살도 그렇다. 자신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과연 용납되는가? 그렇다면 우울증 같은 정신적인 질병으로 자살을 하는 경우도 살인일까? 예전에 교회에서 흔히 하는 질문은 이렇다. ‘자살하면 지옥가나요?’ ‘예수님을 분명히 믿었는데 자살하면 어떻게 되죠?’ 예전에 저도 이런 질문으로 목사님들을 괴롭힌 적이 있다. 또 안락사 문제도 있다. 더 이상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그리고 그 사람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또 사형제도는 어떠한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사형 제도를 금지하는 것인가? 또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하는 것인가?
- 오늘 6계명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 먼저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죽이다, 살인하다’로 번역된 ‘라차흐’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먼저, ‘라차흐’는 ‘무고한 생명을 취하다’는 뜻을 가진다. 일차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동물을 죽이는 것은 ‘타바흐’(도살하다)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 ‘라차흐’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 알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상대방을 죽이게 되는 과실치사가 있다. 예를 들면, 민수기 35:20-21에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악의를 가지고 손으로 쳐 죽이면 그 친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살인하였음이라 피를 보복하는 자는 살인자를 만나면 죽일 것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살인’이 바로 ‘라차흐’이다. 이 구절은 분명히 악의와 살해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 여기에 비해 민수기 35:22-25에는 “악의가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을 때에 이는 악의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복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주할 것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살인자’도 ‘라차흐’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고의로 사람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까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 즉각 그 사람을 죽이지 않고 도피성 제도를 마련해 주셨다.
-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과실치사는 굉장히 많다. 예를 들면, 음주운전이다. 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절대 음주운전을 해서는 안 된다. 술을 드셨으면 반드시 대리운전을 불러야 한다. 음주운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면 살인한 것과 같다. 이것은 무서운 말씀이다. 또한 공사를 할 때 안전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안전사고로 사람이 죽었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냥 사고니까 적당히 합의와 보상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신명기 22:8에도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새 집을 지을 때 지붕에 난간을 만드는 것은 집주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조치하지 않았을 때 만약 사람이 떨어져 죽으면 그 책임은 주인에게 있다고 말씀한다.
- 그런가 하면, ‘라차흐’의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사회적인 약자를 압제하거나 학대하는 것이다. 시편 94:5-7에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여기서 ‘죽이다’는 ‘하라그’로, ‘살해하다’는 ‘라차흐’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많은 학자들이 실제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고 고아들을 살해한 것이라기보다 사회적인 약자들인 그들을 학대하고 삶의 가능성을 빼앗은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을 사회적인 살인이라고도 말한다.
- 그렇다면 왜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본성적으로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문화에서 살인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좀 더 분명한 이유를 말씀한다. 창세기 9:6에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모세의 십계명이 나오기 훨씬 전에 노아 시대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말씀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오직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생명은 존엄하고 합당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헤르만 바빙크라는 신학자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으로 남아 있는 한, 아무리 손상당하고 희미하더라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다.” 칼빈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일차적으로 새겨진 곳은 마음과 생각, 즉 영혼과 영혼의 능력이지만 신체 중에서 영광의 광채로 빛나지 않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 인간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은 어떤 모양이든 큰 충격과 상실감을 준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박완서라는 유명한 소설가가 있다. 그에게 딸 넷,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자녀들이 하나같이 바르고 공부도 잘했다고 한다. 그 중에 아들은 엄마의 최고의 자랑이었는데, 엄마를 끔찍하게 생각하던 명문대 의대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이 26세 때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어머니로서 어떤 심정일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 분이 가톨릭 신자인데 나중에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베개가 젖도록 흐느껴 울었다. 죽음이 왜 무시무시한지, 아들의 죽음이 왜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지 정연한 논리로써가 아니라 폭풍 같은 느낌으로 엄습해 왔다. 하나의 죽음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사랑과 기쁨, 고통과 슬픔, 체험과 인식 등, 아무하고도 닮지 않은 따라서 아무하고도 뒤바뀔 수 없는 그만의 소중하고도 고유한 세계의 소멸을 뜻한다.”
- 그렇다면 이제껏 설명한 것처럼 의도적인 살인이나 과실치사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약자들을 억압하지 않으면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킨 것인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06번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질문: “그런데 이 계명은 살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까?” 대답: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을 금함으로써 살인의 뿌리가 되는 시기, 증오, 분노, 복수심 등을 미워하시며, 이 모든 것들을 살인으로 여기신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보통 6계명을 대할 때 나와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살인은 단지 사람을 죽이는 행위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행동의 배후에 내면에서 작동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7:21-23에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여기서 특이한 점은 주님이 악한 생각이라고 하시면서 도둑질, 살인, 간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남의 것을 훔쳐야 도둑질이고, 사람을 죽여야 살인이고, 남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러야 간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이미 남의 물건을 훔치고 싶을 만큼 탐내는 것이 도둑질이고, 남의 아내를 보고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간음이고, 어떤 사람이 죽도록 밉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면 그것은 살인이라는 것이다. 요한일서 3:15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혹시 우리에게도 여전히 너무나 미워하는 있는가? 그 사람만 보면 마음이 불편하고 함께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는가? 그건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우리 안에서 계속 살인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미움의 감정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고 예배가 되겠는가? 예배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5:23-24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 안에서 진정한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한다.
- 하이델베르크 문답 107번에서 이렇게 말한다. 질문: “앞에서 말한 방식으로 우리 이웃을 죽이지 않으면, 그것으로 이 계명을 다 지킨 것입니까?” 대답: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기와 증오와 분노를 정죄하심으로써 우리가 우리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여 인내와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친절을 보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며, 심지어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 이웃을 향한 최고의 사랑은 바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다. 요한일서 3:16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앞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그 반대로 행하신다. 오히려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신다. 아무 죄가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을 위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신다. 주님은 그들을 미워하시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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