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

소선지서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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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제기]

1.예배가 무너지고 있는 한국교회
코로나와 함께 하는 시대를 살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맞이한 가장 큰 변화는 ‘예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배당에서 모여서 드리는 전통적인 예배의 모습에서 온라인 예배로 변화되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은 빠르게 전통적 예배의 모습을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통적 예배에는 필수적이지 않았던 영상과 음향 시스템이 매우 중요한 예배적 요소로 변화되었고, 이와 함께 예배 영상 전문가들이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코로나 시대를 살며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쩌면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함께 우리에게 찾아온 여러가지 부작용들이 목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예배가 무엇인가?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받으시는 예배는 무엇인가? 예배당에서 꼭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배경설명: 바른 예배를 회복하라]
오늘 말씀 속 미가 선지자는 무너져 가던 예배를 보며 고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 사역하던 선지자였습니다. 당시는 북방의 앗수르라는 신흥 강국이 고대 근동 지방의 모든 나라들을 집어삼키고 있을 때였어요. 북이스라엘도 B.C.722년에 그 신흥 강국의 희생양이 되죠. 그는 살면서 여러 왕을 섬겼는데 그들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이었죠. 그런 그에게 큰 근심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남유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가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요담 왕의 시대에는 백성들이 산당에서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저질렀어요. 요담 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는 우상을 섬기는 산당을 제거하지 못함으로 백성들이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죠. 둘째로 요담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아하스 왕은 아버지 요담과는 달리 산당에서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심지어는 성전 뜰 안에 있는 놋 번제단과 놋대야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그가 다메섹에서 보았던 우상의 제단을 가져다 놓는 죄악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두 왕을 타락의 길로 이끌었던 것은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그 중 산당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에는 30km마다 산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주로 가장 높은 지형에 산당을 짓는데 이는 신을 만나려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산당은 예배의 처소로 쓰여질 목적으로 지어졌긴 했지만 많은 산당들이 이후 우상숭배의 처소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스라엘에 갔을 때 네게브 지역의 텔 아라드라는 곳에서 산당을 직접 보는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되었어요. 산당이 매우 성전과 닮아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지성소와 성소가 분리되어 있고 분향단이 두개가 놓여 있었어요. 제가 같이 갔던 교수님에게 왜 이렇게 성소와 닮았고 분향단은 또 왜 두개가 있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교수님께서 저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겸하여 우상을 섬기고 자기의 소견대로 예배를 드렸던 증거라고 하셨어요.
미가 선지자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고 자기 마음대로 섬기는 예배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해 했던 거에요. 그러면서 그는 6장 7절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미가는 그 시대의 예배를 보며 과연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옳은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가? 고민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했어요.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로 돌아가야 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성경적 예배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크게 세 가지로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론1: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제사로부터 벗어나길 원하신다/6-7절]

1.미가서가 기록될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의 모습
1)하나님께 예배의 형식만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먼저 우리가 성경적인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예배에서 벗어나 온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당시 남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어요. 성인 남성이라면 1년에 세 번씩 꼭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려야 했죠.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것처럼 제사장의 집도 하에 제사가 이루어졌어요.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소나 양과 염소 그리고 비둘기와 같은 제물들을 가지고 왔고 제사장들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죄를 사해 주었습니다. 율법의 순서들을 잘 지켜 행하는 그들의 모습은 매우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자녀 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의 예배는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과 그들의 마음이 우상에게 빼앗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예배의 형식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바른 예배자라고 생각했어요. 미가 선지자는 이런 형식적인 예배에 빠져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대언합니다. 미가 6장 6-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송아지를 가지고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허물 위하여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몸의 열매를 드릴까”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백성들이 가져오는 일 년된 송아지나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과 같은 기름 이나 심지어는 맏아들을 주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님을 말씀하시고 계신거에요. 외적으로만 드러나는 형식적인 예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2.중세교회의 문제점: 형식주의
1)건물의 화려함, 웅장한 음악을 강조. 복장의 문제
중세의 로마 가톨릭 예배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어요. 중세시대의 예배는 오직 사제들만이 알아 들을 수 있게 라틴어로 진행되었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인지 알아들 수도 없었죠. 이것은 교황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권력층들이 자신의 권력을 지속하기 위해 펼친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어요. 이런 상황이니 사제나 사람들이나 예배의 외적인 모습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예배의 처소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미는 일이었어요.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시청각적 경험에 치중하면서 말씀보다는 모양과 형식에 집중했다는 것이죠. 사제의 목소리가 마치 천사의 음성처럼 들리게 하기 위해서 정교한 음향 장치를 마련하기도 했구요. 성찬 때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했다고 가르치면서, 정말 그런 것처럼 꾸미기 위해 신비로운 배경음악을 깔고 갑자기 섬광을 비추기도 했어요. 그리고 반드시 사제는 거룩한 의복을 입고 예배에 참석해야 했어요. 오늘날에도 성당에 가면 스테인드글라스가 많은데 이것을 설치한 이유는 그 오묘한 빛을 사람들이 받을 때 신비롭고 따스한 은총의 느낌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중세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큰 문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형식과 외형만 강조하는 이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닌 마치 고대 사회의 우상에게 드리는 제사와 같았기 때문이에요. 성당은 예배의 처소가 아닌 신전이 되어 갔어요. 그렇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나서 가장 먼저 예배의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부분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어요. 칼빈은 “말씀이 귀에 들려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설교단도 설교가 잘 들리도록 높은 곳으로 이동시켰고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벽돌로 막아버렸죠. 이후 예배당을 추가로 지었을 때 종교개혁자들은 예배당을 성당과 같이 화려한 건물이 아닌 일반 집의 형태로 지었고 거기에는 설교단과 의자 외에 아무것도 두지 않았어요.
3.적용: 형식이 아닌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식주의의 반대말은 곧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으면서 우리는 기존에 한국교회가 비밀스럽게 소유하고 있던 형식주의 예배의 폐해를 처절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던 신자들이 온라인 예배를 맞이하게 되자 예배를 쉽게 이탈해 버리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하지 않고, 그저 예배에 참여했던 형식적 예배자들에게 온라인 예배라는 편의성이 주어지자 자신의 소견을 따라 자기의 편의대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에 합당한 자세와 모습을 잃어버리고 더 나아가 예배에 합당한 마음까지 상실해 버립니다. 시간이 나면 잠시 영상을 틀어서 설교 말씀만 듣고 꺼버리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느새 주일 예배가 많은 신자들의 삶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뒤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예배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온전히 집중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코로나 이전 형식주의적 예배의 부작용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회복하길 원합니다. 예배가 힘들어지고 예배가 무너지는 이 시대에 더욱 하나님 앞에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나가시는 은혜가 있길 원합니다. 다시금 우리 인생에 예배를 가장 우선 순위로 올려두시길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 풍성히 나타나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론2: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공로주의적 예배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중심적 예배를 드리길 원하신다]

1.예배를 통해 무언가를 받으려는 신앙으로부터 벗어나라.
1)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드리는 예배로부터 벗어나라.
두번째로 우리가 성경적인 예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드리는 예배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우리 함께 미가 6장 7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허물을 위하여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가가 섬겼던 두번째 왕인 아하스 왕은 하나님 앞에서 여러가지 죄악을 저질렀지만 그 중에 하나님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끔찍하게 생각했던 죄악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자신의 첫째 아들을 자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 희생제물로 삼았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받는다고 하셨지만 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어놓으라고 하신 적이 없어요. 이것은 이방 사람들 특히 암몬 사람 들이 몰렉, 몰록 혹은 밀곰이라고 불리는 신을 섬길 때 나타나던 모습이었어요. 암몬 족속들은 제사를 할 때 부모가 불로 달구어진 몰렉 신상의 팔 위에 어린 자녀를 지나가게 하는 인신제사의식을 행했어요. 실제로 몰록을 숭배한 곳에서 어린 아이들의 해골을 포함한 두꺼운 층의 재가 발견되기도 했죠. 아하스가 이렇게 자신의 아들을 불에 태워 희생제물로 드린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안위 때문이었어요. 이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었어요.
2)7성례의 폐해
이렇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예배를 드렸던 모습을 우리는 중세시대의 로마 가톨릭의 예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7성례입니다. 성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세례와 성찬을 말해요. 초대교회에서는 이 두가지 것을 성례로 여기고 예배에 한 요소로 사용했었습니다. 칼빈도 교회의 표지 곧 이곳에 교회라는 것을 증명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말씀이며 또 하나는 성례라고 말했습니다. 그 만큼 예배의 요소에서 세례와 성찬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자신의 유익을 따라 성례를 7가지로 늘리게 됩니다. 간단히 살펴보면, 첫째, 성세성사가 있습니다. 성세성사는 우리 말로 세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제가 세례를 할 때 불신자가 신자로 변화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견진성사가 있습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 받는 의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사제가 안수하고 머리에 성유로 십자가를 그을 때 성령의 충만함이 내려진다고 보죠. 셋째,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성찬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와는 다르게 성찬을 할 때 사제의 능력으로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실제 피와 살로 변화된다고 주장해요. 넷째, 신품성사가 있습니다. 이건 사제나 주교 등 성직자들을 세우기 위해서 주는 의식입니다. 다섯째, 혼인성사가 있습니다. 혼인성사는 결혼식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 신성한 것이라고 여겨져 보통 주일에 행해는 의식입니다. 여섯째, 고백성사가 있습니다. 고백성사라고 하지만 고해성사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 있어요. 신자가 되면 적어도 1년에 1번은 고백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해요. 고백사제가 “나는 그대의 죄를 용서하노라”고 공식적인 사죄선언을 하면 그 때 죄가 사해지는 것이죠. 미국의 한 카톨릭 성당에서는 코로나 때문에 드라이브 쓰루로 고해성사를 받는다고 합니다. 일곱째, 병자성사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종부성사라고 불리기도 한 이것은 죽을 위험이 있는 사람 또는 중환자에게 기름을 부어 위로하는 의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로마 가톨릭은 이 7가지 성례를 집행하면서 ‘사효성’과 ‘인효성’을 주장합니다. 사효성은 7성례 각각이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있어서 이것에 참여하기만 하며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효성은 그 은혜가 끼치게 되는 것은 오직 사제가 성례를 집행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7성례를 살펴보면 좋은 부분이 있습니다. 병자들을 돌보는 의식, 혼인의식, 새로운 성직자들을 세우는 의식 등 좋은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보다 사제를 높이는 사제주의와 인간 중심적인 생각들 그리고 성례를 통해서 자신이 더 많은 복을 받으려는 왜곡된 신앙이 들어있는 거에요.
2.적용: 인본주의적이고 기복주의적인 예배에서 벗어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눈으로 예배를 바라보고 있나요? 오늘 이 예배에 나올 때에 어떤 마음으로 나아오셨나요? 예배에 나와서 나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기만을 바라고 있지 않나요? 아니면 나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나요? 평소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스테레스 팍 풀고 가길 원하나요? 만일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중세교회의 예배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거에요.
우리는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인간 중심적이고 복만 바라는 예배의 모습에서 벗어나야만 해요. 예배를 이용하려는 악한 죄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예배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역사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 다.

[본론3: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삶에서도 예배하길 원하신다]

1.예배는 삶에서 지속되어야 한다.
1)미가의 예배 정의
세번째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성경적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삶의 예배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미가 6:8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지금까지 미가 선지자는 ‘과연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옳은 예배인가?’, ‘정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 배가 무엇인가?’ 외치고 있었다면 이제 정말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무엇인지 소개해 주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정의와 이웃사랑과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거죠. 이것은 공적 예배가 아닌 신자의 매일의 삶에서 나타나는 삶의 예배라고 볼 수 있어요.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당시 남유다는 정의와 이웃사랑과 같은 삶의 예배들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어요. 우리 함께 미가 3장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가죽을 벗기며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하나님께서 왕과 장로들과 같은 나라의 지도자들을 세우실 때는 하나님의 정의의 대리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큰 재판은 왕이 담당을 하지만 소소한 재판들은 각성의 장로들과 유력자들이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정의를 따라 정의롭고 정직하게 재판하며 사람들을 하나님의 법 안에서 온전히 세워가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가 시대의 지도자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어서 자신들의 탐욕을 지속적으로 채워가기 위해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대했고 그들의 것을 착취했고 합법적인 권리도 빼았았어요. 정의를 행해야 하는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백성들을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이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뜯어먹는 잔인한 악행을 행한 것이죠.
 그 뿐 아니라 제사장들도 백성들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약탈을 일삼는 부유한 자들에 대항하여 빈 곤한 자들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고 지도층과 함께 타락의 길을 걸어갔어요.
중세 시대의 교회도 미가 시대의 지도층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어요. 존 위클리프가 살던 14세기 중반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으로 인해서 혼돈의 시기였었죠. 그리고 흑사병이 발발해서 유럽인구의 3분의 1일 죽어나간 직후였어요. 그런데 이렇게 힘든 시기에 교황과 수많은 사제 들은 세속적 권력과 부를 추구하느라 눈이 멀었고, 부패와 향략에 빠져서 신도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교황과 주교 그리고 사제들의 사생아들이 많아서 그들을 처리가 곤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겉모습은 거룩한 예배자였지만 속은 섞어 문드러진 악인이었던 것이죠.
2)삶에서 지속할 없는 예배, 주일만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일만 예배를 드리는 자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정의로운 행동과 언어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넘기지 않고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고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일 겸손하게 내 삶을 말씀 앞에 점검 해 보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예배자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주일만 예배하는 예배자가 아닌 삶의 예배자, 매일의 예배자가 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곳에서 정의와 사랑과 겸손을 드러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배의 처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으며 우리의 예배가 회복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 도전]

코로나 시대의 한국교회의 예배가 많이 무너져 있습니다. 자신의 편의대로 드리는 예배,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드리는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주일만 예배를 드리고 신자의 삶에서 예배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아 교회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사회적 지탄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무너질 때 무너지는 것입니다.
매주 드리는 공적 예배를 돌아봅시다.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점검합시다.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돌아봅시다. 우리의 삶의 예배를 회복합시다. 만일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면, 성경적 예배에서 벗어나 있다면 과감히 그것을 잘라내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실된 예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하나님만을 위한 예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정의와 사랑과 겸손이 있는 삶의 예배를 드려 나가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럼으로 주의 교회가 회복되는 은혜가 풍성히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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