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과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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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환영의 탈을 쓴 거절]
1)거절에 대한 일반적인 예화
혹시 우리 성도 여러분들은 누구에게로부터 거절을 당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도 여러 번 거절을 당해보았는데, 그 중 “거절”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 근처 공원에서 청년들과 함께 전도지를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청년이 지나가길래 전도지를 주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그 청년으로부터 심한 욕을 듣게 된 것이죠. 당시에 너무 당황해서 그냥 그 청년을 보냈는데, 나중에 교회에 돌아와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전도를 하면 이런 종류의 거절들을 가끔씩 당합니다. 어쩌면 이런 거절 때문에 전도를 하러 가는 것이 꺼려지기도 하죠.
2)거절 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
요즘 사람들은 누구에게든지 거절을 당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거절을 이겨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책에서 찾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서 사이트 검색란에 거절이라는 단어를 입력해 보면 거절과 관련된 많은 책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거절 당하기 연습, 죄책감 없이 거절하는 용기, 거절은 나를 다치게 하지 못한다. 거절의 힘, 거절을 거절하라 등등의 책들이 있었습니다. 거절을 당하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절을 당해도 자신이 상처받지 않는 방법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상처 입히지 않고 거절하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3)세상이 말하는 거절의 위험성
저는 이 거절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방법들이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방법들이 가지는 위험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책들이 제시하는 주요한 해결책 중 하나가 YES와 NO 사이를 매우 모호하게 두어서 상대방이 자신이 거절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마음속으로는 확실히 No라는 거절의 마음이 있지만 겉으로는 YES의 표정과 행동을 보임으로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겨주는 것이죠. 이런 거절의 논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면을 쓰게 합니다. NO라는 마음에 YES라는 가면을 쓰게 만듭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매우 위험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러한 거절의 논리들이 얼마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침투해 있는지 살펴보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첫번째 거절의 형태: 예수님의 가까운 자들이 그의 말씀을 거부함.
1)선포: 희년을 선포하시는 예수님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모습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오신 이 갈릴리 지역은 한 마을이 아니라 갈릴리 바다 근처에 있는 매우 큰 행정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상부 갈릴리와 하부 갈릴리로 나눠져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부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성장하셨지요. 즉 예수님께서는 요단강 주변의 광야지대에서 이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향인 갈릴리에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1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셔서 한 일은 가족들과의 즐거운 만남이나 이웃들과의 교제 보다는 나사렛의 회당에서 늘 하시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셨을까요? 이번 주면 설연휴인데 우리 성도님들이 만일 고향 사람들을 만나시게 된다고 했을 때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으세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말씀을 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4장 18절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으시고 거기서 자신이 원하시는 말씀을 찾으셨는데, 그 말씀 구절이 바로 이사야 61장 1-2절 말씀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고 그들의 포로 됨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는 예언이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자유를 얻게 될 것임을 알려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 내용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들 희년에 대해서 좀 알고 계신가요? 레위기 25장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었던 매우 독특한, 종과 소유에 대한 법률 조항 하나를 소개하는데, 그것이 바로 희년제도입니다. 레위기 25장 8-10절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속죄소 위 곧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고대 이스라엘은 50년이 될 때마다 모든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하며 종들에게 자유를 주는 희년제도를 운영했습니다. 그래서 희년은 정말로 여호와께서는 주시는 은혜의 해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자유함을 얻는 놀라운 기적의 해였죠. 그래서 에스겔서 46장 17절에는 이를 ‘자유의 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고향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희년이 선포되었음을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 분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민족의 죄 사함과 영적인 해방을 선포하고 계신 것이죠. 희년에는 누구에게 소속되었던지 노예로 있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탄의 사망권세로부터 자유 함을 얻을 은혜의 날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읽으시고 이제 말씀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 이게 무슨 말이죠. 이 모든 말씀들이 유대인들에게 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종이었는데 바로 오늘이 희년이라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2)반응: 예수님의 친족들이 미쳤다고 함
하지만 어쩐지 이 좋은 소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찮습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야” 이들은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기에 예수께서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5-57절은 고향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희년의 소식을 들었지만, 예수님의 출신을 알고 있었기에 그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4)적용: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첫번째 거절의 형태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의 거절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잘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밝혔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절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었지만 구원자로는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자들에게 거절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잘 알고 있지만 어쩌면 그 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 예수님을 믿는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 예수님을 진정으로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받지 아니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모습들이 우리에게도 있지는 않은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환영이라는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리에게 예수님은 2,000여년 전 태어난 요셉의 아들인가요? 아니면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구원자이자 주인이신가요? 우리는 예수님을 이 세상이 말하는 위대한 선생이나 성인이 아니라, 또한 2000년전에 태어난 나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또는 저기 하늘 위에 계셔서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신 참된 구원자이자, 지금도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진정한 주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시는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 가득하길 바랍니다.
2.두번째 거절의 형태: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거부하고 유익만을 취하려고 함.
1) 속담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자, 이제 고향 사람들의 거절을 경험하신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서 대답하십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여기서 한 속담이 나옵니다.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이 속담은 창세기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을 정리해둔 브레시트 라바(창세기 라바)라는 책에 나오는 속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말씀 뿐만 아니라 유대 문학도 잘 알고 계셨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속담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이 속담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즉 나사렛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후 가버나움에서 귀신들린 자들과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지금 마치 의사가 자신의 몸을 먼저 고쳐야 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도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행하길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목적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가룟 유다
이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제자로 살아가기 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는 데 집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도깨비 방망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단지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는 예고들에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이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무언가에 있었습니다.
3)적용: 예수님을 그저 수단과 방법으로만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두번째 거절의 형태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보는 거절입니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신학자인 자크 엘륄은 현대사회를 기술문명으로 인해 수단화된 사회라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모든 것들을 “유용성”의 기준으로만 판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수단화된 모습이 교회 안에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예수가 나에게 유익한가? 예수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만일 예수로부터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면 내가 이 교회 공동체에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생각들은 헌신의 자리에서 보상을 바라게 만들며,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 조건을 걸게 만듭니다. 그리고 만일 보상을 받지 못하고,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예수로부터 등을 돌려버리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거절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생의 구원자로, 그리고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환영의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어줄 도구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께 값지 못할 영생이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함을 표현하고 자족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한 주님의 백성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은혜가 우리 안디옥 교회에 풍성히 나타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세번째 거절의 형태: 자신들의 뜻과 반대되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함.
1)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이방인의 구원
자,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을 향해서 한 가지 역사 수업을 해 주십니다. 그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 위대한 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이 가장 우상숭배와 불성실로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였던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인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에게 임하게 되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백성들의 대가는 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다른 곳으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역사 수업은 하나의 경고였습니다. 지금 예수께서 자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셨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을 경고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2)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 -> 스데반 집사
우리 성도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들었다며 어떻게 반응하셨을 것 같으세요? 아마 예수님께 회개하며 예수님을 온전히 구원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생각은 완전 달랐습니다. 이들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함께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28-29절입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놀랍게도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밀쳐 죽이려고 합니다. 현재의 나사렛에 가면 절벽산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 정상에는 “마리아의 두려움(Mary’s Fear, Our Lady of the Fright)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절벽으로 밀려날 때 어머니 마리아가 그들을 쫓아가다가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발이 얼어 붙듯 서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한 교회입니다. 어쩌면 이 유래처럼 예수님의 부모가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부모가 누군지도 알고 있고, 형제 자매가 누군지도 안다고 했던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아닌 거기에 있는 모두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 동참합니다. 더 놀라운 점은 살인에 동참한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신했던 유대인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이런 모습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의 현장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행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 행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치부가 들어나고 마음에 찔림이 있자 스데반 집사님에게 달려들고 폭력을 행사하고 돌로 쳐서 결국 죽여 버립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죽일 정도로 화가 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잘못된 신앙관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할례의 언약 아래 자연스레 구원을 받는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민족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 아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닌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며, 만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을 경우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음을 경고하십니다. 스데반 집사님 또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하며 회개할 것을 언급하였기에 유대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시게 됩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잘못된 신앙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4)적용: 예수님을 죽이는 거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향한 세 번째 거절의 형태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거절입니다. 이것은 나의 잘못된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혔을 때 예수님을 우리 마음 속에서 죽이는 거절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지는 않은가요? 나의 고집이 너무나도 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은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듣고 읽기는 읽어도 그 말씀이 은혜가 되지 않고 아픔이 되고 짜증만 납니다. 결국 말씀과 거리를 두게 되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로 남들은 모른 채 환영의 얼굴을 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가진 불신자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 예수님은 살아계신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두고 있나요? 아니면 내 삶에 온전히 나만 생생히 살아서 전혀 변화되지도 말씀에 영향을 받지도 않는 삶, 예수님이 날마다 죽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진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혹시 가지고 있던 거절의 문빗장을 풀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온전히 변화시키도록 나의 낡은 관습과 아집을 철저히 무너뜨리도록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장악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럼으로 날마다 예수님을 죽이는 삶이 아닌 우리 마음 가운데 날마다 예수님을 살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가는 말: 거절이 아니라 환영의 삶을 살라]
우리는 오늘 예수님을 향한 세 가지 거절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나라나 로마가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거절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소돔과 고모라 같은 도시가 아니라 나사렛에서 거절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악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신전에서 거절 당하신 것이 아니라 회당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던 예배처에서 거절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환영의 가면 뒤에 거절이라는 얼굴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환영하시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또한 이 코로나가 우리의 환영의 가면을 강제로 벗겨내는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의 시기가 지나면 우리의 마음 속에 환영이 있었는지 거절이 있었는지가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우리의 인생의 주인자로 받아들이고, 그 분을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지 않고, 온전히 그 분의 말씀이 우리의 전인격을 변화시키도록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있을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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