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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다, 잇다, 이어가다.

에스겔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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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아!” / “네. 하나님. 말씀하세요.” / “응. 그래. 너 지금 길거리로 나가서 흔하게 보이는 막대기 하나 주워보렴.” / “네. 하나님.” / “그리고 거기에 ‘유다와 그 짝(그와 한편 된[공동], 그와 연합한[새번역]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봐라” / “네. 하나님.” / “그리고 다른 막대기 하나 더 준비해서 그곳에는 ‘에브라힘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써라”(16) / “네. 하나님.” / “그리고 이 둘을 네 손에 하나가 되게 하라”(17)
에스겔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 중 삶의 퍼포먼스로, 특히 실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선지자입니다. 함께 읽은 본문은 실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가장 먼저 ‘본문은 에스겔서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용상으로 조금 넓게 보면 33~37장까지 이스라엘을 향한 회복과 위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본문은 이 주제의 종결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좁게 37장으로 국한시켜 본다면 (겔 47장에 있는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물 환상과 더불어 에스겔의 유명한 환상, 즉) 앞에 14절은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되는 환상이, 뒤에 14절은 두 막대기를 하나 되게 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회복’이라는 주제의 안경을 쓰고 앞에 있는 환상과 뒤에 있는 사건을 연결지어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나누는 이 시간 ① 마른 뼈 환상과 두 막대기 사건의 연결점을 살펴보면서 ②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③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 하기를 원하시며 ④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지 하나님의 음성을 심비에 새기는 복된 시간 되길 바랍니다.

본론

1.잊다

에스겔서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적인 단어와 어구가 많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먼저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볼 단어가 있습니다. 에스겔 37장 전반에 걸쳐 기록된 표현인데요.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죠.
6 …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13 …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 …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
28 …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바로 ‘알다(체험하여 아는, 야다)’라는 동사가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을 자세히 살펴보시죠. 하나님께서 반드시 “알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현재 택한 백성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택한 백성들이 무엇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무엇을 잊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본문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과 이끄심’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감각적인 표현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원어적으로) 그의 (권능의) 손으로 에스겔에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골짜기 가운데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은 에스겔은 (‘본즉’) 무언가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뜻은 단순하게 보는 것이 아닌 감탄형식 즉 ‘봐라!’라며 보며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은 무엇을 보며 놀랐을까요? 바로 골짜기에 있는 뼈를 보며 놀랐는데 (2절을 보면) 그 뼈는 두 가지의 특징, 즉 심히 많이 있었고, 아주 말라 있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에스겔이 본 회복 불가능한 말라버린 많은 뼈들이 누구를 상징하는 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1절에 이 부분이 나와있죠. 바로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즉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뼈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온 족속이 왜 뼈가 되었을까요? 에스겔서를 보면 뼈의 이미지가 앞서 두 번이나 더 언급되는데, 모두 같은 맥락에 쓰입니다.
6:5 이스라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너희 해골(뼈)을 너희 제단 사방에 흩으리라(우상숭배하는 택한 백성들을 심판하는 상징으로 뼈라는 이미지가 쓰임)
24:5, 10 …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지어다 … 그 뼈를 태우고(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처참히 심판당할 것이라는 심판을 상징) / 즉 뼈는 하나님 심판을 당하여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상태를 의미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처럼 뼈의 상태가 되었을까요? 바로 그들의 죄악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별히 에스겔이 지적하고 있는 죄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서조차 우상을 섬기고 있는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전에 에스겔서를 가지고 말씀을 전했는데요. 이 장면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고 있는 모습(겔8:16)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이를 심판하셔서 나타난 상태가 바로 ‘심히 많고 아주 말라버린 뼈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끄셔서 (사방으로(2) 다니며) 마른 뼈들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뼈가 되어버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죄악을 보길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망각한 거예요. 단지 자신들의 나라가 힘이 없었기 때문에 막강한 힘을 가진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당하고 포로되었다고만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을 보여 주시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지 못한 죄로 인해 나라가 멸망당하고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반야월의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도 에스겔과 같이 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뭇가지로 그의 수치를 가린 것처럼 죄를 감추고 가면을 쓰는 일을 얼마나 잘하는 지 모릅니다. 내 영혼은 죄로 인해 마른 뼈처럼 메말랐는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자기 의’라는 가면을 쓰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척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회칠한 무덤과 같이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를 보여주시며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심판의 결과를 보도록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각자의 죄악을 (감추거나 망각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철저히, 우리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바라보기 원하십니다. ① 성도로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오히려 세상이 우리를 걱정하고 있는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②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상실해버린 우리의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③ 하나님의 성소에서조차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것들만 채우려는 우리의 이기적인 죄악을 바라봐야 합니다. ④ 하나님께 값없이 허락받았기에 마땅히 드려야 할 헌신과 물질을 세상의 것을 취하고 누리기 위해서 혈안되어 있는 우리의 죄악을 바라봐야 합니다. 바라기는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감추고 있었던, 잊고 있었던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주셔서, 나의 죄악을 직면하고 회복을 갈망하는 애통함이 우리에게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러한 애통함 가운데 23절의 말씀처럼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택한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잊어버린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 뼈의 상태가 된 이스라엘의 말을 다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11절 중반절부터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사랑하는 반야월의 성도 여러분! 뼈처럼 말라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탄을 다시 주목해보십시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남유다는 멸망했고, 예루살렘은 훼파되었으며, 택한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기에 소망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정말 그들에게 소망이 없어진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참 소망이신 하나님의 택한 언약 백성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시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요,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라고 한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상태가 소망이 없어진 상태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소망이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택한 백성들은 참 소망이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잊어버리고 알지 못했던 것일까요?
에스겔서의 또다른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예언된 말씀을 받은 날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연대가 에스겔 전체 13번 기록되어 있는데요. 오늘 본문인 37장은 여호와긴 왕이 바벨론의 포로로 사로잡힌 지 12년 되는 해 10월 5일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년 정도 지난) 후부터, 성이 함락된 후 14년 되는 해 정월 10일 사이 어느 시점에서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에 에스겔서 말씀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었는데)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바벨론의 2차 공격 때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비록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왔지만 그들에겐 희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인 예루살렘은 멸망당하지 않았기에 성전에 계신 하나님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를 포로생활에서 구원하실 거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만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바벨론에서 제대로 행장도 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희망했던 예루살렘조차, 하나님의 성전조차, 바벨론에 의해 철저히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의 희망, 살아가야 할 목적과 정체성마저 잃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망연자실했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하루가 지납니다. 이틀이 지납니다. 사흘이 지납니다. 일 년이 지납니다. (더 넓게 보면) 십 사년이 지납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포로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영적 부담감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의 훼파된 성전에 대한 원통한 마음도 점점 희미해져갑니다. 더 문제는 일 년, 혹은 십 사년 동안 숨어계시는 것처럼 아무 역사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이제는 기대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참 소망의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의 변함없는 하나님 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주목하시고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들의 입에서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고,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자조적인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반야월의 성도 여러분!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비춰봤으면 합니다. ① 우리의 바람과 기대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거절하실 때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늘여놓고 있지 않습니까? ② 하나님의 침묵과 기다림조차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잊고 살지 않습니까? ③ 하나님을 믿어도 아무 소용없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예배의 자리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우리에겐 소망이 없어!’라며 원망을 쏟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자신의 선하신 계획에 따라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도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고 놀랍게 일하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다면, 살리는 생기가 사방에서 불어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2.잇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더러움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상황에 자연스럽게 순응해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라가 분열하고 멸망당해 마른 뼈와 같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악을 감추고 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간절한 기대를 거절하고 오히려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불신하며 소망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으로 전적으로 택한 그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회복하시는 모습이 본문의 환상과 사건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잇게 하셨다’는 겁니다.
앞의 환상에서는 (도저히 살아날 가능성조차 없는) 심히 많고 아주 말라버린 뼈들이 주의 명령 앞에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불어와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의 사건에서는 흔한 막대기 두 개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이어 붙여 하나가 되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잊은 백성들에게 ‘잇게 하심’으로 회복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회복을 유념하여 살펴볼 때 참으로 감격스런 장면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것을 가지고 회복하시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큰 군대를 만드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체격 좋고 힘 쎈 장수들을 모으는 것이 좋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복이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울 정도가 되어버린 마른 뼈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무시하시 않으시고 그것을 회복시켜셔서 큰 군대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많은 뼈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큰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요? 여러분,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한 이유가 군사가 적어서 멸망한 걸까요? 그렇다면 군사력이 막강하게 보강되면 이스라엘은 회복되는 것일까요? 큰 군대를 만든다는 것은 군사력을 통해 이스라엘을 재건하시겠다는 것일까요?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 환상 다음에 두 막대기 사건을 행하신 겁니다. 에스겔이 쥐고 있는 막대기는 말 그대로 흔하디 흔한 막대기입니다. 소수의 구약학자는 그 위에 글을 쓴 것을 가지고 그것을 서판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너무나 쉽게 취할 수 있는 그러하기에 어쩌면 가치가 없어 보이는 막대기를 쥐게 하셔서 그것을 연결하게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회복시킬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19절을 보시면 두 막대기를 이어지게 한 에스겔의 모습을 보며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때 어떻게 대답할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다’고 말합니다. 에브라임,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란 이미 136년 혹은 150년 전에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유다의 막대기는 남유다를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되도록 회복시키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남유다만을 가지고 회복시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유다보다 더 심한 죄로 인해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혼혈정책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정체성마저 사라지고 있는 북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두어 남유다와 하나로 이어지도록 자신의 구원의 계획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이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세상은 더 멋지고 훌륭하고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과거에 사용했더라도 그것을 무가치하게 던져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세상이 보기에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해보이며 무가치한 그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회복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국가대표 죄인이요, 한없이 이기적이고 연약함 투성이인 우리를 회복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가정을 회복하는 도구로 자격 없는 우리를 회복의 도구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속한 지역, 교회를 주의 뜻대로 회복하는 도구로서 여전히 연약한 우리를 회복의 도구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여전히 무능한 우리를 회복의 도구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해 우리의 삶에 여러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는데 제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여러 가지 것들 중 다음세대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2017년에 발간된 목회데이터연구소 자료를 보면 대학생들의 기독교 신앙이탈율이 5년 전인 2012년 14%에서 2017년 30%로 그 비율이 두 배가 되었으며, 특히 교회를 다니다가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탈율이 중학생 또는 그 이전부터 70%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어떤 자료를 분석한 글을 보니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갖는 비율보다 아예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한 비율이 높다고 분석하며 이를 우려했습니다. 왜냐하면 반감을 갖는다는 것은 그나마 교회에 기대와 관심이 있기 때문인데 무관심하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길이 아예 막혀버린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세대를 위해 포기하기 않고 기도하고, 섬기고, 투자합니다. 이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상고하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다음세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군대가 되기 위해 소망 없는 마른 뼈가 사용되었듯이 한 나라가 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막대기, 이미 멸망당한 북 이스라엘이 도구로 사용되었듯이 다음세대를 살리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해 여러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키기 위해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 역사를 일으키는 도구로 쓰임받아 그 뜻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용어를 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음세대’입니다. 다음세대가 중요한 만큼 이음세대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틀렸으니 다음세대에 일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맙시다. “하나님! 다음세대를 일으켜 세워주시기 위해, 점점 무너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막대기와 같은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도록 우리를 이음세대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믿음의 선포가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숨막히는 어려운 상황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우리를 통해 이루기 원하신다는 겁니다. 앞에 환상과 뒤의 사건을 보면 이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그 놀라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시작되나요?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에스겔이 그 말씀을 대언할 때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7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에스겔)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곧 하나님께서 이미 멸망한 두 나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하나님의 사람들의 손을 통해 하나가 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반야월의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멈추었다면 우리의 옷만 찢는 것이 아닌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으로 돌이킵시다. 내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기대를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소망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하나님께 시선을 두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한 약속에 따라 여전히 연약한 우리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이음세대로 다음세대에게 자신의 뜻을 이어가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기대와 계획이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끈을 더욱 단단히 붙잡길 바랍니다. 우리를 이음세대로 사용하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소망 없는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여 살리는 도구로, 나라가 멸망하고 사라져버린 절망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삶으로 드러내는 도구로 아름답게 사용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3.이어가 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에 소망을 둬야 할까요? 바로 ‘이어가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들이 하나님의 소망을 이어가는 이음세대가 되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기를 소망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하고 멈추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른 뼈, 흔한 막대기와 같이 죄로 인해 죽어버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우리들에게 소망을 두신 하나님께서 그 소망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22절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22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
즉 한 임금을 통해 우리가 온전한 다스림 받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왕은 24절에서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니’ 즉 다윗을 말합니다. 이 다윗왕은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마른 뼈와 같고, 흔한 막대기와 같더라도 우리 안에 예수께서 다스리실 때 이음세대로서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왜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까요? 24~28절까지를 보면 하나님의 이어가심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너무나 중요한 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영원하심’입니다.
25 …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서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
하나님이 영원하시기에 그의 속성에 따라 영원한 다윗의 왕 예수를 세우시어 그를 통해 마른 뼈와 같은 우리를 흔한 막대기와 같은 우리를 자신의 뜻을 이어가는 도구로 사용하시어 그의 뜻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음세대인 여러분!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 되도록 매순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성도 됩시다. 우리 교회 안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으로 드러나도록 주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교회 됩시다.

결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회복은 바람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구호를 크게 외친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마른 뼈가 들려져야, 흔한 막대기가 쥐어져야 회복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우리의 죄를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은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분의 일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의 일하심은 어떠하십니까? 바로 마른 뼈를, 흔한 막대기를 그것도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회복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잇는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피아노가 영광 받아서는 안됩니다. 피아노를 아름답게 연주하는 연주자가 영광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영광 받으시도록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 되셔서 영원히 우리를 하나님 백성답게 정결케하시고, 행하게 하시며, 회복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복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마지막으로 27~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7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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