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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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말씀 : 눅 10:25-37절
제목 :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찬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찬 462장 생명 진리 은혜 되신
오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의 비유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어렵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비유를 해석하는 교회의 해석의 역사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잘못된 내용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부분 초기부터 종교개혁 시기까지 영적으로 이 본문을 해석했습니다. 그것을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 해석 방법이 뭐냐면 예수님의 비유의 내용은 어떤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읽기 보다는 그 단어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파악해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4세기의 교회 역사에 중요한 교부였던 어거스틴은 이 본문을 영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마귀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한 아담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을 각각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온 다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해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해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나 은혜로운 해석 아닙니까? 죄로 인해 죽었던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내용으로 이 본문을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신천지가 광주 5.18 민주광장과 수원월드컵 경기장에서 신천지 ‘만국회의’로 모였다고 합니다. 허가가 모두 취소되었음에도 불법점거로 행사를 진행시켜 사회의 물의를 일으켜 고소를 당했다는 뉴스였습니다. 왜 신천지가 이토록 우리나라에서 득세하고 있을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고 설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 같이 신천지에서 나온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그래도 거기는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엄중한 자리에서 본문을 읽어놓고 다른 재밌는 이야기, 윤리적 이야기, 정치 이야기 등등 다른 것을 전하다보니 그래도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신천지로 발걸음을 향합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신천지가 대표적으로 성경을 비유풀이라 해서 영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을 영적인 의미가 있다면서 맞지도 않는 여러 구절들을 대가면서 의미들을 끼워 맞춥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본문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해서 문자 뒤에 감춰진 어떤 신비하고 영적인 뜻, 무언가 새롭고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보다 본문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하고 계신지에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오늘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깨닫고 순종하는 한 주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인 선한 사마리아 비유는 율법교사와의 대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의 의도를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예수님을 시험하여 이르시되” 그는 예수님이 과연 이 중대한 질문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말씀하시면서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물어보셨습니다. 율법교사는 율법교사답게 계명에 대한 핵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율법교사가 예수님이 과연 율법을 알고 있는지 또 무시하고 거부하는지 확인하며 시험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교사는 기다렸듯이 한 가지 더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 질문의 답에 대한 부분을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율법에 명시 된 ‘이웃’이 누구이냐 하는 정의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 당대에 유대 랍비들의 율법 해석에 따르면 누구든지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이웃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가족, 자기 친척과 친구들, 그 다음에는 같은 신앙과 혈통을 가진 유대인들, 그래도 이웃이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같은 혈통은 아니지만 유대교로 개종하여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까지만 이웃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들만이 바로 내가 도와 주어야하고 사랑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이웃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같은 유대인이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죄인들로 불려지는 사람들 (세리, 창기, 사마리아인 부정한 병에 걸린 사람 등) 그리고 유대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모든 이방인들은 그들의 이웃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이 아닌 자와 식사와 대화와 꺼려 했으며 상종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의 이웃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낙인찍은 자들과 함께 교제했습니다. 이방인들도 거리낌 없이 만나구요,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저 사람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다”라며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이 맥락에서 율법교사는 질문을 한겁니다.
29절 말씀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 사람의 질문의도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한 것입니다. 율법이 말하는 이웃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가? 당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며 당신이 생각하는 이웃은 율법에 틀린 것입니다. 자신이 율법교사이며 율법의 이웃에 대한 정의를 물으면서 예수님께서 틀린 행동을 했으며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기 보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대답하십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의 거리는 약 27km이며 해발 750m의 예루살렘에서 해면보다 250m에 있는 여리고 성을 내려가는 길은 완전한 내리막길 이었을 것입니다. 그 길은 양쪽에 바위가 많아 고대로부터 강도들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길을 한 사람이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거의 반죽음 상태로 버려졌습니다. 그 때 한 제사장이 그곳을 지나갑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제사 직무를 수행하고 돌아가고 있었겠지요. 그는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나갑니다. 두 번째 레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갑니다. 그는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임에도 그를 보고 피해서 지나갑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이야기를 몰입해서 듣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한 인물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줄 사람은 누가 나타날 것인가? 아니 이제 어떤 유대인이 나타날 것인가? 분명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서민인 대다수의 청중들은 이 영웅은 특별 계층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라 서민 유대인이 나타나서 그를 구해줄 것이라고 대부분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강도 만난 자를 구해준 것은 다름이 아닌 예수님은 바로 사마리아인이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을 깰 뿐만 아니라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마리아인과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상종하지 않았다. 이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시지요? 첫 번째 이유는 주전 722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면서 이방인들과의 국제결혼으로 혼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혈통의 문제에서 더 나아가 주전 515년에 바벨론에서 귀환에서 유대인들이 성전을 건축할 때 에스라서 4장에 보면 함께하지 못하게 하자 성전 건축을 사마리아인들이 방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전 4세기경 그리심 산에 별도의 성전을 세웁니다. 주전 128년 이것이 탐탁지 못했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가 성전을 파괴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주후 8년쯤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 전날 밤 예루살렘 성전에 몰래 와서 성전 주위에 죽은 사람의 뼈를 사방에 뿌려 성전을 더렵혀서 유월절 행사를 못하게 하는 큰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서로 원수가 되었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더러운 돼지처럼 간주하고 회당 예배 때마다 공공연하게 저주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그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이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유대인 청중들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상종하기도 싫은 원수 같은 사람이 갑자기 이야기에 등장하고 더 나아가 그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의 행위에 대해 예수님은 더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정성껏 돌보아 줍니다. 자신의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싸매고 짐승에 태워 주막에 맡깁니다. 그리고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돌보아 주는 비용까지 다 지불합니다. 지금 데나리온 둘이라는 것은 당시 3주치의 숙박 비용입니다.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건냅니다. 더 나아가 그는 그가 완전히 치유될 때까지 돌보아 주는 것을 원했으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율법교사에게 질문하십니다. 36절 말씀입니다.
(눅 10:36, 개정)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누가 과연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대답하며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이 율법교사의 질문을 떠올려보십시오. 어딘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내용에서 이웃은 누구입니까? “강도 만난 자”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대부분의 내용을 누구에 대해 말하죠? 바로 사마리아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이웃이 어떤 대상이냐에 대해 이 비유의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고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이웃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질문에서 드러나는대요.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다시 질문하시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즉 율법교사의 질문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에 대해 물어봤다면, 예수님의 질문은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사랑의 주체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 말씀하십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따르면 이웃이라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어떤 특수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웃은 항상 고정되어 있는 사람인겁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가족, 친척, 친구, 유대인, 유대교인 특수한 대상이 자신들의 이웃이 되는거죠.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결국 네가 생각하는 이웃, 사랑의 대상자를 마치 어떤 특수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예수님께서 이 율법교사에게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은, 너는 자꾸 이웃이 누구인지, 네가 결정하는 특수한 대상의 이웃에게만 관심이 있느냐, 그게 아니라 이웃 사랑은 도움이 필요한 어느 사람에게라도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아무리 너희가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이라 할지라도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흔히 생각합니다. 나의 이웃이라는 범위가 거의 뚜렷히 정해져있습니다. 내 가족, 내 친척, 친구, 이웃집, 같은 동네, 교회사람 이것이 대부분의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의 대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비유에 나타난 이웃의 대상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웃의 범위와 상관없이 그는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자신이 최대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교회가서 예배 드리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거룩한 것인 반면, 신자가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이웃 및 사회 생활 하는 가운데서 하는 모든 것은 별로 상관 없는 것이며 이것을 구별하여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타난 여리고로 내려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행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귀하고 거룩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돌보아 주는 일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마치 신자들을 만날 때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의 태도가 이중적인 모습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범위를 정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라면 누구에게든지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병든 자, 고통 가운데 있는자, 부정한 자, 사마리아인, 세리, 창기, 죄인들, 심지어 이방인에게까지도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예수님처럼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는 삶이 되길 소원합니다. 율법교사처럼 지식으로만, 또 자신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만이 아닌 누구에게나 예수님처럼 이웃이 되어주는 우리의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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