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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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눅 23:22-28
제목 :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찬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오늘은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전하겠습니다. 3일간 평안하셨습니까? 뉴스를 보면 아직도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떠들썩합니다. 심지어 이틀전에는 광주에서 16번째 확진자, 그리고 오늘 그 여성분의 딸이 확진이 나오면서 18번째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와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러분들도 건강관리와 위생관리에 신경 쓰시고 이를 위해 계속적으로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제목은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습니까? 이곳에 계신 분들은 대부분 이 질문에 답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예수님을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가 예수님은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거의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만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죄가 예수님을 죽게 했다는 것을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내 죄로 내가 적극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게 되는 장면입니다. 본문 22절 말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눅 23:22, 개정)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빌라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으면서 예수님의 죄 없음 그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자 결국 그는 예수님을 사형에 넘겨줍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이 십자가 사형까지 넘겨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빌라도가 역할을 하지만 이 일은 빌라도에게 오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을 거쳐 왔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탄생, 생애, 중요한 공생애 때의 모습, 십자가, 부활에 대한 증언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서 기자들은 중요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당시의 가장 잔혹한 사형선고였습니다. 가장 극악한 죄인을 처형하는 방법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죄수는 고통과 수치를 당하며 천천히 죽어가는 잔혹한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하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은 이런 고통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엄청난 육체적 고통, 대중의 비웃음, 낮의 열기와 밤의 냉기를 절망적으로 겪는 상황, 못이나 망치의 고통, 혹은 피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면서 어떤 자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빌라도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도 본디오 빌라도의 죄악을 폭로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하죠 복음서의 기자들도 빌라도의 죄악을 폭로합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으로 로마 황제에 의해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파견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총독으로서 유대 지방을 잘 다스려야 했습니다. 법과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골치 아픈 유대인을 확고하게 로마의 지배아래 두어야 합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폭동 혹은 그럴 위험이 있는 움직임이 있다면 무자비하게 진압해야만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이유는 눅 23장 2절에 보면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라는 명목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조사한 결론을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다.’ 그는 세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오늘 본문 4절, 14-15절, 22절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세 번이나 확신했지만 23-25절을 보면 그들의 소리, 그들이 구하는 것, 그들의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는 결정을 합니다. 예수님은 법대로라면 마땅히 무죄로 풀려나야 되지만 빌라도는 총독의 자리에서 공의와 원칙 보다는 자신의 명예와 야망을 택했고 예수님을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빌라도는 비겁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두 번째 인물들은 바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입니다. 빌라도도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사형선고를 내리지만 결국 그렇게 결정하도록 한 입김은 유대 지도자들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도록 빌라도에게 넘기고, 예수님이 황제를 대적하는 미혹된 가르침을 전파한다고 주장하고, 군중들을 선동해 십자가형을 요구하도록 사주한 것이 이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요 19:11절에 보면 (요 19:11,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들은 원래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했었습니다. 5일전만 해도 말이지요. 하지만 겨우 5일만에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던 그들의 목소리는 예수님의 피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선동했기 때문입니다.
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형시키길 원했을까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기존 체계를 뒤엎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 밑에서 배운 권위 대한 근거 즉 자격증도 없었습니다. 자꾸 기존 랍비의 가르침을 거스릅니다. 율법에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는 죄인들과 가까이 지냅니다. 금식이 아니라 잔치 자리에 참여합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치료해 안식일을 범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을 보고 외식하는 자들이다.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들이다. 회칠한 무덤이다. 비난을 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며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다고까지 합니다. 여러분들이 종교지도자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사람을,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안정, 교리의 수호, 도덕적 순결이라 명분을 가지고 예수님을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죽이려는 근본적인 동기는 성경은 이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마 27:18, 개정)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빌라도는 그 지도자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동기가 무엇이라고요? 교리의 수호나 정치적 안정이 아니라 시기라는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시기했고 질투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에 대해 율법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세상을 심판할 권세가 있다고 말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그들이 알고 있는 다른 권위에게 호소할 수 있는 권위가 아니었고 그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특권, 백성에 대한 지배력, 자신감과 자존감을 훼손시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권위와 특권을 침해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결국 이 시기와 질투는 예수님을 제거하는데까지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공헌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이 결정적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진 것에 공헌한 인물이 바로 유다입니다. 유다의 이런 행동은 바로 ‘배신’이라는 용어로 성경에 묘사됩니다. 고린도전서 11:23절에는 예수님이 넘겨지시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밤을 개역개정은 ‘잡히시던 밤’이지만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 ‘배신당하신 밤’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았던 이유가 무엇이죠? 바로 ‘탐심’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향유 모두를 붓고 발을 닦자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4절부터 6절 말씀에 보면
(요 12:4, 개정)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 12:5, 개정)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 12:6, 개정)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 돈궤를 맡는 즉 총무였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이것을 팔면 1년치 봉급이 나올테고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데 이런 악한 낭비를 하냐고 비난합니다. 그의 명분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준다고 했지만 6절에 보면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라라고 확실히 말합니다. 그는 돈에 대한 탐심이 있었고 그것을 가룟 유다가 가졌더라면 분명히 훔쳤을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착복하지 못한 유다는 이 손실을 메꾸기 위해 바로 제사장들을 찾아가 예수님의 몸 값을 흥정합니다. 그리고 은 30이라는 보통 노예를 풀어 주는 데 드는 금액입니다. 이 은 30은 1년치 봉급 즉 300데나리온의 3/1의 금액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결국 돈에 대한 탐심으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겨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서두에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를 말하면서 우리가 십자가에 예수님을 달리게 했음을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이 세 부류의 인물들의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음을 폭로합니다. 총독 빌라도의 비겁함,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에 대한 시기와 질투, 가룟 유다의 돈에 대한 탐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아니 그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지 내가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이 세 부류들의 죄 뿐만이 아닌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이며 범죄자였던 아담의 죄. 이것은 단순히 아담의 죄 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죄 입니까? 이 원죄는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우리가 아담의 자리에 있었다면 저는 확신합니다. 아담과 똑같이 행했을 겁입니다.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저런 세 부류의 인간들과 똑같은 죄를 범하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도 빌라도처럼 너무나 비겁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유익과 나의 편의와 안위 앞에서는 너무나 쉽게 불법을 저지릅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척 책임을 다른 사람과 세상에 전가합니다. 또 얼마나 세상과 쉽게 타협 합니까, 은근히 진리를 왜곡하며 이것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순간에 쾌락에 또는 나에게 유익하다면 눈 딱 한번감고 일을 행합니다.
또 우리도 종교지도자들처럼 우리의 권력을 예수님께 빼앗기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죄인 된 인간은 자신의 인생에 누군가 간섭하고 침범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이 권위를 주고 싶지 않아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프라이버시라고 해서 ‘개인 생활’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누구도 침범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남편이라도 거부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믿는 사람들도 종교 생활과 자신의 개인의 삶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조차 프라이버시를 침범하지 못하게 합니다. 개인의 삶은 자신의 멋대로 살면서 마치 주일 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만 드리면서 천국은 보장받고 싶어하는 이중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내 삶은 내 마음대로, 예수님은 천국만 가게 해주는 도구인 것이죠. 이처럼 자신의 인생의 주인을, 권위를 침범하려는 예수님을 시기하며 제거하고 싶은 것이 죄인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삶도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요구, 뜻, 말씀에 대해 순종하기 얼마나 싫은지요. 예수님에게 경배하는 것을 귀찮으며 짐처럼 여길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탐심’의 모습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조차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며 착복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합니다. 하나님께 투자하듯 드리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또 드릴 것을 드리고 나면 나머지는 자신의 것인 마냥 사치를 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제물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하나님 자체를 나를 세상적 성공을 도와주는 도구로 착각합니다. 그것을 이루어 주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저버리기도 하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못 박은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똑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인간들입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베드로는 설교 가운데 분명히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행 2:36, 개정)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정)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예수님의 죽으심은 바로 우리에 의하여 행해진 일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먼저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이런 죄인에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이죠.
또 한 가지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의미는 바로 우리로 의해서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은 우리의 죄가 못 박은 것이 맞지만 더불어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당시 죄 때문에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상황을 모면할 힘이 없으셨을까요? 십자가형을 선고 받았을 때 그 자리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셨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지만 기꺼이 십자가를 순종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서 ‘반드시 해야 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십니다.
(요 10:11, 개정)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막 14:22, 개정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막 10:45, 개정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언제나 두 가지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의 차원에서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에게 넘겨주었고, 제사장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고, 빌라도는 십자가형에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성부께서 성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성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친히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 그분을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그분께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그분만 예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은혜를 누리는 이번 한주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로마서 5:6-11절 말씀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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