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궤를 옮기다

사무엘하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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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삼하 6:1-15절
제목 : 하나님의 궤를 옮기다
오늘은 ‘하나님의 궤를 옮기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전하겠습니다. 지난 주에는 다윗이 블레셋과의 2번의 전쟁에서 승리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승리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순종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듣는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의 똑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듣길 원해서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블레셋을 무찌르고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승리하는 한 주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하려 합니다. 그 일은 바로 하나님의 궤를 다윗의 성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궤, 언약궤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이 궤는 성경에서 보통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궤라는 것은 상자라고 생각 하면 됩니다. 특별히 언약궤는 금으로 사면을 싼 금으로 된 궤입니다. 이 궤 안에서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히브리서 9:4절을 보면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언약의 두 돌 판이 들어있었습니다. 언약의 두 돌 판이 들어있기에 보통 언약궤로 불렸습니다. 언약궤 위에는 그룹들 천사들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천사들 사이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보좌로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라고 표현합니다. 즉 언약궤가 가지는 의미는 하나님의 보좌,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임재의 의미를 가집니다.
다윗 왕은 이 언약궤를 이제 자신의 성으로 가져오길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서 무려 3만명을 뽑아 언약궤를 가져오기 위해 떠납니다. 목적지는 어디었습니까? 바로 “바알레유다” 이 지역은 기럇여야림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약궤를 보관한 아비나답의 집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를 운반하기 시작합니다. 아비나답의 자손들이었던 웃사와 아효가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옮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같이 왔던 모든 이스라엘 족속들이 여러 가지 악기로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삼하 6:5, 개정)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여기까지만 읽으면 궤를 운반하는 상황이 너무나 순조로워 보입니다. 너무나 좋아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뜻하지 않은 충격적인 사고가 발생합니다. 6절 7절 말씀입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수레를 끌고 가던 소들이 뛰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궤가 떨어질 위험이 생겼습니다. 그 때 웃사가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지 않게 붙들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웃사가 죽어버립니다. 이 죽음의 상황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금 하나님께서 과한 처사를 하신 것이 아닌가..? 죽일 필요까지 있었나?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 다윗 왕은 언약궤를 가지고 오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왜 다윗이 3만명이나 되는 사람을 데리고 갔을까요? 궤가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함께한 대부분의 사람은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마치 왕이신 하나님이 행차하시는 가운데 음악을 연주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왕이신 하나님이 행차하신 것을 기뻐하며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나름 수레도 새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실었습니다.
웃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웃사가 왜 죽어야합니까? 그는 소들이 뛰어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는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 행동은 결코 자신을 위한 행동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궤를 보관하는 책임을 다했으며 지금 다윗의 성으로 궤를 운반하는데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잘못은 하나님의 궤가 망가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뿐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모인 이상황의 모든 사람이 나름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궤를 운반했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충격적인 웃사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모든 노력이 낳은 것은 웃사의 죽음이라는 안타ᄁᆞ운 열매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습니까?
이 모든 문제는 바로 궤를 운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새 수레에 궤를 운반했습니다. 그리고 소들이 그 수레를 끌게 했습니다. 이 방법은 잘못된 방법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궤의 운반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0:8절 말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신 10:8, 개정)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출애굽기 25:14-15절에도 궤에 대한 규례를 주고 있습니다.
(출 25:14, 개정)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출 25:15, 개정)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
그들이 새 수레에 궤를 싣고 소가 수레를 끌게 하는 것은 그 당시 아주 실용적인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지금으로 이야기 하면 포터 새 차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뒤에 짐칸에 궤를 싣고 운반하는 것입니다. 왜 미련하게 그것을 어깨로 맵니까?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 아닙니까? 더욱 편하고 빠른 방법이 있는데 말이지요. 이것을 사용해야지요.
더 나아가 이것은 실용적인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방법은 바로 세상의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가지러 간 바알레유다, 다른 이름이 무엇이라고요? ‘기럇여야림’은 바로 약 50년 전 언약궤를 빼앗겼다 돌아와서 안치된 장소입니다. 약 50년전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자신들의 전쟁을 위해 언약궤를 이용했습니다. 그 때 블레셋에게 패하고 언약궤를 빼앗기게 됩니다. 기억하시죠? 언약궤가 있는 도시마다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게 됩니다. 7개월간 블레셋은 버텨보지만 도저히 심해서 버틸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그때 블레셋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어미 소 2마리에게 수레를 끌게 하고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벧세메스로 보냅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의심하여 새끼를 가진 어미소가 벧세메스까지 곧장 가는 것을 시험하고 곧장 가는 것을 보고 그들은 돌아가고 언약궤는 돌아왔습니다.
수레에 실어 언약궤를 운반하는 것은 블레셋의 방법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이방인들은 중요한 절기에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수레에 실어 행진시킴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을 적어도 1년에 한 번 정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즉 다윗과 아비나답 집의 사람들은 경험에 의존한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려 했던 것입니다. 더욱 더 웃사는 하나님의 성물인 언약궤에 손을 대는 엄청난 짓을 해버리고 맙니다. 성물에 대한 경고에 대해 민수기 4:15절에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민 4:15, 개정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결국 웃사의 충격적인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의 결과였습니다. 언약궤를 운반하던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누구도 대충 운반에 참여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3만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은 소집했고 그 언약궤를 직접 기럇여야림까지 가지러 갑니다.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 악기를 연주하며 행차를 기뻐합니다. 웃사도 그는 언약궤를 지키기 위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없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곳에 사람들의 최선의 방법, 편리하고 빠른 이 세상의 최신의 방법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해봅시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섬깁시다.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방법,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섬겨야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의 방법입니다. 사람의 방법은 대부분 자기에게서 나옵니다. 세상의 가치와 풍조, 사상에서 나옵니다. 나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나로부터 열심히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돈을 헌금하면 기뻐하십니까? 그래도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천만에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동냥이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 아니면 헌금을 자식들 잘되게 해주는 수익률 좋은 주식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헌금에 오히려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감사 없는 헌금, 그 액수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결코 받지 않으십니다.
오늘 전도주일로 지켰는데,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데려오면 좋아하실까요? 아닙니다. 비록 오늘 나오지 못했지만 그 이웃을 품고 항상 그를 불쌍히 여기며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많이 기도하시면 좋아하실까요? 많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의를 구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많이 봉사하면 좋아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열심히 아닌 성령으로 봉사하길 원하시며, 이 작은 섬김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온전히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봉사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방법, 생각, 경험, 세상의 가치를 버립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섬길 때 그 섬김은 온전한 섬김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마지막입니다. 오늘 다윗 왕의 근본적인 실패는 바로 그도 하나님의 궤를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다윗 왕이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 바로 첫 번째 행동한 일이 뽑은 무리 3만명을 다시 모았다고 합니다. 이 3만명이라는 숫자는 삼상 4:10절에 50년전 언약궤를 이용하여 블레셋에게 승리하려 했을 때 전쟁에서 죽은 병사의 수가 3만명이었습니다. 이 3만명이라는 숫자는 그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더군다나 언약궤의 문제에 있어서 다윗은 바로 전과 달리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언약궤를 운반하려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악기로 연주하는 모습은 사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5절에서 연주하다라는 동사는 ‘메사하킴’이라는 단어는 보통 모두가 즐기는 축제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연주했다는 것은 이 언약궤를 가져오는 일이 한 다윗 왕 아래에 가족처럼 묶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이처럼 다윗이 언약궤를 운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인간적, 정치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주로 북방 지파, 즉 남유다를 제외한 지파에게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주로 언약궤는 길갈, 벧엘, 실로 등 주로 북방 지파의 거점도시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언약궤를 중심으로 종교 생활을 했습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의 성소에 가지고 옴으로써 북방 지파를 더욱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되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기대가 웃사의 죽음을 통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반응을 보십시오. 8-10절 말씀입니다.
(삼하 6:8, 개정)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삼하 6:9, 개정)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 6:10, 개정)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했다.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 웃사가 죽자 자기에게로 메어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다윗의 이런 반응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언약궤를 운반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해봅시다. 하나님을 이용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위해 삽시다.
여러분 다윗이 다시 언약궤를 메어올 때 모습을 보십시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13-14절 말씀입니다.
(삼하 6:13, 개정)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삼하 6:14, 개정)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궤를 메었고 그는 축제처럼 악기 가지고 연주를 하기보다는 이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궤의 운송을 자신을 위한 축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예배로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가 들어올 때 왕의 모든 체면을 내려놓고 그가 힘을 다하여 춤을 춥니다. 이 모습은 그가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시며 그분이 성에 입성하시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노라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하인 다루듯 내 뜻과 소원 성취를 도와주는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이익과 목적 추구의 조력자가 아니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상과 똑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우상을 섬깁니까? 왜 수능 날만 되면 절간에 사람이 그득합니까? 다 나를 위해서지요. 나와 내 자식을 위해 신을 이용합니다. 철저히 신앙이 나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어떠합니까? 나를 위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내 구원을 위해, 나 천국 가는 것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십니까? 나한테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조금만 다른 길로 인도해도 참지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꼐십니까?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닌,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을 거둬가셔도 여전히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얼마 전 다니엘 기도회에서 오은주 집사님의 간증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이관희 집사님의 부인으로 간증을 하셨습니다. 인간극장에도 나오셨고, 교회 오빠라는 제목으로 영화도 개봉했었습니다. 이관희 집사는 딸을 출산한 후 한달이 안되어 대장암 4기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곧 아내도 혈액암 4기를 판정받습니다. 30대 두 부부가 아이를 낳고 겪었던 고난이었습니다. 그리고 투병생활 중 어머니의 자살. 이 모든 고난 가운데 그는 이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눈부신 삶을 사는 사람을 증거로 삼기도 하지만, 고통 속에서 주님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도 증거로 삼으신다” 고백합니다. 그의 관심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증거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게 하옵소서, 나를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인생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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