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돌보는가?

사무엘하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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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삼하 7:7-17
제목 : 누가 돌보는가?
오늘은 ‘누가 돌보는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요즘 김장철인 것 같은데, 김장은 다 하셨는지요. 많은 성도님들이 김장을 하고 비록 자녀들이 분가했지만 자식들을 돌보고 챙기기 위해 김장을 하고 김치는 나눠주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저희 할머니도 이번 주말에 김장을 하신다고 하시더라구요. 부모에게 자식은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아이 같은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시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자신의 자녀 된 성도들을 돌보십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심을 확신하며 돌아가는 시간되길 소망합니다.
2주가 되어서 한번 다시 전 문맥을 돌아보겠습니다. 지난번에는 다윗이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들여오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은 3만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언약궤를 가지로 갔습니다. 하지만 인간적 열심과 세상의 방법을 통해 언약궤를 운반하려 했을 때 그 결과는 바로 웃사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또 한 가지는 다윗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언약궤를 이용하려 했었습니다. 그는 웃사의 죽음을 통해 깨닫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영광 돌리며 그분을 진정 기뻐하며 춤을 추며 언약궤를 들여왔습니다. 이번 한 주간의 삶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오직 삼위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우리의 삶이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7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다윗 언약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고 궁에서 편안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 왕은 선지자 나단을 부릅니다. 그에게 하는 말은 2절 말씀입니다.
(삼하 7:2, 개정)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하나님의 궤를 들여온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나는 이렇게 멋진 백향목 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장막 가운데 있다면서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휘장은 장막 즉 텐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텐트 안에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성막. 장막, 휘장 이것은 언제 생긴 것입니까? 바로 출애굽기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막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궤가 안치되었습니다. 40년의 광야생활에서 이 성막은 항상 이스라엘 진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왜 성막을 텐트로 지었을까요? 쉽게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은 정착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인도하면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텐트형태로 되서 걷고 다시 치고 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텐트 형태로 만들 것을 명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광야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아주 좋은 백향목으로 지은 성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는 여전히 텐트 속에 있습니다. 이를 보고 다윗은 자신의 상황이 너무 송구스러워서 나만 백향목 궁에 사는 것이 죄송하여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 싶음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다윗의 생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나도 귀한 생각 아닙니까? 자신이 사는 화려하고 안락한 궁전과 궤가 거하는 누추한 장막을 비교하며 하나님께 아주 귀한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는 생각. 아주 기특한 생각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다윗에 의견에 나단 선지자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3절 말씀입니다.
(삼하 7:3, 개정)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칩니다. 왕에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상황은 예전과 너무나 다릅니다. 지금 더 이상 불안한 신세가 아닙니다. 양을 치던 목동의 때도 아니구요, 사울에게 쫓겨 이곳저곳 다니는 방랑자 신세도 아닙니다. 지금 그는 온 이스라엘의 왕이며, 지금의 이스라엘은 주위 어떤 국가보다 막강합니다. 쉽게 말하면 꽤나 잘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송구스러워 하나님께 합당한 성전을 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기특한 다윗의 마음은 나단 선지자도 동일한 마음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에게 말씀으로 임하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삼하 7:5, 개정)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가서 다윗에게 말하라 “니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짓겠느냐?” 다윗이 하나님에게 품은 아주 기특한 생각에 하나님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다윗의 생각은 철저히 하나님을 오해한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신전 혹은 인간이 만들어준 거처에 사는 신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 당시 고대인들은 인간이 집에 살 듯이 신들도 신의 집, 즉 신전에서 산다고 믿었습니다. 거기다 우상을 만들어 갖다놓고 제사장을 고용해 날마다 공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방신들처럼 신전에 앉아 대접 받길 원하는 신으로 오해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장막과 성만 안에서 다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신전과 반대되는 개념인데, 신전은계속해서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시고그들을 통치하시며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에게 다윗은 세상에서 잘나갈 때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드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오해에 비롯한 인간적 돌봄을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두 가지 인데,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집”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위하여”라 한 것은 진짜 나를 위해 짓기 원하냐는 것입니다. 그 당시 왕이 신전이나 건축물을 짓는 것은 왕에게 큰 업적과 영광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왕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용어 바로는 ‘파라오’ 즉 태양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왕이 죽으면 사후 세계에서 살아나며 그가 거할 궁전을 지어주는 의미로 피라미드를 지었습니다. 지금 이집트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인 쿠푸왕 피라미드는 2.5톤 돌 300만개로 높이 146m의 피라미드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많은 건축물들을 지은 왕들은 아직도 그들의 이름을 남기며 건축물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건축물들은 왕의 업적과 영광이 되었습니다.
지금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진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신전을 짓길 원했을까요? 아니면 자기 영광과 업적을 위해 이런 건축물을 짓길 원했을까요? 본문엔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의 질문으로 볼 때 그렇지 않아보입니다. 그가 진정 하나님을 위해 짓길 원하는 마음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대접받길 원하실까요?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대접하면 그분에 걸맞는 대접을 할 수는 있습니까? 결코 못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대접과 섬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반대되는 우상들을 한번 보십시오. 우상은요 시작 자체가 인간의 손으로 형상을 만듭니다. 매일 인간이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먼지도 털어드려야 하고요 절기마다 직접 들어서 직접 행차도 시켜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상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 대접,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의 영향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과연 조상 신이 우리에게 복과 화를 내릴까요? 그런 능력 있는 신일까요? 왜 그런 능력 있는 신에게 사람이 먹을 것을 차려줍니까? 자신이 찾아 먹을 능력이 없습니까? 아니면 꼭 제삿밥을 먹어야 합니까? 꼭 정성을 받아야 합니까? 아니 자기 자손들인데 그냥 복좀 주면 되잖아요. 너무 쪼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이런 우상 취급하시면 안되요.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전에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십니다. 무소부재라고 하지요. 온 우주에 충만히 거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언가가 필요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광 돌려야 그분이 영광스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충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하나님을 이방신 취급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돌봄과 우리의 헌신과 우리의 재물과 무언가가 필요한 존재처럼. 마치 내가 선심을 쓰며 하나님이 무언가 결핍된 존재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장막 안에 거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다윗이 자신의 백향목 궁과 장막을 비교하며 하나님을 위해 신전을 지어드리겠다는 것은 자신은 좋은 곳에 사는데 하나님은 저런 곳에 사네 하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에게 이렇게 대답하시죠. “니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짓겠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한번 따라 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지 우리가 하나님을 돌볼 수 없는 거에요. 이것이 다윗에게 명확히 하신 대답입니다. “내가 너를 돌본다”
오늘 본문인 사무엘 하 7장은 유명한 다윗 언약이 나오는 장입니다. 8절부터 쭉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 말씀하십니다. 8절 내가 너를 목자에서 왕으로 세웠다. 9절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너와 함께 했고 원수를 멸하며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겠다. 11절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겠다. 12절 네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겠다. 13절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 16절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말씀하십니다.
누가 누굴 돌봅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돌보시죠. 다윗 왕은 자신이 이제 왕의 자리 앉고 평안하고 잘나가니 무언가를 하나님께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고쳐주십니다. 너를 왕으로 세우고 여기까지 인도한 것이 누구인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너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돌보시며 은혜를 베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왕이 된 사람입니다. 저와 지금까지 다윗이 어떻게 기름 부음을 받고 어떤 삶을 거쳐 왕이 되었는지 살폈습니다. 아버지도 주목하지 않은 목동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사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는 고난의 세월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십니다. 아기스 왕 앞에서 살아남으려고 미친척을 했던 시절, 어쩔 수 없이 블레셋으로 망명하여 비참한 삶을 살았던 시절, 이런 다윗이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누가 그를 돌보셨습니까? 누가 지금도 그를 돌보십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십니다. 다윗 왕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다윗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집을 짓겠다는 것을 11절에 보면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겠다 말씀하십니다. 니가 나를 위해 집을 짓는게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짓겠다 하십니다. 여기서 집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궁전이 아니라 바로 다윗의 왕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를 지으시고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엄청난 복을 주신 것은 다윗 왕국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통치가 구속사에 중요한 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다윗의 왕조를 통해 이 땅에 실현됩니다. 이 다윗의 왕조에게 허락하신 복은 다윗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위한 복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백성의 복은 바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무엘 하 7장에 나온 다윗 언약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까지 연결됩니다. 실제로 다윗 왕국은 B.C 586년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포로로 백성들이 잡혀갑니다. 이 다윗의 왕조의 영원한 언약은 바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참된 왕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시키십니다. 이제 곧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성탄절로부터 4주전 오늘 주일이 바로 교회절기로는 대강절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소망하며 기다리는 절기이죠. 즉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결정적인 증거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 언약의 성취이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고 이 나라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들은 왕 되신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이 확실한 증거는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심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위해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우리가 잘못했다고,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내팽게치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만 의심합니다. 내가 좀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부끄러운 모습을 보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 맞나 의심합니다. 때로는 너무나 큰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 살아계십니까? 하나님 나를 돌보고 계십니까?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 생깁니까? 이런 원망 섞인 말들을 쏟아 냅니다.
이런 마음이 드실 때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나 때문에 내어주셨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10달 동안 품고 해산의 고통으로 낳은 자식을 조금만 잘못하면 가차 없이 내팽개치는 부모입니까? 우리도 안 그러는데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실까요?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다윗에게 내가 너의 돌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돌보고 은혜를 베푼다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이 언약을 받은 이후 그릇된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께서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게 하심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최선을 다해 성전에 필요한 모든 자제들과 재료들을 준비합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돌보는 자로 성전 짓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돌리며 감사로 성전 짓는 것을 준비합니다.
그의 고백은 역대상 29장에 등장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이렇게 반응해야 합니다. 10-1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으며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대상 29:10, 개정)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대상 29:11, 개정)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대상 29:12, 개정)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13, 개정)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대상 29:14, 개정)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대상 29:15, 개정)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대상 29:16, 개정)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대상 29:17, 개정)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찬양하며 아버지께만 영광 돌리는 이 한주간의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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