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베드로전서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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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앞 절인 12절에서 이 세상 속에서 나그네 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강조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선한 행실을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성도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선한 행실을 할 수 있습니까?
선한 행실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구제나 봉사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런 것들을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지키는 정당한 법입니다. 이 사회 속에 사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지키면서 살아가는 기본적인 법, 양심적인 법, 공정한 법들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칭찬하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포츠경기를 본적이 있을 겁니다. 스포츠경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페어플레이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는 규칙을 잘 지키면서 경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페어플레이하지 않는 선수들은 그 순간은 이겼을지 몰라도 동료의식이 없는 선수라는 비난을 계속 받습니다.
교회는 어떠해야 합니까?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규칙을 지키면서, 이겨야 나중에 당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한 경기장에서 경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정을 무시하고, 상대방에게 파울을 남발하면서 승리한다 해도 그 승리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인 13절을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해보면 “인간들에 의해 인정된 모든 창조 질서에 주를 위하여 순복하십시오”라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제도”로 번역된 단어는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는 대부분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 혹은 질서”를 뜻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하여”라는 문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세상의 어떤 인간의 제도나 통치 영역도 주되신 하나님의 통치권을 벗어나는 영역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권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며 폐하시기도 합니다. 세상 정부의 권력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권력 아래 있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순종”한다는 말은 권위의 최종적인 정점에 계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또 그분에게 의존하는 질서를 받아들이고 따름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설령 청종할 마음이 없고 마음으로 내키지 않더라도, 최종적인 권위자인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허락된 권위 아래에 기꺼이 자신을 두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지만 세속 정부가 정당하고 공의롭지 못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4절에서 베드로는 명확하게 세속 정부의 권력 행사가 ‘악행을 징벌하고 선행을 장려하는’ 도덕적 권위의 제한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최고의 권위인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또한,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순종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혁명적인 순종입니다. 분별력 있는 순종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순종해야 할 분이 하나님 한 분뿐임을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예배당 건물 밖 세상 권력도 주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치유와 회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종교적 우월감이나 비판이 아니라, 정직과 거룩함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세상은 탐욕과 무지, 거짓과 부패로 이끌려 갑니다. 그때 우리는 선지자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거꾸로 교회가 세상 권력이나 일반 시민들이 지키는 상식적인 법을 어기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기준에도 못 미치는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일 자체를 명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모든 일을 시간이 지나면 더욱 세밀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거칠게 분석해본다면 정인이 사건이나 BTJ 열방센터와 IM선교회의 코로나 집단감염에 개신교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들과 다르다며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거짓, 이기주의는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안에 있는 교묘한 죄성을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속은 참 더러운데 거룩한 척하고, 나의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배려하는 척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할 때가 참 많습니다.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교회의 부흥과 성장만큼 하나님의 영광에 신경을 쓸까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그분의 영광에 관심이 있을까요?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교리를 철저히 지키고 행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삶으로 드러내라고 합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선한 행실들’을 실천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복음의 강력한 증거는 교회가 그들 속에서 보여준 선한 행실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16절에서 우리에게 자유가 있으나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목적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웃을 섬길 자유입니다. 사랑할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마음대로 죄를 짓고 다시 용서받으라는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또한, 악을 가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가리다’는 말은 밑에 놓여있는 것을 그대로 두고 그 위를 보이지 않게 덮어씌우는 행동을 말합니다. 마치 진실을 가리기 위한 연막 같은 것입니다. 교회나 성도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세상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인데, 그런 악을 덮어씌우고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자유를 들먹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은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악은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회복이 일어납니다. 악취 나는 악을 그대로 엎어 둔다면, 애정이 어린 주변의 가르침에 귀를 닫아버린다면, 악을 키우는 것이고, 영육 간에 사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자유를 내팽개쳐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16절에서 ‘하나님의 종과 같이하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사야 40~66장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종,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고난받으신 어린양으로 고난의 길, 소명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뒤를 쫓아갑니다. 우리는 영광의 땅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인내하며 주님과 함께 가야 하는 길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한 질서에 순복할 줄 아는 법부터 배우라고 합니다. 17절에서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고,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권자를 존중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존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존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가치관이나 인종과 국적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먼저 그들을 존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은 세상 사람들 또한 존중하고,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하며, 세상 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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