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함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

저녁예배설교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1 views
Notes
Transcript
설교
서론
시편 36편은 우리에게 ‘가득함’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악인의 죄악을 말하며, 하나님의 인자를 말하고 그 인자의 출처를 말씀합니다.
함께 말씀을 살펴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득함을 알고, 하나님의 가득함을 알고, 성전의 가득함을 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1. 우리는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함을 알아야 합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 말씀은 죄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말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악인에게 어떤 말을 속삭이고 있을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두려움은 ‘경외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공포, 무서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경외가 없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죄악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은 언제나 하나님은 없으니 하나님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속삭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속삭임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절에서 ‘이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하실 때, 쓰이는 말입니다.
즉, 악인의 마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죄악의 ‘계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계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처럼, 악인들이 죄악을 믿고 따르도록 계속해서 속삭이며 죄악의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죄악의 속삭임에 빨려 들어갑니다.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이제 그는 자화자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2절처럼 말합니다. 2절은 2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내 죄를 알수 없다 당연히 미워할 수 없다.
두 번째는, 난 잘못한 게 없다. 그러니 고칠 것도 없다
시인은 2절에서 의도적으로 이런 2가지 해석이 가능하도록 적었습니다.
죄악의 계시를 따르던 그는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또한 스스로를 긍정합니다.
자신은 언제나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죄악 속으로 빠져버려, 무엇인 선인지 악인지 구별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이제 3절은 악인 속에 있는 죄가 어떻게 사회에 퍼져나가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소위 뼛속 깊이부터 죄악으로 물들게 되었습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상태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죄악은 넘치게 됩니다.
악인이라는 한 사람을 가득채운 죄악은 넘쳐흘러서 사회를 채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3절은 ‘사기와 속임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 나오는 죄악과 속임이 나타내는 뜻이 방금 말씀드린 ‘사기와 속임수’입니다.
이것은 하반절에 나오는 지혜와 선행과 대비되고 있습니다.
물론 악인은 자신의 지혜와 선행을 자랑합니다. 왜냐면 2절에 나왔듯이 그는 스스로 매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선행도 지혜롭게 해야하는 거라고 자랑하고 다닙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자신이 한 일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스스로 말하길 약간의 ‘편법’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결코 속임수라 하지 않습니다. ‘편법’이란 말도 하지 않습니다. ‘세상사는 지혜’라고 말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점점 그 ‘세상사는 지혜’가 사회를 물들어갑니다. 그 ‘지혜’를 활용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은 더 이상 자신의 죄악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악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악인은 이제, 자신의 침상, 쉬고 노는 시간에도 악을 골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침상에서 악을 꾀하는 악인’의 모습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의인’의 모습과 완전히 상반됩니다.
의인이 오늘 하루를 지키셨던 하나님을 묵상하며 감사하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릴 때,
악인은 자신이 ‘세상 사는 지혜’로 처리했던 일들을 지키기 위해 더욱 큰 악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는 악한 길에 이미 서있고, 계속 악한 길에 서있기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없다하며 무시했던 악인은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실상은 악이 그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침상에서조차 그는 악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가득한 악이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공간까지 침투해있음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편안함이 분명히 있습니다. 즐거움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세상은 기본적으로 죄악으로 가득함을 분명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빠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존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천지에 가득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인간사회는 악으로 이미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가득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5절은 땅에 가득한 악에 지쳐있는 우리를 향해 하늘의 모습, 천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늘’과 ‘공중’이 평행으로 같이 쓰이면, 그냥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군천사들이 거주하는 천상, 천국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는 악이 가득하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가득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땅은 어두운 것 같지만, 온 세상의 중심에 계시는 하늘의 보좌에서부터
하나님의 성실하신 인자는 변함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5절은 그저 주님의 인자가 천상에 가득하다고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힘겨워하고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보좌에서 넘쳐흐르는 성실하신 인자는 변하지 않음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천군천사들은 그 성실하신 인자에 힘입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찬양, 끝없는 찬양을 하늘의 하나님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드리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일까요? 죄악으로 가득한 이 땅과 대비되는 천국의 모습을 우리에게 선보임으로써,
우리는 저 천국을 소망하며, 멍에를 지는 소와 같이 힘겹게 이 땅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6절이 있는 것입니다.
5절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천군천사들이 원을 그리며 찬양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면, 6절은 한걸음씩 앞으로 행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향해 행군해 오고 있습니다. 저 멀리 있어 우리와는 상관없어 보이던 하나님의 의가 태산과도 같이 장대하게 우리의 앞에 서있습니다.
저 멀리 바다너머에서 찰싹거리던 물결같던 하나님의 심판이 어느새 해일이 되어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이 땅은 악으로 가득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행진하심 앞에 그 모든 악의 요새들은 무너지고, 태산과도 같고 대양과도 같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감싸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어리석다 조롱받았던 우리의 마음, 상처 입었던 우리의 모습 전부를 하나님은 얼싸안고 싸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자가 보이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의 의는 세상과 거리가 먼 것 같지만,
분명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사람만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통해 그 성실하신 인애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저 천국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곳이 하나님의 인애로 가득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잠시 우리가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죄악으로 인해 그 인애가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지만,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은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을 덮으시는 해일처럼, 홍수처럼 우리를 덮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3. 우리는 천지에 가득한 주의 인자하심이 성전을 통해 흘러나옴을 알아야 합니다.
7절에 ‘보배롭다’라는 말은 ‘희소하기 때문에 최고로 값지고 비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가장 값지고 보배로운 것은 맞지만 희소하지는 않습니다.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희소한 사랑 어떻게 천지를 가득 채우게 되었을까요. 주의 성전으로부터 주의 인자하심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7절에 보듯이 그를 아는 자들은 그 인자를 얻기 위해 주의 날개그늘로 피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인생 중 높고 낮은 자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합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아는 자들은 주의 날개그늘 아래로 피한다는 뜻입니다.
왜입니까. 주님의 날개그늘, 주의 집, 바로 성전에서만 주의 인자하심과 빛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주의 집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8절은 주의 날개그늘, 주의 집으로 피한 자들이 누리는 복락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풍성한 식탁을 누리게 됩니다. 살찐 것으로 풍족합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차려준 풍성한 잔치상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피난처삼아 온 우리에게 이런 풍성한 축제 한마당을 열어주십니다.
특히 8절 하반절에 나오는 복락의 강물을 직역하면 무엇인줄 아십니까.
‘에덴의 강물’입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쫓겨났던 그 에덴입니다. 사람은 다시는 마실수 없다고 여겨지는 에덴의 강물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마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의 집, 성전에서 우리는 어떤 음료보다 달콤한 에덴의 강물을 마십니다. 성전에서 그 무엇보다 맛있고 풍성한 음식으로 배부를 것입니다.
또한 주의 집은 생명의 원천이 있는 곳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생명의 샘이 있는 곳입니다. 이 생명의 샘은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보다 가치롭고 풍성하며 활기차게 합니다. 샘에서 쉼없이 물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주님께서 넘치는 생명력을 끊임없이 주신다는 뜻입니다.
9절 하반절을 의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환히 열린 앞날을 봅니다.”
우리가 성전 안에 있고, 주님의 빛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앞길이 활짝 열림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주님이 계신 곳, 주님의 성전에서부터 주의 인자하심을 흘러나옴을 알고 주님의 성전을 사모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지금 우리는 모여서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코로나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큰 사명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는 이 자리를 성전으로 만들어갈 사명입니다. 우리의 남부민중앙교회를 에덴의 강물이 흐르는 주님의 성전으로 만들어갈 사명입니다.
그를 위해 먼저,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함을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하나님의 성실하신 인자가 넘치도록 덮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넘치는 인자가 주의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옴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있는 자리를 주의 성전으로 만들어가며, 우리가 모인 곳에 에덴의 강물을 나눌 수 있는 복락을 누리는 우리 남부민중앙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다함께 기도하실 때,
1. 언제나 주의 성전을 사모하게 하소서.
2. 우리가 있는 자리를 주의 성전으로 만들어가게 하소서.
3. 그래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에덴의 강물을 마음껏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