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젖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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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론
오늘 본문은 베드로전서2장의 말씀입니다.
[벧전 2:1]에서 “그러므로”라고 말하면서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절)
고 말씀합니다.
[벧전 1장]에서 영적인 출생에 대해 말했다면,
이제는 자라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에는 말도 못하고 누워 있기만,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시작하게 되고, 서기도하며 걷고 뛰기도 합니다.
지적 수준도 아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똑똑해집니다.
그렇습니다. 태어나면 당연히 자라야 합니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구원받고 나서 영적인 상태가 전혀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이 뭘까요? 그래서 오늘 자란다는 것에 대해 3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거룩함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자라야 한다는 것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엡 4:15]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살후 1:3]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골 1:10]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가게 하시고”,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벧전 2:2] 보면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자라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것은 태어나면 자라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를 닮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자란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주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벧전 2:1]에서는 먼저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말씀을 사모하라고 말하기 전에 이것들을 먼저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독”은 모든 악을 품는 것이고,
“기만”은 남을 속이며 거짓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외식”은 마치 내 안에 좋은 것이 있는 것처럼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시기”는 남의 좋은 것을 원하는 욕심입니다.
“비방하는 말”은 입술로 짓는 죄입니다.
그리고 각 단어마다 붙어 있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이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해서 모든 악한 것들에서 벗어나서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악한 것에서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악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 거룩함으로 나아갈수 있겠습니까?
벧전 1:14-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 1:14~15]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우리가 거룩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욕, 우리 속에 있는 죄를 먼저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부모가 좋은 음식을 주어도 배가 부르다면, 그 음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속에 죄악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대표적인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은 외식했습니다. 기만과 거짓을 일삼았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말씀을 따라 거룩함으로 자라날 것입니까!
그러니 말씀을 따라 우리가 거룩함으로 자라나가야 할줄 믿습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신령한 젖을 사모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가 있던 자리, 그러나 이제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진 그 자리를
하나님으로 채워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존을 택한 자이기도 합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나는 지금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교회에 갈 생각이 없다.
교회는 약한 자들이 가는 곳이다.
네, 맞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함을 인정한 자들입니다.
이 험한 세상을 내 두발로 꼿꼿이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기대기를 택한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신령한 젖이 필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를 위해 본문은 우리에게 강하게 명령합니다. ‘사모하라’라고 명령합니다.
이 사모하라는 매우 강한 갈망을 나타냅니다.
너무나 간절해서 자신의 몸이 상하기까지 갈망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우리가 잘 아는 구절에서 이 단어가 쓰입니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즉, 이 ‘사모하다’라는 말은 마음과 몸이 상할정도로 갈망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가 요즘 아기들, 아이들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애들, 밥을 먹이면 잘 먹습니까. 심지어 이제 이유식 먹기 시작하는 애들도 젖을 잘 안 먹습니다. 맛있는 것만 먹습니다. 젖, 모유를 떼기 전에 다른 것을 주면 그걸 먹으려고 합니다. 정작 젖은 잘 안먹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야채 싫다. 고기, 사탕, 빵등등 자신의 입에 맛있는 것만 먹으려고 합니다.
우리역시 그런 상태는 아닙니까. 우리 입에 맛있는 말씀만 먹으려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말씀을 사모함을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갓난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같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되줄 믿습니다!
물론 이 사모함은 쉽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입에 맛있는 말씀만 먹으려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멍에를 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배우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멍에는 무엇입니까 - 소나 말이 밭일을 하기 위해 메는 것입니다.
그냥 짐보다 당연히 무겁습니다.
사람이 지는 것이 아니니 훨씬 더 불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짐’이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멍에’라 말씀합니다.
무겁고 불편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보기에는 짐승이 지는 것을 왜 사람이 지냐고 조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멍에’를 메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 멍에를 메고 예수님 자신에 대해 배우라 하십니다. 그리하여 멍에의 원주인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길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쉽고 편한 길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좁고 험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더욱더 하나님을 사모하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갈구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지를 나 자신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짐승이 메는 멍에를 지고 세상에서 나그네길을 가야 함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령한 젖을 갈구하는 성도님들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사모하는 이 젖은 순전하다고 말씀합니다.
이 표현은 1절의 모든 죄악과 완전히 상반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만이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2번밖에 쓰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본문이 롬12:1 입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영적’이라는 단어가 ‘신령한’과 똑같은 말입니다.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구원의 그날, 하나님앞에 잘했다 칭찬받는 날까지 우리를 자라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몸과 마음이 상하도록 갈망하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맛보았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이미 많은 음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에 좋지 않다고 우리가 빵같은 내게 달고 맛있는 것들을 먹지 않습니까. 잠시 끊을 수는 있지만 영원히 멀리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신령한 젖을 맛보았음을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이전에 하나님을 만난 경험들을 다시 상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고난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날 구원하는 구세주시구나라고 느꼈던 그 순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혹시 이런 은혜의 기억이 없으신 분은 속히 이 은혜를 경험하기를 정말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모든 은혜와 인도하심은 거저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맛본 것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6:4-5입니다.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우리가 맛본 것은 하늘의 은사, 하나님의 선한 말씀, 내세의 능력, 성령의 참여한 바입니다. 눅14:24에서는 큰 잔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천국잔치를 맛볼 것도 말씀하십니다. 좋은 것들만 모아서 우리에게 맛보여주셨습니다.
이에 비해, 이렇게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무엇을 맛보셨습니까.
히2:9 하반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우리가 좋은 것, 하늘의 은사, 천국 잔치등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고난을 맛보셨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맛보여주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바로 이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세상에 맛있는 것, 좋은 것 참 많습니다.
그에 비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참 단순하고 별게 아닌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순전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가 배합된 세상의 맛에 비하면 부족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 우리를 살리며,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인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를 위해 세상에서의 모든 악독과 죄악에서 떠나기 바랍니다.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이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우리모두를 뒤덮고 있지만 이것은 한때의 소나기처럼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세대에는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변하지 않고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젖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곁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 함께 거룩함으로 자라가는 우리 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많은 것들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자라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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