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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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Ἀποθέμενοι οὖν πᾶσαν κακίαν καὶ* πάντα δόλον καὶ* ⸀ὑποκρίσεις καὶ ⸁φθόνους καὶ ⸂πάσας καταλαλιάς⸃* 2 ὡς ἀρτιγέννητα βρέφη τὸ λογικὸν ⸆ ἄδολον γάλα ἐπιποθήσατε, ἵνα ἐν αὐτῷ αὐξηθῆτε ⸋εἰς σωτηρίαν⸌, 3 ⸀εἰ ἐγεύσασθε ⸆ ὅτι ⸁χρηστὸς ὁ κύριος.*
1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뒷수작과 위선(연기)과 시기와 모든 중상모략을 벗어버리고(부과중분복주남)
2 갓난아기들처럼 그 영적인(합리적인) 완전한(순수한) 젖을 갈망하라(부과능명2복) 그 결과 그(젖)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너희가 자라나게 될 것이다(부과수가2복),
3 만약 너희가 맛보았으면(부과중직2복) 그 주의 선함을.
순수한 동사는 ‘갈망하라(사모하라)’뿐이다.
‘영적인, 신령한’의 뜻은 매우 사려깊은 생각이다.
순전한의 뜻은 순수한, 완전한이라는 뜻이다.
갓난아가처럼 사모하라.
처음 은혜를 경험한 그 순간.
성경이 꿀송이보다 달게 느껴지던 그 순간.
악독 : 관계를 파괴하는 force
기만 : 속에는 나쁜 마음을 품고 말하는 것. 구밀복검 -> 예수님을 죽이는 대제사장들이 한 짓(겉으로는 백성들을 의식해서 잘 대하는 척하지만 뒤로는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한 것처럼)
외식 : 가짜로 하는 것. 말과 행동이 다른 것(말씀은 잘 아는 것같지만 삶은 전혀 다른 것), 교회에서의 모습과 집과 회사의 모습이 다른 것.
시기 : 기만과 외식에서 나오는 것. 신약전체를 통해 자주 옛 습관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Matt. 27:18; Mark 15:10에서는 대제사장들의 시기가 예수님을 십지가에 못박았음을 말씀한다. 교회에서의 불화와 편가르기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없는 것이다.
비방하는 말 : 시기가 밖으로 표출될 때, 비방하는 말이 나온다. 우리가 이 비방을 당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는 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고발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비방한느 말을 했기 때문이다.
1절의 모든 악덕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들이다.
우리가 이런 죄를 짓는다면, 우리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는 셈이다.
유명한 찬양 가사에 있듯이
십자가를 보기위해서는 먼저 세상을 등져야 한다.
약 4:11 의 말씀처럼, 비방하는 자는 율법을 판단하는 자, 곧 하나님의 위치에 서는 자다.
이렇듯, 모든 죄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거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 연결된다.
1절의 모든 악덕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박은 것들이다.
우리의 선택은 그러므로 둘중 하나다.
십자가에 바힌 그리스도앞에 무릎꿇고 경배할 것인가.
아니면 제사장들과 함께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런 죄에서 등을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항상 선입견을 가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선입견은 내 형제 자매가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구원받은 자라는 선입견 뿐이다.
그 외는 버려라.
둘째,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그러나 죄에서 등을 돌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죄가 있던 자리, 그 빈공간을 그리스도로, 성령으로, 말씀으로 채운 자들이다. 선으로 채운 자들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완전히 다 채운 것이 아니다. 채워가는 자들이다.
우리는 독립이 아닌 의존을 택한 자들이다. 하나님께 기대기를 택한 자들이다. 이 험한 세상을 내 두발로 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기대어 가길 택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아기같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우리에게 본문이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사모하라’는 것이다.
아기가 엄마 젖을 달라고 울듯이, 굶주린 아기가 손가락이라도 빨듯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신령한 젖을 구하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세상을 버린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다시 채워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수동적으로 먹여주길 기다리는 것은 아기가 아니다.
우리는 요즘 애들이 되고 있다. 아무리 밥을 먹일고 해도 먹지 않는 아이들이다.
밥보다 사탕, 과자를 좋아하고 찾는 아이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모해야 하는 것은 신령한 젖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미 젖을 뗐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의 젖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아니다.
이 젖은 순전하다. 완전하고 순수하다는 뜻이다. 부족하고 약한 부분을 덮고 회복시킨다는 뜻이다. 튼튼하고 건강하게 한다는 뜻이다.
완전하고 순수하다는 것은 1절에서 나온 모든 악덕들의 반대되는 특징이다.
1절의 모든 죄악들은 ‘앞뒤가 다르다’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령한 젖은 순전하다. 앞뒤가 같다. 이 젖은 오직 우리를 튼튼하게 하고 자라게 하고 살리는데만 목적이 있다.
그리고 이 젖은 ‘신령하다’ 이 단어가 쓰인 다른 부분은 롬 12:1 뿐이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예배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이 되고 싶은가.
그리고 되어야 함을 아는가.
그렇다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 이 말씀만이 우리를 살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날까지 우리를 인도한다.
셋째, 우리가 ‘자라야함’을 인지하라.
아기는 젖을 먹으면 자연히 자란다. 젖이 아니라 다른 것을 먹어도 자라긴 자란다.
아이가 되어, 불량식품만 많이 먹어도 자라긴 자란다.
그러나 점점 약하게 된다.
본문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라고 한다.
성장은 한계가 있다. 어느정도 자라면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
사람마다 성장의 정도도 다르다. 키도 다르고, 약한부위 강한 부위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자라가야 한다. 이것을 분명히 인식하라.
그를 위해 신령한 젖을 먹음을 기억하라.
우리가 자라나야함을 머리에 둬야 하는 이유.
고난이 찾아옴.
자라남을 생각하지 않으면, 고난은 성장통이 아니라 포기의 과정이 된다.
벧전 배경 : 고난(네로황제)
그러나 우리가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로 자라나고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고난을 통해 무엇을 주실지는 내가 말할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점이다.
그 와중에 세상의 방해, 죄악의 유혹, 고난이 있을지라도 분명 우리는 자라날 수 있다.
이런 믿음의 확신을 가지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다.
말씀은 그 피난처로 우리를 인도하는 지침이다. 네비다. 키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중에라도 신령한 젖을 사모함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기억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우리의 판단과 기준이 먼저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모함을 기억하려면, 우리가 갓난아기처럼 갈망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이 3절이다.
3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드린다.
만약 그 인자하심, 그 구원의 즐거움과 도우심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면 속히 그 맛봄이 있기를 축원.
우리가 맛봄은 주의 인자하심이며 잔치, 하늘의 은사, 하나님의 선함, 내세의 은사(히6:4)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맛보신 것은 죽음(히2:9)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맛보심으로 우리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게 되었다. 그 인자는 하늘의 잔치를 맛보는 것이다. 하늘의 은사와 하나님의 선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내세의 은사를 확신하는 것이다.
맛보다는 다른 말로 경험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번만 맛보게 하지 않으신다. 계속 먹이신다.
그를 통해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라.
우리에게 좋은 것을 먹이시기 위해 죽음을 맛보신 우리의 구주를 생각하라.
이것이우리가 자라가는 비결이다. 우리의 구주를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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