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설교)

저녁예배설교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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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론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그중 신명기의 본문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과도 같은 책입니다. 그가 자식같은 이스라엘을 두고 떠나야하는 상황속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명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할 때 하셨던 말씀, “내가 너희들을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와 같은 심정의 말씀입니다. 함께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수있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하나님께서는 신명기를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더욱 강조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잊는 것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십니다. 이것이 신명기 8장에서 나오는 주된 주제입니다.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저가 처음에 말한 마 10:16의 말씀, 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도 느껴집니다. 묵상을 하며, 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보내는 것을 어려워하신다, 꺼려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정말 약속의 땅에 가서 살수있는지를 걱정하십니다. 어떤 약속을 이루는 자가 될지를 염려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은 축복과 저주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40년간 이스라엘을 광야길로 돌리셨습니다. 가나안에서의 삶이 약속의 삶, 축복의 삶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애굽에서 살았던 400년간의 때를 벗겨내듯이 40년을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애굽에서 나올 때, 백성들이 무엇을 챙기게 하셨습니까. 애굽의 보화를 챙기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필요한 것은 물과 음식과 의복입니다. 그러나 생명에 필수적인 것들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들을 챙기게 하셨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이 가졌던 재물들은 두고두고 그들에게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출 17장에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지금막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뭐 가진게 있다고 아말렉이 공격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챙긴 재물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방어할 수단도 없는 이스라엘이 막대하 재화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사막에서 약탈을 하며 살았던 아말렉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가장 필요한 식량과 의복은 없었습니다. 욕심의 대상, 정말 가치롭다고 생각했던 금은보화들은 애물단지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 몇주면 갈거라고 생각했던 가나안은 언제 들어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만드셨을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3절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출애굽할 때, 그들은 너무나 기뻤을 것입니다. 애굽의 재화들을 싸서 올 때도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거운 금은보화들은 광야생활 내내 짐만 되었을 것입니다. 때론 그 금은보화 때문에 생명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사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음식과 물, 의복은 부족했습니다. 아무리 금은보화가 많으면 뭐합니까. 사막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을 통해서 철저하게 그것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자, 그 만나가 썩어버림도 경험했습니다. 만나를 주실 때, 어떻게 했습니까. 하루하루 먹을 만나를 채취하도록 하였습니다. 만나는 단 하루만 먹을수 있습니다. 하루만 지나도 썩어버립니다. 다만, 안식일 전날 채취한 만나는 이틀간 먹을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전처럼 단순히 나의 도움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명 그 자체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 기간이 40년이었습니다. 마치 십일조처럼 애굽을 주인으로 섬긴 기간의 1/10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는 생명이었습니다. 매일 만나를 채취하러 나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의 만나와 안식일의 만나를 보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살피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야는 그렇지만 외롭고 힘든 곳이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도 날마다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광야는 어떤 인프라도 없는 곳입니다. 험한 길도 많았습니다. 그저 험한 길이지만,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표현이 마땅치 않아 험한 길이라고 하는 것이지, 사실 그곳은 길이 아닙니다. 사람이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애초에 광야에서 40년간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이 보통 사람이 없는 곳에 머물렀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잠을 자는 것, 텐트를 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구름기둥이 움직이지 않아 기약없이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 생활이 쉬웠을 것 같습니까. 광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라도 광야에서 며칠 살면 거의 거지꼴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의복은 40년간 헤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로 그들은 40년간 새옷한번 입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깊게 만났습니다. 날마다 보호하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먹이시는 만나의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동시에 그런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실수 있는 전능한 분이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염려하고 있는 것일까요.
광야에서는 만나만 있었습니다. 하나님만 볼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는 ‘떡’만으로 살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살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주일간 하나님 잊고 살아도 충분히 살수 있지 않습니까.
코로나 때문에 예배를 못드리니 처음에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집에서 드리는 영상예배가 너무 편하다는 말을 안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깨어있는 분은 이렇게 풀어지면 안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편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그렇게 외치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는 생명이었습니다. 만나가 없으면 살아갈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지형이 너무 험해서 충분한 만나를 채취하지 못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매일의 만나는 이스라엘에게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 만나는 별식에 불과합니다. 물론 만나가 더 이상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렸다해도 이스라엘이 광야때처럼 귀중히 여기며 먹을까요? 꿀도 있고 우유도 있습니다. 빵과 각종 야채, 고기들이 있습니다.
가나안에서 만나는 그저 별식에 불과합니다. 한번씩 과거를 추억하며 먹는 별식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나를 끊으셨습니다.
광야에서는 만나를 먹지 않는다면 사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에서는 만나를 먹지 않아도 충분히 살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염려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처럼 먹을 것인지 염려하고 있습니다. 매일 만나를 채취하러 나왔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러 나올 것인지 걱정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 마음은 단순히 생각이나 감정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 그 자체를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생각의 틀,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을 따르도록 변화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마치 우리가 걷고 말하고 달리는 것이 당연히 할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사고방식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왜냐면 그것이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만나는 별식입니까 주식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한 이벤트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삶의 원리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이벤트, 특별한 날로만 기억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원하지 않으십니다. 부부가 결혼하면 당연히 함께 살 듯이 하나님은 우리와 살고 싶어 하십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험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험한 길은 생명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나안땅에서 험한 시련은 결국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말씀을 따르며 산다고 좋은 일만 생기지는 않습니다.
히스기야왕이 하나님을 위해 이스라엘을 개혁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맞이해야 했던 것은 앗수르의 대침공이었습니다. 예루살렘만 남고 함락되는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 이전에 여호사밧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개혁하고 맞이한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 아람의 대침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과 함께 살았을 때, 그들은 위기앞에서 하나님께 의지할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라톤선수처럼 잘 달리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따라 달릴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이 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한 하나님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미약하고 나약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다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별식이 아니라 주식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하여 언제나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한번 부르짖은 후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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