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2-추수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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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감사
서론
오늘은 추수감사절이다. 그리고 이 추수감사절에 지난 주에 이어 함께 감사에 대해 살펴볼수 있기를 바란다.
본론
시편 136편은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할렐루야 시편으로 불린다. 135편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는 최고의 시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136편은 그냥 감사하라~감사하라가 아니다. 템포가 엄청 빠른 곡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찬양중에서 엄청 비트도 강렬하고 빠르고 리드미컬한 찬양이 있다. 그래서 듣고 있으면 몸이 들썩 들썩 거리는 찬양, 바로 이런 찬양이 시편 136편이다.
그래서 어떤 시편 주석은 시편 136편의 제목을 ‘쾌지나 칭칭나네’라고 붙였다. 민속놀이에 보면 엄청 흥겹게 가사 하나가 끝날 때마다, ‘쾌지나 칭칭나네’라고 부르는데, 시편 136편이 딱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흥겨움, 즐거움, 열정의 절정이 바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다’
거기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중에서도 절정이다. 그렇게 빠른 찬양이 처음부터 빠르나? 보통은 가면갈수록 고조되다가 후렴부에 절정에 이른다.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그 절정부분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째서 감사할 수 있을까? 이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 단순히 흥에 겨워 떠들고 춤추고 있는걸까? 마치 집회장에서 옆에 있는 친구도 춤추니까 같이 즐거워서 아무생각없이 방방 뛰고 있는걸까?
그렇지 않다는 거 알거다. 아무리 옆에 사람이 즐거워서 춤추며 찬양해도 나는 무덤덤할 때, 많을거다.
같이 수련회를 해본 입장에서 함께 즐거워하며 춤추며 찬양하는 사람보다 춤추며 찬양하는 사람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거 알고 있다. 자기가 그랬다고 찔려할 필요도 없다. 왜냐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기쁨은 분위기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찬양과 감사, 기쁨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찬양이 그럴수는 없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찬양을 드릴 때도 있지만, 그럴수 없을 때도 많다. 억지로 내키지 않는 몸과 마음을 움직여서 찬양하고 목소리 높일 때도 많다. 사역자인 나도 그렇다.
시편 136편은 맥추감사절이든, 추수감사절 둘중 한가지 절기나 두 절기 다에 불려졌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때, 모든 사람이 추수의 기쁨에 넘쳤을까? 모든 사람이 다 풍년을 맞이했을까? 아무리 풍년이라도 얻는 양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다. 어떤 때는 흉년이 들어서 이걸로 대체 어떻게 먹고 살질 걱정이 드는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쁨으로 감사찬양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 시편 136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깊은 의미이다.
본문 23절은 어떻게 시작하고 있나.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것이 감사의 하이라이트이다. 우리는 언제나 기쁠수 없다. 언제나 행복할 수없다. 살다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때도 온다. 우울증에 걸릴만큼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나도 모르게 먹을 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목이 막혀 먹을수없을 때도 있다.
23절을 다르게 해석하면 이와같다.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 우리를 기억해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다들 낮아질 때는 온다.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과 같을 때가 분명히 있다. 길가에 함께 서있지만, 홀로 있는 것같을 때가 있다. 가족도 부모도 친구도 그 누구도 내 마음을 위로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에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신다. 찾아와주신다. 우리를 위로해주신다. 우리와 함께 울어주신다. 우리의 눈에 눈물이 말라, 더 이상 울수 없을 그때, 우리 하나님이 우리 대신 더욱 크게 울어주신다.
시편 136편의 절정, 그 흥겨운 찬양은 바로 이런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소리지르고 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소리지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낮아진 그 때, 누구에게든지 원망과 좌절을 쏟아낼 것같은 그 때, 더 이상 나 스스로 서있을 힘도 없을 것같은 그때,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소리지르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24절처럼 우리를 그 자리에서 건지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 원수, 사람 때문에 생긴 고난이든, 환경 때문에 벌어진 일이든, 아니면 나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이든 상관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게 만든 그 모든 것들을 원수라 부르신다. 그리고 우리를 그 늪에서 건져내시는 분이시다.
2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모든 육체에게 먹을 거리를 주신다. 모든 육체를 먹여 살리는 분이 나를 살리지 못할거 같은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하나 건지지 못할 거같은가?
왜 감사해야 하는가?
바로 이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감사는 힘이다. 감사는 믿음이다. 우리가 가장 비천한 처지에 이르렀을 때, 이제 나라는 그릇이 금이 갔을 때, 내가 부서져감을 느낄 때, 감사의 기억들이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을 바라볼 힘을 준다.
그것이 원망이어도 좋다. 저주여도 좋다. 실제 시편 137편에서 시인은 아예 저주를 퍼붓고 있다. 그것도 끔찍한 저주를 퍼붓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감사했던 기억들이, 그 악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니 감사하길 바란다. 악한 상황, 고난을 감사하라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우리를 건지실 것을 믿고 감사하길 바란다. 그리고 찬양하길 바란다. 예배하고 기도하길 바란다.
지금드리는 예배와 찬양, 기도, 감사를 하나님은 사용하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플 적에, 힘들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실 것이다.
그것을 믿고 감사하길 바란다.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 사랑으로 분명히 회복시킬 것이다.
“” 찬양후 기도
헌금 “내게 있는 향유옥합” 후 기도
축도
지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있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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