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복음(설교)

저녁예배설교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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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본문의 말씀 전에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13절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은 바로 이 말씀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본론
본문 1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비웃었다는 말은 13절의 말씀만 비웃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시는 동안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삐딱하게 듣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애초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4절에서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렇게 적대적으로 나온 것일까요? 성경은 그 답을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고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는 것이 성경의 답입니다.
이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는 단어는 ‘돈’이라는 단어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돈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본문을 이것을 통해 당시 바리새인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사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처음에는 ‘하시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 하시딤이라는 이름을 번역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인애, 자비, 사랑으로 번역되는 단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에 ‘사람들’을 붙인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단어라면,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약 200년전, 유대는 완전 혼란한 상태였습니다. 포로귀환을 했지만 생활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 헬라화의 물결이 거세게 들이닥쳤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구약의 율법들을 버리고 세상이 제시하는 것에 따라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사회속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시딤’입니다. 이름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두가지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염증을 느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율법, 구약의 말씀대로 살기만을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세속을 떠나 은둔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수도원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들의 흔적이 있는 곳이 사해입니다. 성경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는, 사해사본이 바로 그들이 필사한 성경입니다. 이들을 에세네파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반대로 세상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쉽게 말해 세상속에 빛으로서 남기위해 세속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세속에 물들 것을 각오하고 그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가치로운 일인지 몸으로 삶으로 알리기를 각오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시작이 이토록 고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기 시작하면서 벌어졌습니다. 점점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로 눈을 돌렸습니다.
급기야 오늘 말씀 14절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원래 ‘하시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완전히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강한 질책을 보내고 있습니다.
15절에서 그들을 크게 야단치십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기 위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높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인기는 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원문은 ‘미움’보더 더 강한 ‘혐오’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하시딤들은 변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은 세상에 침입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서 세우기는커녕, 세상에 항복한자, 사이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더욱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과 싸운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는 계속해서 다투십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처음에 어떤 마음을 품은 자들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얻나간 그들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며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가 되어버린 그들을 향해 그 비유로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나를 향한 말씀임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직접 질책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에 참여하라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하려 했지만, 오히려 정복당해버린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왔으니 그 첫마음을 회복하라 명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향해 첫마음을 가지고 다시 한번 침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결국 돈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겉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꾸미면서 돈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겉모양이 하나님사랑이었기 때문에 더 완고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결국 돈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그렇게 돈을 사랑했을까요. 우리 모두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돈이 왜 좋은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돈은 나를 배신하지 않아. 돈은 나를 상처입히지 않습니다. 내 손에 있는 돈은 내 편이야. 돈만 있으면 난 살 수 있어.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한손에 하나님의 율법을 쥐고, 한손에는 돈을 쥐었습니다. 그들의 손은 가득차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향해 나아올 자리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세상에 침입당한 모습으로 우리도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강한 군사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우리는 다시 패잔병이 되어 하나님 앞에 모여 있습니다.
전투에서 패배한 패잔병이 소속을 나타내는 군복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옷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편인것처럼 살아가다가 겨우 하나님앞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다시한번 그리스도의 옷을 덧입혀주십니다. 세상의 옷을 벗기지 않으십니다. 그저 모른채하시며 그리스도의 옷을 덧입혀주십니다. 보혈로 덮어주십니다. 다시 붉게 물들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17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임했다고 율법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을 그렇게 질책하시는 예수님이 왜 율법에 대해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아닙니까. 너희는 그렇게 패잔병이 되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 아닙니까.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예수님께서는 도전하고 계십니다. 왜냐면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세상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밖으로 나가야지만 얻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변하지 않음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바리새인들의 시도, 세상의 빛이 되겠다는 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했다해도 그것이 예수님께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세상의 실패를 수치로 여깁니다. 재수하는 고3들은 청년부도 가지 못합니다. 고등부도 가지 못합니다. 마치 죄인인 것처럼 교회에서 머리숙이며 다닙니다. 사업에 실패한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한 것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처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한획이 세상보다 무거움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겪은 세상에서의 실패, 패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라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바리새인도 우리도, 복음을 위해서 왔으니까요. 분명 복음의 책무를 인식하며 살아가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코로나때 교회가 욕먹는 것을 보며, 답답해하고 가슴치지 않은 사람이 여기 있습니까. 교회가 욕을 먹든지, 예수님이 욕을 먹든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하신 분 있습니까. 모두 답답해하며, 기도하지 않습니까. 릴레이로 금식기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조금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 향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돌아오라고 도전하고 질책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나아가자라고 말하십니다. 다시한번 시작해보자고 말씀하십니다. 살면서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다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를 함께 지자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다시지지 않겠냐고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힘들고 아파도 다시 십자가를 함께지지 않겠냐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질문에 답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라고 답할 수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라고 답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주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당한 그 상처, 그 흉터들이 모여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를 위해 다시 한번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구주와 함께 세상을 향해 걸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시간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회복시켜 주사 다시한번 나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주님과 함께 걸어가게 하소서. 주님의 그 질문에 담대히 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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