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에서 처음 난 것 설교

출애굽기강해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45 views
Notes
Transcript
설교
서론
오늘 본문은 모세가 태에서 난 첫째를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무교절의 규례를 알려주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인 것과, 종으로서 살아갈 때 이스라엘 한명 한명이 받을 축복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무교절의 규례를 바탕으로 해서 초태생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함께 말씀을 살펴보시며,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2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11절-13절의 내용과 14절부터 16절입니다. 둘다 딱 3절씩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 11절에서 13절은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11절에서 첫째를 바치기 전에 뭐라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시면 이 규례를 지켜라는 뜻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의 순서가 들어갑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맹세를 지킬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키고 나면 오늘 본문의 규례를 하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먼저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항상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움직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움직이심과 성취하심을 보고 나서야 움직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먼저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룩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요일 4:1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의 먼저 사랑하심덕분에 우리는 이 자리에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한결같이 행하십니다. 먼저 사랑을 행하십니다. 사랑을 주십니다. 언약을 실행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이런 사랑이 모두 보답을 받습니까. 준만큼은커녕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받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비하면 터무니 없을 정도로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알고도 먼저 주십니다. 사랑을 주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의 1/10도 다 돌려드리지 못할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주십니다.
11절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많이 받았습니다. 출애굽에 있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이스라엘입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반항을 했습니다. 특히, 바로가 이스라엘에게 보복할 때, 모세를 비방하고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다가 10재앙의 후반부가 되어 애굽사람조차하나님을 완전히 인정하자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에 동참은커녕 방해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약속을 다 지키면 이렇게 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먼저 나서십니다. 그리고 먼저 손해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손해를 결코 손해로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아예 손해, 잃어버린다는 개념이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손해,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시는 때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죄에게, 마귀에게 빼앗겼을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길로 갔을 때입니다. 그때만이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림과 아픔을 느끼십니다.
우리는 결코 이럴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항상 먼저 주고, 상대보다 더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되돌려 받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려줌의 양은 전혀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돌려줌의 형식과 내용, 즉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지를 주의 깊게 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2절에는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돌리라’입니다. 문맥상으로 보면 이 ‘돌리라’라는 단어가 ‘하나님께 드리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단어의 원 뜻은 ‘넘기다, 지나가다, 넘어가다’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출12:23에서 ‘넘어가다’라는 말과 함께 쓰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유월절을 행하신 것과 같은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하신 것과 같이 드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똑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비슷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너희의 장자를 건너뛴 것처럼, 너희도 너희의 장자를 하나님께 넘겨라는 말이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때, 마음을 다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부를 원하신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주십니다. 정말 끝없이 주십니다.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은 조금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드릴 때, 하나님의 방식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자의 재앙때 이스라엘을 구별하였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합니다. 거기에 사랑을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건네 드린다는 마음을 가지고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똑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2절에서 유월이라는 단어를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출12:23에서 같이 쓰인 다른 단어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유월과 같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와 똑같은 삶을 살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을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도 완전히 똑같이 가질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비슷함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닮을수 있는 정도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런 모습을 바랍니다. 다들 자식이야기 하면 꼭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붕어빵이다. 왜 그렇게 닮았냐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나쁘십니까? 반대죠.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좋죠. 외모이든지 하는 행동이든지 자식과 부모가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수록 기분이 좋습니다.
욥 1:8에서는 이런 구절이 있죠.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이게 무슨 상황인 것같습니까?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자랑하듯이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 정직, 하나님 경외, 악에서 떠남. 바로 하나님과 닮았음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욥의 모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보시고, 또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시고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기를 소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을 넘어 하나님과 붕어빵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우리모두 하나님과 붕어빵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되실줄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잊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오늘본문은 13장 1절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1절과 2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초태생의 구별을 모세가 3절부터 16절까지 쭉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처음에 우리의 종됨을 말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해 자유의 몸이 된 것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사람이 된 것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가 주입하는 사고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가치관이든 하나님의 가치관이든 우리는 둘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종됨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됨 속에 있는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만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들도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체험하게 하심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과의 교제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하나님과의 교제의 본질을 11-13절을 통해 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마무리지으면서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을 ‘잊지 않을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래서 14절과 15절처럼 우리 한명한명이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일을 하나하나 다 설명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를 위해 무교절과 처음 난 것에 대한 규례를 정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녀들은 무교절의 밋밋한 무교병을 먹습니다. 양이 자신을 대신해서 죽는 모습을 두눈으로 생생하게 봅니다. 양을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그 피가 문설주에 발라지는 모습을 봅니다. 문설주에 발라진 피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맡습니다. 즉, 시간, 후각, 청각, 미각등 그 당사자의 오감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념하고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감을 통해 느낀 일을 자녀들이 쉽게 잊을까요. 또한 출애굽을 경험하고 그 출애굽의 기억을 떠올리며 무교절을 지켰습니다. 초태생을 바쳤습니다. 그런 부모는 잊을수 있을까요. 잊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오감까지 동원하시면서 우리가 기억하기를 바라십니다.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기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행하는지를 기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행한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자녀삼은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지금도 간구하시는 성령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 어둔 세상에서 빛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