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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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론
우리가 가장 바라고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솔직히 잘 사는 것이다. 그중에 우리 힘으로 안되지만, 가장 부러운게 뭔가? 금수저. 그게 바로 가장 부러운 것일 것이다.
태어나길 이쁘고 아름답게 태어나는 것. 돈많고 권력있는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 재능이 넘치는 것. 다 바라는 거 아닌가.
나도 내가 천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 공부할 때, 엄청 많이 했다. 한번만 보면 다 기억할 수 있으면 참 편할 거 아닌가.
이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재능을 선택할 수 있는가. 누구는 머리나쁘고 싶어서 나쁘게 태어났나. 누구는 못생기고 싶어서 못생기게 태어났나. 누구는 부자아니고 싶어서 흙수저로 태어났나.
내가 추측건대, 여기 모인 우리 모두 중에서 재벌에 외모 연예인 수준이고, 머리좋고 운동신경 좋고, 뭐든 잘하는 팔방미인으로 태어날수 있다면 거부할 사람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그렇게 금수저로 태어난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일까. 솔로몬? 맞다. 아버지 다윗이 다 해놓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솔로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삼손역시도 대표적인 금수저라 할 수 있다.
삼손에 대해 살펴보며,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본론
삼손이 금수저라고 하기엔 부족한 것은 있다. 소위 말하는 집안의 능력으로 볼 때, 삼손은 금수저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그러나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엄청난 계시를 받았다. 이것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 고 있는 성경속의 인물중 누가 이정도의 계시를 받고 태어났는가. 비교하자면, 예수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외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삼손은 성경에서 대표적인 금수저라고 할 수 있다. 어릴 때 비범한 능력을 발휘한 것도 그렇다. 어릴 때, 강한 힘을 발휘한 삼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알고 학자들과 토론할 정도인 예수님 딱 두분만 성경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어릴때에도 그 비범함을 나타낸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이땅에 오셨다. 삼손 역시 그 시대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려주신 축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시에는 칼과 창, 무력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큰 힘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삼손은 엄청나게 힘이 강했다. 이처럼, 삼손은 금수저정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구원자나 다름없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계시도 그렇고, 나실인으로 구별된 것도 그렇다. 그리고 삼손이 가진 힘과 능력도 그 시대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기에 딱 적합했다.
그러나 오늘 본문속의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가? 당시 가나안의 민족사이에서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던 이스라엘을 하나로 모았는가. 강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민족으로 세웠는가.
물론 폄하할 수는 없지만, 그는 블레셋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으로 끝났다. 원래 그의 역할은 그정도였을까. 어쩌면, 삼손은 다윗이 했던 일, 주변 모든 민족을 병탄하고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사명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서 삼손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다.
그러나 삿 13: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5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마지막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 그대로 삼손은 구원을 시작하기만 하고 끝났다.
예수님과 비교될 정도로 엄청난 탄생을 한 삼손이 스타트만 끊고 제대로 그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채 끝나게 된 것이다.
왜 삼손은 이렇게 그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 엄청난 재능을 낭비하다가 꺼져버렸을까.
그것은 바로 그의 옆에 누가 있었는지를 보면 알 수있다.
삼손의 친구는 누구인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아마 있다해도 삼손이 블레셋과 싸울 때 도움을 주지는 않은 것같다.
삼손이 한 일을 살펴보자. 삿 14:5-6에서는 삼손이 맨손으로 사자와 싸워서 이긴 일을 다루고 있다. 이때, 삼손은 사자를 어떻게 죽이나? 목졸라죽이나? 맨손으로 사자의 입을 찢어서 죽인다. 엄청난 힘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삼손은 그가 한 일을 누구에게 알리는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부모에게조차 말하지 않는다.
삿 14장에서 삼손이 블레셋여자와 결혼하려고 할 때, 삼손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결혼을 진행했다. 그런데 14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3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부모와 소통이 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친구와 동포는커녕 자신의 부모와도 제대로 소통이 되고 있지 못하다.
이런 일은 계속해서 벌어진다. 삿 15에는 삼손이 블레셋여자와의 결혼과 파혼을 빌미삼아 블레셋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부모는 반대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결과, 이스라엘은 정당하게 블레셋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스라엘 사람 3000명이 삼손에게 와서 삼손을 구속하여 블레셋사람에게 포로로 넘겨주려고 한다. 결국 삼손은 혼자서 밧줄을 끊어버리고 나귀턱뼈로 블레셋사람 1000명을 죽이고 탈출한다. 그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분명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다. 삼손에게는 찬란한 재능이 있었다. 명분을 가져올 지혜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는 믿고 의지할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삼손이 가는 곳에는 그의 적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의 편이 되는 사람은 없었다.
그에게 물한잔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싸웠다. 그렇기에 그가 들릴라를 사랑하자, 그는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단한명, 믿고 신뢰할만한 단 한명의 친구가 있었다면, 그는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았을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삼손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가 모든 나실인의 서약을 다 어겼을 때에서야 하나님은 그를 잠시 떠나셨다. 그리고 곧 삼손의 머리가 자라나게 하셨다.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삼손에게 정말 마음을 나눌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만 있었다면, 삼손이 이렇게 끝났을까?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좋은 조건을 바란다. 좋은 환경을 바란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 어찌보면 바꿀수 없는 조건들을 바라보며 원망할 때도 있다. 원망은 아닐지라도 아쉬워할 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건에 빠져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삼손이 그의 부모에게 자신의 진심과 생각을 모두 털어놓고 의논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래서 그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하나님께 집안 모두가 엎드려 기도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삼손은 이렇게 홀로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은 후에야 그의 가족 모두가 삼손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삼손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때가 참 많다.
집에 있는 가족들, 그 가족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우리에게 마음을 나누며, 서로 힘을 얻을수 있는 통로들이다. 또한 지금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가? 바로 옆의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따르는 한 사람을 간절히 찾으신다.
동시에 그 한사람만으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왜 아브라함을 복으로 부르셨다.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해 복을 받게 하셨는가.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교제하며 하나되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 하나됨속에 생명의 물이 흐르기를 바라고 계신다.
쉽지 않다는 것 안다. 가족이기에 친구이기에 말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또한 믿었던 가족이 나를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 할 때, 우리는 더욱 많은 상처를 받는다. 이미 가족내에서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상처를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마음을 닫는다면, 우리의 끝은 삼손이 될 것이다. 찬란한 재능과 능력이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하나님앞에서 드릴 아무것도 없어 질 것이다.
그러니 기도하자. 하나되길 기도하자. 그를 위해 가장 먼저 나자신을 위해 기도하자. 나의 상처, 묻어놓았던 아픈 기억들, 하나님과 나 사이뿐 아니라, 나와 가족, 친구사이를 가로막는 크레바스같은 큰 아픔들.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자.
머리가 다 깍인 삼손에게 다시 머리가 나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지울수 없는 아픔과 상처, 그 기억을 가리고 치유할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께 나아가자.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주실 것이다. 수치를 가려주실 것이다. 모든 아픔들을 사랑과 평강으로 바꾸어주실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주 나의 모습 보네” 찬양후 기도
헌금 “내게 있는 향유옥합” 후 기도
축도
지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있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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