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adiah

12 Minor prophets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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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은 두 가지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은 피조물이라는 유한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 자기 초월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유한과 초월 속에서 인간은 불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하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자신을 받아들 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람에 자신을 의탁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하는 모습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일군의 사람은 자신의 초월적인 힘을 확장하여 자신의 불안함을 극복하려 합니다. 자신의 유한함을 벗어나서 운명과 세상을 주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것을 교만이라고 보았습니다.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자신하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누구나 불안합니다. 이 불안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에 대한 불안, 미래와 장래에 대한 불안, 남편의 아내의 장래에 대한 불안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불안이 하나님에게로 나가는 계기가 된다면 참 신앙의 자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근심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근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근심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서 근심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근심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는 근심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오늘 본문의 에돔족속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형적 환경 때문에 자신들은 절대로 안전하다고 자신했습니다. 오바댜 1:3에 이렇게 그들을 질타합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다. 저는 이 본문이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폐부를 찌릅니다. 자신에 대한 자신이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된다는 것이지요.
PPT 제시) 에돔은 바위 틈에 거주하면서 높은 곳에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좁고 좁은 바위틈의 협곡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 협곡은 지나가기만 하면 백전백패였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그들이 치뤄온 전투에서 마음 속에 교만이 자리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교만(제논) : 음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습. 남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으로 우쭐대는 태도, 남을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지칭한다.
이들은 마음 깊은 곳에 이러한 교만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이러한 교만한 마음을 스스로 교만한 태도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성경 : 스스로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교만한 자는 패망한다.
야고보서 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벧전 5:5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바위 틈에 : 에돔족속이 거주하던 세일산의 갈라진 바위를 언급하는 것으로, 그들은 바위 중간중간에 집을 짓고 살았다.
높은 곳 :세일산 북쪽 봉우리들은 해발 1500미터가 넘었고, 남쪽 봉우리들은 해발 1800미터가 넘었다. 에돔의 도성이 있었던 셀라로 가는 길목은 험준한 벼랑을 사이에 둔 협착한 골짜기로 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사실상 침입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들은 큰 나라를 되지 못했지만, 주변 민족들 사이에서 위협적인 세력으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해 온 것이다.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 마음 속으로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 누가 나를 끌어내릴 수 있느냐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그러한 생각에 찌든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만에 찌든 삶이 바로 이들이었다.
여기서 누가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 여기에는 하나님도 포함하고 있는 교만이다. 교만은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위치를 벗어나서 자신을 높은 자리로 높이려는 의지이며 이러한 의지 때문에 범죄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아퀴나스는 그래서 교만을 “본래의 자신보다 더 자기를 높은 곳에 놓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교만한 자들의 모습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는 동시에,
교만은 다른 사람에게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평가를 돌려주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왜곡시켜 부당하게 대하고 멸시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러한 교만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냉담한 죄로 분류됩니다.
영적인 교만 : 성급한 진단을 내리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쉽게 “기도가 부족하다"고 단언하고, 신앙생활이 열심이 없다고 함부로 폄훼하기도 합니다.
교만은 겸손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은 자신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질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직시하기 어려워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도덕적 기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기 때문에 쉽게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악한 것보다 덜하면 순결하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 사람보다 덜 악하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기기만이지요.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 에돔족속이 너의 마음이 너를 속였다고 질타받은 바로 그 기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대면하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알기 위해 이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성경을 바라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 앞에서 자신의 더러움이 드러나면 자신이 심판을 견뎌낼 수 없는 한없이 악한 자이며, 부족한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어야합니다. 성경이 성경의 이야기로만 그쳐서는 그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욕할 수 있는 성경의 인물이 누가 있습니까? 베드로가 부족해 보이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를 경멸하거나 무시하거나 멸시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저히 깨달은 자였습니다. 자신의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자였고, 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바로 그러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닭이 울 때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찾아오셨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직시하며,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그렇게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긍정의 힘에서 시작하기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복탄력성을 갖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가면을 벗어버리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자신을 부풀려 미화시키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하심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며 나지막히 고백하는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매일은 바로 그러한 겸손의 고백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집니다.
여기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군에서 현충원에 누워계시는 분들도 진급발표일만 되면 벌떡 일어선다는 진급관련 여러 말들이 무성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속에서 주님의 음성은 이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길 원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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