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sea

Minor Prophets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9 views
Notes
Transcript
저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삶을 읽을 때마다 기행에 가까운 그 모습을 두고 깜짝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3년 동안이나 벌거벗은  몸으로 다녔습니다.(20:2-3) -> 장차 민족이 벌거벗은 몸으로 포로되어 갈것을 예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목에 멍에와 줄을 두르고 다녔습니다 -> 바벨론 왕에게 끌려갈 것을 예표하기 위하여 위해서였습니다. 또 자신의 허리띠를 멀리 유브라데강까지 가서 묻어야했습니다. 이는 유다가 쓸데없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스겔은 벽돌을 깔고 그 위에 성읍의 그림을 그린 뒤 430일을 누워지내면서 소똥에 떡을 구워먹어야 했습니다.또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을 예고하기 위하여 담을 뚫고 그 구멍으로 틍과하여 이사하는 시늉을 해야 했으며(12장), 음식을 먹을 때, 떨며 놀라는 행동을 해야했고(12:17), 아내가 죽었을 때도 울음을 참아야 했습니다.(24:18)
이런 선지자들의 독특한 기행 중에서 만약 제가 감당해야 한다고 하면 절대로 못할 것이 호세아의 사례입니다.
호세아는 바람기가 다분한 여자를 아내로 결혼해야 했습니다. 자식들의 이름도 예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후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아합의 아들 70명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을 예언하기 위해서 그의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지어야 했고, 이스라엘에 더 이상은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긍휼히 여기지 않음)라고 지었고, 또 두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더 이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을 전파하기 위해 로암미(내 백성이 아님)라고 이름을 짓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아내는 집을 나가서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고 이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어서,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주어서 다시 사와야했습니다.
선지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에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독특한 모습을 보고 싶어하고 그에게 그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그들에게 자신이 왜 그렇게 하는지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호세아는 왜 바람기 많은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들 이름도 그렇게 독특하게 지어야만 했을까요? 그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두고 당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고요.
당시대의 사회적 배경
여로보암 2세 치하(주전 793년-753년) : 시대의 경제적 번영, 정치적 안정
솔로몬이 다스리던 시기 만큼 영토를 회복한 여로보암 2세의 치 세
그는 마치 고구려시대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했던 것처럼,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솔로몬 시대만큼의 고토를 회복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여 주신 복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 2세는 그러한 하나님의 복을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으로 남아있습니다.
호세아는 바로 이러한 여로보암 2세 치하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이 가져온 부강한 나라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아모스서에 보면 당시 북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에서 상
당시대 왕의 업적에 대한 국정 지지도가 최고조로 달하고 있고, 시장의 개도 입에 엽전 하나 물고 있다고 할만큼 흥왕했던 시기에 백성들은 엄청난 타락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들이 실질적인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 그들의 죄악
10:13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호세아의 정죄는 외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내부를 향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한 모습에 대해서 호세아는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사회적인 폐해에 대해서 세 계층의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정신적 권위를,
왕족들은 정치적인 권위를,
이스라엘 족속들(족장들)은 사법 및 시민들의 질서에 관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들이 앞서서 우상숭배를 도맡아 했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이방 우상에게 바치는 제사를 혼용해서 섞어 버렸습니다. 사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 경외를 몸소 실천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의 부정한 행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듯이 섞어 버렸습니다. 사라정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호세아라고 하는 예언자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너는 한 여자를 택해서 결혼을 하는데, 바람기 많아 보이는 여인과 결혼해서 자녀를 셋 낳으라고 하십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고멜이었습니다.
호세아의 질문 :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가지고 있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우리의 욕망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존 파이퍼 :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욕망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에 대해 느끼는 기쁨만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서 즐거움의 참된 대상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신자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자신의 유일한 소원으로 두고 행하고 계신다고 역설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랍고도 영원하신 약속이다.
우리는 은혜의 길목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삭개오는 은혜의 길목을 지키는 탁월한 본을 보여 주었다. 그는 예수님을 강요하거나 은혜가 저절로 임하게 할 수는 없지만, 은혜가 임하는 길목은 지킬 줄 아는 자였다. 맹인 바디매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시력을 되찾을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면서 나워 주시는 은혜의 길목을 지킬 수 있었다.
예수님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분의 복을 기대할 수 있는 은혜의 길목을 지키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다윗은 말하고 있다.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은혜를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은혜가 부어지는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있다. 목마른 사슴의 심정으로 그 물을 찾아 나서야 한다.
고대 아랍권에서는 사막을 지날 때 사슴 한 마리를 데리고 이동했습니다. 이유는 사슴이 물을 잘 찾기 때문입니다. 낙타는 길을 가면서 입에서 분비물이 많이 발생해서 물냄새를 찾을 수 없지만, 사슴은 코가 예민해서 본능적으로 물냄새를 잘 맡는다고 합니다.
여행이 시작되면 사슴에게 단 한 방울의 물도 주지 않습니다. 일행 중에 물이 거의 소진될 무렵 목을 축이지 못한 사슴의 목마름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이때쯤 사람들은 사슴의 목에 걸린 줄을 풀러줍니다. 그때부터 사슴은 미친듯이 물을 찾아 뛰기 시작합니다. 본능적으로 물을 잘 찾는 사슴이니 최단거리를 찾아 뜁니다. 그리고 오아시스 근처에서 사슴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한 번 물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과연 내 삶에 단 한번이라도 이 사슴과 같은 갈급함이 있었던가?
하나님께 대한 갈급함이 있었는가?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는가? 예배에 대한 갈망, 아니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갈망이 있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 긍휼로 불붙는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데, 그래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해가면서까지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은혜를 부어주시며, 택함 받은 자녀로 살아가면서도 힘들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은혜를 부어주시는데 우리는 과연 그 마음을 알고는 있는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는 곳에, 그 은혜가 부어지는 곳을 찾는가? 찾으려 하는가? 은혜의 자리를 찾는 습관이 있는가?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아가는가?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바란 것은 무엇인가?
인애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우리는 매춘, 폭력, 부패에 반대하는 극악무도한 사람들이 비록 중요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부차적인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호사는 단순히 사회적 죄악을 근절하고 사람들에게 종교적 의무를 부과하고자 하는 종교적 반동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독자가 하나님과의 변혁적 삶에서 오는 사랑스럽고 인정 많은 마음을 얻기를 바란다.
예수님께서 호세아를 인용하시면서, 이 본문을 쓰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본문을 바리새인의 위선을 지적하실 때에 쓰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를 바라보며 사회의 개조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매춘이나 폭력이나 부정부패를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사회악을 근절하고 하나님 믿으라는 종교적인 어떤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변화시키는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랑과 인정많은 마음을 가지기 바랬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두고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을 가볍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외적인 신앙행위를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참 예배란 긍휼을 사랑하고 마음에서만 오는 것임을 강조하시기 위해 호세아서를 인용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타락했는데 회개하는 것 없이,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근본적인 변화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제사만 드리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겉으로만 그럴 듯한 것이라고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호세아는 고멜과 결혼하면서 그녀가 결혼생활에 불성실할 것을 알았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불성실할 것임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듯, 호세아는 이것을 알면서도 이스라엘과 결혼한 것이다.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22 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