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교회

소아시아 일곱교회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8 views
Notes
Transcript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이야기가 이제 마지막 라오디게아교회에 당도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은 그 교회들이 상상 속 교회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교회였고, 교회마다의 문제들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신학적인 어떤 예시가 아니라 실제로 그 교회들이 그 시대 속에서 겪은 이야기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현재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성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코로나 19상황 속에서 교회의 예배가 잠정 중단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삼군담임목회자들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소아시아 일곱교회의 모습을 통해 교회가, 우리 육해공군 삼군교회가 지향해야 하며, 지양해야 할 것들을 분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강해시리즈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현재의 사회 속에서 교회의 자리를 어떻게 지켜야 하며, 참된 신앙생활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라는 간구를 담아 이 시리즈를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룬 일곱 교회 중에서 라오디게아교회는 가장 최악의 교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단 한 번의 칭찬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 중에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본문이 3: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3:20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운 주님의 마음이 절절히 담긴 구절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구절은 통상 개인의 회심에 대한 주님의 간절함을 말씀하시는 구절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 인간의 결단인 것처럼 말씀하는 구절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한 개인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교회의 영적 상황은 드러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어느 누구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연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보이신 교회들에 대한 반응은 눈물을 흘리거나, 진노하게 하거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교회는 주님을 병들게 하는 교회, 아프시게 하는 교회라고 하십니다.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지도 않기 때문에 토악질을 할만큼의 교회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이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라오디게아의 지형적인 위치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근처에는 히에라폴라스라고 하는 유명한 온천지가 있습니다. 지금은 파묵칼레, 즉 목화의 성으로 잘 알려진 온천이 있었습니다. 또한 라오디게아 근처에 위치한 골로새에는 아주 시원한 물이 흐르는 냉천이 유명했습니다. 문제는 이 두 물이 섞이게 되면 이도 저도 아니한 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온천의 물이 오면서 식어서 차지도 덥지도 않다고 하는데 그러한 내용은 아닙니다. 즉 파묵칼레의 물이 온천수라면 다시 데워서 쓰면 됩니다. 그러나 골로새에서 흘러온 물과 섞이게 되면 골로새의 물은 마실 수 있는 물이지만 온천수와 섞여서 이도저도 아니한, 즉 마실 수 있는 차가운 물도 아니고 온천수로도 쓸 수 없는 물이 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이 잘 아는 내용을 그들의 현상황에 빗대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에베소로부터 동방으로 통하는 무역로의 요충지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시인 키케로가 막대한 예산을 예치할 정도로 큰 은행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많이 정착해서 살았고 이들은 금을 많이 보유했습니다. 또한 흑색으로 된 양모로 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의복과 카펫을 팔아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파묵칼레의 온천수가 양모를 염색하는 데 쓰이는 바람에 이 물을 세수하면 눈병이 생겨서, 이 도시에는 주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알려진 유명한 의과대학, 일종의 약학대학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만든 안연고는 당시 그레코로만 세계에 독점공급을 할 정도로 각광받는 의약품이었습니다. 이토록 금이 많아 금융이 번성했고, 양모를 팔고, 안연고를 팔아서 아주 부유한 도시가 바로 라오디게아였던 것입니다.
주후 60년경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은 로마의 원조를 받아서 도시를 재건했지만, 라오디게아는 이러한 도움 없이 자력으로 도시를 재건한 엄청난 역량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이 도시에 살고 있는 라오디게아인들은 자신들의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라오디게아 교인들도 물질적으로 풍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라오디게아교인들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부유를 영적인 부유함과 동일시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자평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부를 교회에 물질로 드리는 것에 인색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러나 이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생활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가진 부가 그들이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은 것의 증거인양 내세웠다는 것이고 그것이 스스로 부자라고 으스대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는 주님께서는 이들의 겉모습이 아니라 이면, 속을 꿰뚫어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며, 그들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네가 부자라고 하지만, 실상은 너희들은 “곤고한 자요, 가련한 자요, 가난한 자요, 눈이 먼자요, 벌거벗은 자"라는 것이 주님의 평가였습니다.
1. 곤고한 자 : 곤고함은 피부가 굳어지는 것과 같은 괴로움을 견딘다. 즉 너희들은 속이 곪아지는 것도 모르고 있다. 서서히 피부가 굳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되고 있다.
2. 가련한 자 : 불쌍하다. -> 너희들이 다른 도시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실상 너희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자들이다.
3. 가난한 자 : 너희들이 부자라고 하지만 실은 영적인 가난에 허덕이는 자들이다.
4. 눈먼자 : 너희들은 안연고를 발라서 눈하나 만큼은 잘 보인다고 하지만, 실제로 너희들은 영적으로 눈 먼 자이다.
5. 벌거벗었다 : 흑양모를 입고 다녀서 멋있는 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너희들은 옷을 벗고 사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치욕스러운 상황에 처해있다.
주님께서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비참함에 대해서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이들에 대한 판단은 단호하며, 이들에 대한 권고 또한 단호합니다. 주님은 세 가지로 대안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첫째,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불로 연단한 금은 불로 제련한 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금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부요하다고 느꼈지만, 이들은 부는 표면적인 것입니다. 주님에게는 불로 연단한 금, 즉 깨끗하고 정결한 금이 있으니 그것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불로 연단한 금은 순전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 정결한 금이 있으니 주님께로부터 그 금을 사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라오디게아교회는 주님에게서만 구할 수있는 영적 부요를 깨닫고 주님에게서 그것을 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흰옷을 사서 입어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라.
흰옷을 언급한 배경에는 라오디게아의 특산품인 흑양모옷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즉 그들이 입고 으스대고 있는 그 흑양모옷을 벗고 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으로 자신을 휘갑치고 있는 삶이지만 속에는 더러운 죄가 가득하다. 그것은 흑양모옷을 입는다고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죄의 드러움을 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서 보게 해라.
그들은 눈이 잘 보인다고 해서 안약을 과시하지만, 오히려 라오디게아교인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문제점을 보지 못하는 영적인 시각장애인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39에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러나 주님의 책망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벌만 주고 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를 책망하는 것이다. 주님의 책망의 본질은 그들을 심판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의 목표는 택한 자녀들이 “열심을 내고 회개”(19)하게 하는 것입니다.
열심을 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그 마음 가운데 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내가 주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로 내 죄가 깨달아지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열심이 생겨납니다. 호주의 신약학자 레온 모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에 의해 뜨거워지기 전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재난이다. 싸늘한 무관심보다 차라리 노골적인 반항이 더 희망이 있다.”
성령에 의해 뜨거워지기 전이라 함은 그가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주의 십자가의 소중함을 알아 구원에 대한 열망 속에서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구원하신 은혜로 뜨거워진 감동을 말합니다. 이 감동 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재난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모태신앙으로 살아오지만 입교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이 대목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것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입교는 어떤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부모의 신앙으로 고백한 것을 이제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목사의 목양의 본질은 성도들이 영적인 것에 열심을 내고,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리차드 벡스터는 목사의 설교는 “죽어가는 자가 죽어가는 자에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심정으로 촉구하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와 먹고 마시며 영적인 교제 가운데 함께 거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사랑할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거기에서 흘러 나옵니다.
바로 그렇게 할 때에, 즉 이 세상에서 세상의 논리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논리에 좌우되지 아니합니다.
바로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께서는 이 세상을 통치할 때에 함께 그 옆자리에 앉게 하는 놀라운 권위를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불행은 그들이 세상의 가치대로, 물질적인 부요함이 영적 부요함을 가져오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불행은 영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내가 알지 못하기에 영적인 것을 사모하지도 그것에 애착을 가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에 몰두하고 그것을 찾는 자들을 교회에 있는 자들이 오히려 무시하고 마음 속으로 조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알게 하시는 데에 성경을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전강스쿨을 개설했는데, 신청자가 없어서 다시 기간을 연장했다.
원서 14-15명, 2-3분 -
육군본부는 1명, 공군본부1명, 사천기지 2-3분, 선봉대
공군교육사, 익산7공수여단, 공군중앙교회1
내비따라 성경읽기를 하는데도 신청자가 너무 저조하다.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징후입니다. 본부교회가 무엇인가 식었다는 방증입니다.
본부교회 성도들이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의 무서운 양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요예배에 나오지 않고 있다. 영적인 무력함이 그속에 들어차 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자신의 게으름이 합리화되고 변명이 되고 있다.
다시금 우리 교회가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의 반석 위에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다같이 이 찬양으로 주님께 나아갑시다.
“교회여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