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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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론
오늘본문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시는 과정을 담고 있다. 본문을 살펴보자.
본론
사울, 다른 이름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중 한명일 것이다.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이 그를 통해 기록된 것도 매우 크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다. 크게 쓰임을 받은 만큼 고난도 많았고, 몸의 가시도 있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볼 때, 바울은 정말 부러울 것은 커녕 불쌍한 사람이다. 키고 작고 외모도 볼품없고, 그나마 있던 사회적 지위와 명성, 예수님때문에 다 버렸고, 혼자 살며 한 곳에 정착도 못하고 떠돌아 다니다가 결국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사형당한 인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그를 쓰셨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 수많은 생명, 헤아릴수 없는 생명이 하나님께 돌아왔다. 종교개혁도 그가 쓴 로마서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크게 쓰임받은 사울은 처음에 우리가 아는대로 박해자였고, 살육자였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한 사람을 통해 사울을 부르셨다.
그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온 아나니아다.
보통 아나니아라고 하면 누가 생각나나? 삽비라가 쌍으로 떠오를 것이다. 성령을 거스르고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오늘 본문에 나온 아나니아보다 훨씬 유명하다. 부정적이지만 유명하다.
그만큼 본문의 아나니아는 알려진게 전혀 없는 사람이다. 사울을 부르심에 쓰임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이름을 전혀 모르는 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나니아는 딱 이 본문에서만 등장한다. 그후 아나니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내려진 부르심은 사울을 일으키라는 부르심이었다.
그 부르심을 적은 것이 10절에서 12절의 말씀이다.
베드로가 기도하는중에 환상을 본 것처럼 아나니아도 기도중에 환상을 본다. 주님께서 임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구체적으로 명하신 것처럼 아나니아에게도 구체적으로 명령하신다.
거리이름까지 직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왜냐면 사울은 소위 말해 블랙리스트로 찍혀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별금지법이 올라오기만 하면 바로 반대를 표하는 것같이 사울이라는 이름이 있기만 하면, 그 사람이 다소사람 사울이 맞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매우 큰 관심사였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나쁜놈이 바로 사울이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며, 이 사울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지금 너가 생각하는 그 나쁜놈이 맞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당연히 좋은 소리가 나올수가 없다.
그런데 12절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이미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다고 한다. 환상중에 사울에게 아나니아가 갈 것이라고 보여주셨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 입장이라면 어떨까? 정말 어처구니 없고 황당하지 않겠는가?
자, 학교나 교회에서 엄청 하기 싫고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 생겼다고 하자. 그리고 거기에 책임자를 한명 정해야 한다고 하자. 여기서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향을 묻고 도저히 합의가 안되면 투표라도 해야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난 벌써 널 보내기로 사울하고 약속했으니 빨리 가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좋은 소리가 안나온다.
그러니 13절과 14절에 볼맨소리로 그게 말이 됩니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저보고 가라고 합니까?
14절은 또 무슨 소리인가? 모든 사람을 결박할, 쉽게 말해 감방에 잡아넣을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갔다가 저가 잡혀들어가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으신다. 그저 하나님의 뜻만 말씀하신다.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자, 이 말씀을 요약하면 어떻게 될까? 내가 선택했어. 내가 결정했어. 내가 알아서할게 다.
왜냐면 15절에 ‘열방을 위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고,
16절 마지막에는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뜻대로 하시다는 말씀이다. 어떤 보상을 주겠다도 없다. 그냥 내 뜻이고 이미 결정했으니 따라라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따른다. 베드로는 환상을 3번이나 보여주었음에도 끝까지 불결하고 더러운 것을 먹은 적이 없다며 거부했는데, 아나니아는 아무것도 아나니아 자신한테 약속된 것이 없는데도 따른다.
그리고 아나니아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일으키셨다.
그후 아나니아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ㄱ것은 없다. 여러자료를 찾아보니 그는 나중에 다메섹의 감독이 되었고, 쉽게 말해 다메섹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고, 순교했다고 한다. 어디서 어떻게 순교했는지도 잘 모른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은 크게 부르셨지만, 아나니아는 그냥 도구로 사도바울의 부르심의 도구로만 사용한 건가?
이게 억울한가? 우리의 상은 누가 주시는가? 바로 하나님이 주신다.
난 오히려 아나니아가 부럽다.
난 이 본문을 묵상하며, 내가 누군가에게 아나니아와 같은 자가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말을 듣고, 내 행동을 듣고, 내 모습을 듣고, 나는 생각나지 않아도,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변화되어 하나님께 사도 바울처럼 쓰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꼭 하나님께 보상을 받아야 우리 삶이 풍성한 삶인가? 꼭 내 이름이 빛나야지만 풍성한 삶인가?
처음에 말했듯이 사도 바울도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자에 불과하다. 그나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잘먹고 잘살기라도 했을텐데, 예수님복음 전한다고 평생을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감옥에서 고생하다 사형당한 죄수에 불과하다.
이 아나니아도 잘 기억하기도 힘든 이름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기억하지만, 아나니아와 사울은 기억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하나님앞에 보상을 바라지 않고 순종했기에, 하나님앞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썼다. 다메섹의 감독이 되어 위로, 인도했으며, 순교자의 피흘림에 동참한 자가 되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아나니아가 되었으면 좋겠다.
비록 그 사람이 나중에 나를 잊는다하더라도, 나를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계기가 되고, 그 사람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나만 그런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나니아가 되길 바란다.
왜냐면 그것이 하나님께 맡겨드린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맡겨드린 삶, 그 속에 참된 행복과 평안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나니아의 이름을 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잊지 않으시고 함께 하셨다.
바로 이 순종의 복을 받아, 우리가 누군가의 아나니아가 되기를 소망한다. 예수님이 역사하신 한 소년의 오병이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 찬양
다함께 기도
“내게있는 향유옥합” 찬양드리며 헌금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천천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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