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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혼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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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사건인 가나 혼인 잔치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을 다루고자 합니다. 신학적인 내용은 어렵더라도 ‘물이 변하여 포도주되었다’는 기적적인 사건을 주일학교 아이들부터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화여 포도주됐네 (중략)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시켜주소서’라는 아이들의 찬양을 잘 불러보면 오늘 해야할 설교의 핵심을 잘 나타낸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서교는 굳이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해야하는 부담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어떤 음식점에가서 그 음식이 아주 맛있으면 이건 뭘로 만들었는지 어떻게 조리를 했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새롭게 변화시켜 달라’는 그 맛을 아신다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왜 이렇게 이 사건을 가장 먼저 이야기했는지도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알고 있는 내용 ’새롭게 변화시켜 주세요’와 사도요한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이 같은지 우리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먼저,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살펴 볼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기적들이 있습니다. 2장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이 4장에,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기적’이 5장에, ‘5천명을 먹이시고’, ‘물위를 걷는 기적들’이 6장에 ‘예루살렘에서 소경을 치유하신 기적’이 9장에 마지막으로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이 11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이것만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기적은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 21:25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기적이 의미하는 바가 있고 그것을 저야 여러분들이 알기를 사도요한은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기적이라고 하지만, 신학적인 용어로는 ‘표적’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부른다고요, 네 맞습니다. 표적이라고 해야합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라고 삽니다. 예를 들어, 아픈 사람에게는 낳고 싶은 기적을, 직장이 정해지지 않은 젊은 친구들에게는 직장이 구해져 ‘기적적’으로 취업이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표적은 그 기적이 실제로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가리키고 있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죠. 다시 풀어서 이야기한다면 이런 7가지의 기적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해석이 되겠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기적은 나도 변화시킨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네요’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이런 기적적인 사건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를 오늘 가나 혼인잔치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두 번째로 살펴야 할 것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면서 어떤 장치를 이용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이 아주 재미있는 것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친절하게도 이 책의 기록 목적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동사 두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1절은 가정법을 사용한 문장인데 여기서 “믿게 하려고”라는 동사는 부정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가정법 문장에서 시제는 시간을 가진 것이 아니라 상(이미지)을 가지는데 부정과거의 상은 단회적이며 현재의 상은 지속적이다. 다시 말해서 ‘믿게하려고 과거에는 전도를 했고, 현재에는 양육을 하고 있다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죠. 어렵지요. 그래도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가지도록”은 무엇을 가지도록 하는가요? 네! 맞습니다. ‘영생’이다. 그래서 가지도록이라는 단어는 영생의 ‘목적어’다 라고 합니다. 이 부분도 쉽게 말해보면 ‘영생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지속적인 믿음을 통해서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이 필수적으로 양육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요한복음에 전도와 양육의 목적 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난다. 요한복음의 당사의 독자를 생각한 장치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먼저는 요한공동체인데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또 한 그룹은 헬라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자로 구성되어져 있었습니다 .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도 믿음이 오랜 분도 계시고 이제 시작하는 분도 계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학문적인 단어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멋진 장치가 있습니다.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바로 요한복음에는 두 가지 형태를 계속해서 비교하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과 악, 빛과 어둠, 요한 서신에는 사랑과 미움,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계시록에서는 하늘과 땅, 천사와 사탄 이렇게 서로 다른 개념 두 개를 비교하는 장치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장치는 어떤 효과를 낼까요. 먼저 된 자에는 믿게 하심의 동력원을 점검하게 하고 이제 믿음을 갖는 자들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 동력원을 삼는 현장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합니다.
그럼이제 2장에는 어떤 발견되는 표현은 무엇일까요? 저는 여러분께 ‘있음과 없음’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1절에는 혼례가 있다. 예수도 있다 어머니도 있다. 3절에는 포도주가 없다. 항아리가 있다. 항아리에 물이 없다. 9절에 가면 알지 못했다 하인들은 알았다. 이런 표현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럼 있음과 없음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니 이런 질문보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보다 먼저 ‘내게 없음은 무엇인가? 그리고 정말로 ‘있음’을 원하는가?라고 질문을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이런 물음은 처음 아이들이 부른 노래에도 적용이 됩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 나도 새롭게 변화되고 싶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에 바로 그런 것이 나타납니다. 특히 예수의 어머니의 말을 보면 5절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입니다. 7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입니다. 그래서 결과를 맛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10절에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끔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라고 말하는 것에서 그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저 기적을 보고 나도 그런 기적을 경험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이들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맛본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인들은 알더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이르신 것을 따르면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 말씀을 따라본 여러분은 두 그룹중 어디에 속하는지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 여러분은 어떤 그룹에 속하고 싶은지 결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의 노래에서 새롭게 변화시켜달라는 노래 앞 부분에는 ‘나에게도 말씀하셔서’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채우라, 채우니’ 주라, 주었더니’ 말씀하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아니라 그에 따른 반응에 있음을 유념해서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고 있습니까.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과 아는 사람’ 중에 ‘알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지식적으로 채워지면 그것이 곧 믿음을 성장하거나 마치 확실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초보에 있는 분들에게는 ‘저분처럼 나도 아는 것이 많아야겠다’하고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되는 것이죠. 오늘 이 표적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던 이유 곧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의 말을 통해 보여줍니다.
아마도 예수의 어머니는 그 혼례에 중요한 손님이었을 것입니다. 혼례는 대체적으로 가족들을 중심으로 치루어지고 유대가 깊은 공동체가 행하는 중요한 전통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와 함께 모친이 초대받은 것, 그리고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는 것도 아주 가까운 사이임을 알 수 있는 근거로 보입니다. 어쩌면 아주 가까운 가족의 일원이 치루는 혼례일 수 있습니다. 특히 종들이 어머니의 말에 따라 순종하는 것을 보면 가난한 예수님과 어머니의 행색에도 불구하고 분명 선한 영향력을 나타낸다 할 것입니다. 먼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어머니처럼 그 행함이 말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종들은 그가 가리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채우라 하니 채우게 됩니다’, ‘주라 하니 주게’되는 것입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혼례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관습에 어떤 날 결혼식을 하나요. 말 그대로 좋은 날 전문 용어로 ‘손 없는 날’이죠. 그래서 이런 날은 그냥 여건에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날을 받아서 한다고 합니다. ‘날을 받았다’이렇게 말하죠. 그럼 이런 날이 유대인들에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들은 첫째 날을 (주일)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월, 화, 수 이런 개념이 아니죠, 이들은 셋째 날을 특별히 길일로 보는데 이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다’고 세째 날에 두 번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일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고 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참 디테일 합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를 그리고 돌 항아리의 숫자도 그렇고 항아리가 있는 이유도 ‘정결 예식’ 때문이다고 친절하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제가 두 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유대인과 그렇지 않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말의 의미가 조금은 납득이 될실 것 같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사건의 핵심이 되는 것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사실이고 그 물이 담겨 있는 곳이 바로 여섯 개의 돌 항아리라는 것이고 돌 항아리의 용도는 ‘정결 예식’이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바로 ‘정결 예식’입니다. 왜냐하면 이 의미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대단히 아주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 우리가 일상에서 청결하게 하기위해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손을 씻습니다. 단순히 손만 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환경을 피하는 것도 포함되었기에 저는 청결보다 정결이 더 큰 의미가 있다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손 씻기는 개인 위생정도로 치부되었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반드시 해야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 되었죠. 마치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별 것 아닌 손 씻는 이것을 율법으로 정해서 지켰다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같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5장 1-2절에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 1-5절에는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고 자세하게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위생관념상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바로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중에 속죄제라 일컫는 제사가 있는데 원래는 ‘정결제’라고 하는 것이 의미상 더 맞는 것이라 학자들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의 머리 속이 복잡해지고 있지만 몇 가지 단어들이 막 떠오를 것입니다. ‘씻는다. 속죄한다. 정결케 한다. 변화되었다. 성도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맞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마치 맛있는 요리의 비법을 이야기할 때 이미 알고 있는 식재료나 갖은 양념 재료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재료와 양념들이 이미 머리속에 그려지듯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는 바로 이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장소인 지성소(지극히 거룩한 곳)에서 부터 시작해 ‘속’의 영역으로 구분이 되는데 이 경계를 넘나들 수가 없습니다. 바로 ‘죽음’이 그 경계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이유로도 거룩과 속의 경계는 넘나 들 수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속된 것’에 속하는 영역에는 정결과 부정으로 나눠 집니다. 방금 읽어드린 마가복음의 7장에 ‘부정’하다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더러워지진 상태가 되는 것이며 그 더러워진 사람들과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부정과 접촉함으로써 더러워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 까요? 바로 ‘정결예식’ 인 ‘정결제사’를 통해서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레위기의 정결, 성결 예식은 오랜 시간을 보내며 보다 쉬운 장로들의 전통으로 변질됩니다. 그것이 물로 손을 씻는 것을 통해 정결하다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고 율법으로 강제되어 지키는 것이 됩니다. 한 예로 예루살렘 성전에는 그 등급에 따라 들어가는 구역이 정해진 이유도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의 뜰 이상을 넘어서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죠.
또 다른 예가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않은 첫 번째 그룹이 있는데 ‘제사장과 한 레위’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피와 접촉을 하게되면 그들의 직무인 제사와, 제사의 집무에 수종을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설교에서 이들에 대해서 부정적 이미지로 말하곤 있습니다만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하여 지나가’는 것입니다. 본질은 사라지고 외형만 남은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 잔치에 정결예식을 대표하는 ‘돌 항아리 여섯’은 본질은 사라지고 외형남이 남아 버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식에 맞춰 물을 가득 담아두었을 것입니다. 정결예식 없이는 잔치라는 것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비었다는 것은 율법적으로 하객들이 다 써버린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 양을 보면 만만치가 않습니다. ‘두세 통’이라고 한 단위는 대략 40리터가 못됩니다. 그렇다면 100리터 안팎의 물이 들어가는 큰 용기이며 심지어는 돌로 만들어졌고, 그것이 6개나 있었습니다. 요즘 배달용 생수통이 18.9리터니 대락 30개 정도는 쌓아두어야 하는 것이죠. 나중에 종들에게 채우라고 했을 때 그들이 채워야 하는 양도 결국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비워져버린 것이 채워진 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없는 것 곧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어느 시인의 시를 여기에 빗대어 말해보고 싶습니다. 율법을 지키지만 아무 것도 아닌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잔치를 벌이고 그 속에서 정해진 의식을 치루면 ‘무엇이 된듯’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딱 하나가 없는 상태였다. 마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였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지만 그저 지어진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생기’ 곧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이번 문장에 김춘수 시인이 쓴 ‘꽃’이라는 제목의 시 내용의 몇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 시에서 바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듯 저는 ‘없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있음이 되어주셨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미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1장4절에 말했습니다.
결혼은 시작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축하해주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딱 하나가 빠졌습니다. ‘포도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주는 물입니다. 석회로 가득찬 물을 마실수 없는 척박한 상황에서 포도주는 생명입니다. 하인들에게 요구하신 ‘물을 채우라’하는 것은 흐르는 물 곧 생수를 채우라는 것입니다. 고인 물이 아닌 흐르는 물을 채워야 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생각합니다. ’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19 )그들에게 있어 잔치는 그것을 경험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 17:27) 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생명’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 28절에는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일상의 삶이 이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서 그런 삶의 극치가 ‘잔치’입니다. 그래서 잔치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날이라도 ‘먹고 마시고’ 세상의 끝날처럼 취해가는 것이죠.
요 며칠 젊은이들이 이태원의 클럽으로 모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들 속에 ‘생명’이 있습니까? 그들 중 확진자가 된 이들을 보십시오.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생명’, 간호사로 사람을 살린다는 ‘생명’, 교사로 아이들을 살린다는 ‘생명’이 없음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그들에게 자유가 있다하더라도 ‘무책임한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같이 생각해 볼 것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주일 예배로 모이는 것을 통제받으며 사람들은 마치 이것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처럼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 예배로 대처되면서 ‘아 이런 방법도 있구나’ , ‘나름 괜찮다’하면서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생명없는 즐거움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 생명은 어떻게 작용합니까?
포도주가 떨어진지라.(2:3) 이제 잔치는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손을 씻고 스스로 정결하다고 말했던 ‘몸짓’은 생명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아리에 다시 생수를 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20리터 짜리 생수통 30개 분량의 물을 길어다 채우라는 것입니다. τοῖς διακόνοις 에는 관사를 보면 예수님의 모친은 특별히 하인들을 구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경험을 목격하게 됩니다. 길어 부을 때가 아니라 떠다줄 때 ‘하인들은 알더라’ 무엇을 알았을까요? ‘예수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의 어머니 역시 몰랐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말입니다. 사도요한은 알고 모름과 있음과 없음을 분명하게 갈라 놓기보다는 우리의 삶 속에 연속되는 그 과정에서 뒤엉켜있으며 아는 것 같아도 모르고 모르는 것 같아도 아는 것의 이중 의미를 잘 숨겨 놓은 것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왜 일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야기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아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아는 것들이 우리 속에서 ‘생명’ 작용을 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도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마음에 뜨거움 아니 저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따듯함 정도라도 느낌이 있다면 ‘아는 것’입니다. 눅24:13절 이하에는 엠마오로 떠나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이야기하면서 다 아는 것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진작 16절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 들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니’ 그렇게 물으시고 그들은 그들이 아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27절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떠어 그들에게 주’실 때 알게 되었습니다. 곧 주님을 아는 먹고 마심이 되듯 잔치는 그 잔치의 주인공과 아는 먹고 마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고백합니다. 저의 실력 없음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 마음 속에 한 성령으로 계시니 깊은 말씀의 자세함을 여러분께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 제자들이 자세한 설명을 듣는 일은 곧 묵묵히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물을 길어 그 많은 항아리를 채우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일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하인들의 묵묵한 수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곧 그가 생명이심을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일이었습니다. 마치 결혼이 새로운 시작이듯, 이제 새 시대의 도래 곧 새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샘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아인’입니다. 이 단어는 ‘눈’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물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눈으로 보는 우리의 모습을 떠 올리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우리의 생활 속에서 물은 그저 나를 청결하는 일을 넘어서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까지 코로나를 이기는 가치의 변화를 요구하듯 물을 먹고 마실 때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서 ‘나에게도 말씀하셔서 새롭게 변화시켜주세요’ 라는 고백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채우라 하신즉 채우는, 갖다 주라 하시니 갖다 주는 삶의 순종을 통해 영광이 나타날 때 ‘물 떠온 하인들은 아'는 것처럼 ‘믿게 하려고' 하신 말씀을 순종하여 ‘가지도록'하게 하신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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