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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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Καὶ ἐξελθὼν ἐπορεύθη κατὰ τὸ ἔθος εἰς τὸ Ὄρος τῶν Ἐλαιῶν,* ἠκολούθησαν δὲ αὐτῷ °καὶ οἱ μαθηταί. *40 γενόμενος δὲ ἐπὶ τοῦ τόπου εἶπεν αὐτοῖς· Προσεύχεσθε μὴ ⸀εἰσελθεῖν εἰς* πειρασμόν. *41 καὶ αὐτὸς ἀπεσπάσθη ἀπʼ αὐτῶν ὡσεὶ λίθου βολὴν καὶ θεὶς τὰ γόνατα ⸀προσηύχετο *42 λέγων· ✽ Πάτερ, ⸂εἰ βούλει ⸀παρένεγκε τοῦτο τὸ ποτήριον ἀπʼ ἐμοῦ· πλὴν μὴ τὸ θέλημά μου ἀλλὰ τὸ σὸν γινέσθω⸃.* ⟦ *43 ὤφθη δὲ αὐτῷ ἄγγελος ⸀ἀπʼ οὐρανοῦ ἐνισχύων αὐτόν.* 44 καὶ γενόμενος ἐν ἀγωνίᾳ ἐκτενέστερον προσηύχετο· ⸂καὶ ἐγένετο⸃ ὁ ἱδρὼς αὐτοῦ ὡσεὶ θρόμβοι αἵματος ⸁καταβαίνοντες ἐπὶ τὴν γῆν.⟧ *45 καὶ ἀναστὰς ἀπὸ τῆς προσευχῆς ⸆ ἐλθὼν πρὸς τοὺς μαθητὰς εὗρεν κοιμωμένους αὐτοὺς ἀπὸ τῆς λύπης,* 46 καὶ εἶπεν αὐτοῖς· °Τί καθεύδετε;* ἀναστάντες προσεύχεσθε, ἵνα μὴ εἰσέλθητε εἰς πειρασμόν.

*39 Καὶ ἐξελθὼν ἐπορεύθη κατὰ τὸ ἔθος εἰς τὸ Ὄρος τῶν Ἐλαιῶν,* ἠκολούθησαν δὲ αὐτῷ °καὶ οἱ μαθηταί.
그리고 그는 나가서(부과능분단주남) 습관을 따라 그 올리브산으로 갔다(부과수직3단).
‘가다’가 수동태다. 이것은 습관에 의해서 지배당했음을 뜻한다.
이사를 했는데 다른 생각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옛날 집으로 간 경우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감람산안에 한 봉우리가 겟세마나 동산이다.
이런 상태인데, 굳이 한밤중까지 유월절을 지낸 제자들도 함께 데리고 가셨다.
다른 성경에는 습관을 따라가 없다.
누가복음은 제자들보다 예수님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40 γενόμενος δὲ ἐπὶ τοῦ τόπου εἶπεν αὐτοῖς· Προσεύχεσθε μὴ ⸀εἰσελθεῖν εἰς* πειρασμόν.
그런데 그 자리에 왔을 때(부과중분단주남) 그들에게 말했다(부과능직3단). “유혹으로 들어가지 않기위해(부과능부) 기도하라(현중명2복)”
다른 곳에서는 ‘앉아있으라’라고 표현한다.
누가는 확실하게 ‘기도하라’고 기록한다.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께 더욱 집중했다.
그 이유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상황의 변화’를 위해가 아니라 ‘유혹’이다.
상황의 변화는 주위가 변하는 것이다.
유혹은 내가 변하는 것이다.
주위가 변해도 나자신은 변하지 않는 것, 기도의 목적이 그것이었다.
‘그런데(de)’가 쓰인 것으로 보아 이 말씀이 약간 이례적인 말씀인 것을 알수 있다.
*41 καὶ αὐτὸς ἀπεσπάσθη ἀπʼ αὐτῶν ὡσεὶ λίθου βολὴν καὶ θεὶς τὰ γόνατα ⸀προσηύχετο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서 돌 던질만큼 떠나졌고(부과주직3단) 그는 무릎을 꿇어(부과능분단주남) 기도하여(미완중직3단)
제자들은 가만히 있고 예수님께서 움직이신다.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수동적인 제자들과 능동적인 예수님을 그리고 있다.
*42 λέγων· ✽ Πάτερ, ⸂εἰ βούλει ⸀παρένεγκε τοῦτο τὸ ποτήριον ἀπʼ ἐμοῦ· πλὴν μὴ τὸ θέλημά μου ἀλλὰ τὸ σὸν γινέσθω⸃.*
말씀하고 있었다(현능분단주남). “아버지, 만약 원하신다면(현중직2단) 이 잔을 제게서 제하여주소서(부과능명2단). 그럼에도 제 뜻이 아니라 반대로 당신의 것이 이루어지소서(현중명3단)”
제자들앞에 능동적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앞에서는 철저하게 수동적이시다.
⟦ *43 ὤφθη δὲ αὐτῷ ἄγγελος ⸀ἀπʼ οὐρανοῦ ἐνισχύων αὐτόν.*
*43 ὤφθη δὲ αὐτῷ ἄγγελος ⸀ἀπʼ οὐρανοῦ ἐνισχύων αὐτόν.*
그런데 그에게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부과수직3단) 그에게 힘을 북돋아 드렸다(현능분단주남).
없는 사본도 꽤 있는 듯.
44 καὶ γενόμενος ἐν ἀγωνίᾳ ἐκτενέστερον προσηύχετο· ⸂καὶ ἐγένετο⸃ ὁ ἱδρὼς αὐτοῦ ὡσεὶ θρόμβοι αἵματος ⸁καταβαίνοντες ἐπὶ τὴν γῆν.⟧
그리고 고뇌속에 있게 되셔(부과중분단주남) 뜨겁게 기도하셨다(미완중직3단). 그리고 그의 땀이 핏방울처럼 땅으로 떨어지는(현능분복주남) 일이 있었다(부과중직3단).
43절과 44절은 예수님의 능동을 묘사한다.
제자들의 수동적임, 예수님의 능동적임
그러나 하나님앞에서는 수동적인 예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에는 능동적인 예수님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철저히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어진 것을 하셨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 일에 있어 추호의 망설임도 없고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기도하셨다.
하나님께 하는 일에 열정적인 예수님.
*45 καὶ ἀναστὰς ἀπὸ τῆς προσευχῆς ⸆ ἐλθὼν πρὸς τοὺς μαθητὰς εὗρεν κοιμωμένους αὐτοὺς ἀπὸ τῆς λύπης,*
그리고 그 기도로부터 일어나셔서(부과능분단주남) 그 제자들에게 와서(부과능분단주남) 그들이 슬픔으로 잠들었다는 것을(현수분복대남) 찾았다(부과능직3단)
기도하신 후 돌아와보니 제자들은 잠들어있었다.
다른 복음서에는 피곤해서 잠들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는 슬픔으로 잠들었다라고 되어 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배신에 대한 말씀이후 나름대로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만큼 한 것은 아닌거 같다.
46 καὶ εἶπεν αὐτοῖς· °Τί καθεύδετε;* ἀναστάντες προσεύχεσθε, ἵνα μὴ εἰσέλθητε εἰς πειρασμόν.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부과능직3단) “왜 자느냐(현능직2복)? 일어나서(부과능분복주남) 기도해라(현중명2복), 유혹에 들어가지(부과능가2복) 않기 위해서다.”
다른 곳에서는 3번 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한번만 적는다.
제자들이 중심이 아니다.
기도하세요
예수님처럼 기도하세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능동적이지만 수동적으로 하셨어요.
제자들에게 기도를 하게 권하는 것에 능동적이었고, 기도에 능동적이셨어요.
하지만 기도의 성취에 수동적이셨어요. 오직 성취는 하나님께 있거든요
설교
서론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위기가 닥쳐올 때, 고난 중에 있을 때, 힘들고 지칠 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힘들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을 찾아온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본문의 배경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날 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만찬을 다함께 하시지만, 그 분위기는 즐겁고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할 사람이 있는 것, 모든 제자들이 목자 잃은 양떼와 같이 흩어질 것, 베드로가 부인 할 것을 다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화려하게 입성하고 성전을 뒤엎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차례라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심각해져 있고,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당하기 전 마지막 밤을 기도로서 보낼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권면하십니다.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본문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께서는 매우 능동적으로 나타나시지만, 제자들은 반대로 매우 수동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통해 누가는 제자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의 시작은 39절부터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실 때, ‘습관을 따라.....가시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갔다’를 헬라어는 수동태로 적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 가운데, 늘 하시던대로 일어나 기도하러 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지도자로서 매우 부적절한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일어날 고난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소통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셔야 하나요. 아니면 제자들과 충분히 이야기하며 서로 소통하며 공감하게 해야 할까요. 보통 우리가 이런 상황에 부딪힐 때, 우리는 후자가 옳다라고 말을 합니다. 상하관계나 무엇에도 상관없이 충분한 대화와 소통이 중요한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심각해져 있는 상황, 그리고 분명 심각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분위기만 그런 것을 느끼고 가슴속 깊은 곳까지 공감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장 알맞게 이야기하시지 않으십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이야기할 능력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만약 교회나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아버지가 이런 심각한 상황을 대뜸 모든 가족이 모여 즐겁게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이 갑자기 들은 심각한 일에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아직 실제로 와닿지도 않아서 당황하고 있을 때, 그 말을 던진 아버지는 기도할 시간이니 기도하러 가겠다라고 말을 하고 떠나려고 한다면, 무슨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그것도 당장 내일 일어날 일인데요. 온갖 말들이 다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갑작스레 닥친 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갑작스런 일이나 말, 명령은 어떤 사람이든지 당황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이해시키고, 소통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러 가십니다. 그리고 혼자 기도하러 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공감하기는커녕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어쩌면 제자들이 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45절에 ‘제자들이 슬픔으로 인해 잠들었다’라는 표현이 이런 상황을 대변합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당황하고 고민했지만, 예수님과 소통하고 공감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잘못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능동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반대로 철저하게 수동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성취에 관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정말 잘아는 42절처럼 기도의 성취를 철저히 하나님께 맡기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통과 공감은 성령님께 있습니다. :13절, 축도로 쓰이는 말씀에서 나오다시피 성령님의 역할은 교통케 함입니다. 또한 :14에서는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죄악이 제자들과 예수님의 사이를 막고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상은 성령님의 사역이며, 자신의 십자가이후 되어질 일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상황을 설명하며 어떻게든 말과 행동,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조차 하나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살다보면 어떨 때, 엄마아빠가 너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분명 친구들과 있지만, 소외감을 느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하든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 돌아온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분명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기도안한지 오래되었나요?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끼지나요? 오히려 더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모가 자식의 길을 인도할 수는 있지만, 그 길로 가는 것은 자식의 선택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더라도 끝까지 그 길을 열어두십니다. 그러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능동적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로 능동적으로 나아오십시오. 말씀의 자리를 찾아 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 예배에 수동적이 된다면, 결국 제자들처럼 잘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머리로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슴으로 듣지는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제자들의 수동적인 모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왜 신천지에 대학생들이 빠집니까. 말씀에 수동적인 우리의 모습역시 분명한 원인입니다. 평소에 궁금하다고 하지만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보고 의문이 나는 점이 있지만 능동적으로 그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신천지가 하는 말에 푹 빠집니다. 그것이 역사적이 수없이 있어왔고, 수없이 잘못되었다고 지적된 방법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런 태도는 제자들에게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이전에도 3번이나 말씀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묻지 않습니다. 두려워하고 예수님의 뜻을 궁금해하지만 묻지는 않습니다. 그저 수동적으로 있으며, 예루살렘에 가면 다 잘 될거라는 식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십자가의 시험,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다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능동적으로 행동하셨습니다. 바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 능동적으로 행하셨습니다. 그분 자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그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데는 수동적이셨습니다. 결코 바꾸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따랐습니다. 그 자신이 성자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그리하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만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셔도 기뻐하십니다. 멀리 떨어진 자식이 돈필요할 때만 연락해서 돈보내달라고 해도 부모는 거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중에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소에도 연락하며 찾아 뵙고 어렵고 힘든 점도 나누고 기쁘고 즐거운 점도 나누는 자식에게 더욱더 많은 것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능동적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능동적이고, 기도에 능동적이십시오. 예배를 보는 자가 아니라 드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수동적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구하되, 바꾸려고 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오직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입니다.
여러 어려움이 있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능동적인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와 더욱 가까이 되어서 더욱 많은 것을 아버지와 나눌 수 있는 축복이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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