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말씀을 대적하는 마음 (막3:1-6)

마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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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서론

새가족과의 만남과 나눔에 신선한 자극-하나님을 알고 싶어 설레며 갈망했던 시절 생각,특별히 말씀을 사모하며 감격받았던 시절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다스리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그분의 삶으로, 가르침으로, 치유하심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말씀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영혼이 살아나고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능력의 기쁨과 감격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불만을 가진 마음의 태도가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지 못한다면 말씀에 대한 태도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마음을 감추려해도 예수님은 다 꿰뚫어 보셨습니다. 말씀은 우리 마음의 숨은 동기를 다 드러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점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쉽게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바리새인도 처음부터 악한 동기를 가진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민족을 더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자들이었기에 율법을 잘 지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도 마음이 변질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전에 아무리 주님을 사랑하였고 열정적으로 헌신했더라도 쉽게 변질되기 쉬운 마음이기에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안에 말씀을 대적하는 마음이 있다면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말씀을 대적하는 마음은 어떤 것인지 같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고발하려는 마음(2)

()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고발하려는 마음이 있으니 예수님의 모습에서 문제점만을 찾으려 주시하게 됩니다. 그들이 회당에 온 이유였던 “예배”의 목적을 잃어 버렸습니다. 고발하려는 마음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중요한 가치들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문제에 집중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시로 정말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변질되면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배타주의가 되버렸습니다. 이들이 고발하려는 마음이 든 이유는 교만해서입니다. 말씀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면서, 예배를 형식적으로 많이 드리면서 자신만의 기준이 생겨버리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율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구에서, 기준에 맞는지를 제는 잣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새 바리새인들에게는 안식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날에서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기준을 지키려는 날로 변해 버렸습니다. 안식일이 회복의 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의 날이 되버렸습니다.
이렇게 자신만의 잣대, 기준이 생겨 버린 사람은 고발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볼 수도 없고, 기대조차 안하게 됩니다. 성도님들의 오늘 하루는, 여기 지금 이 자리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있습니까? 아니면 내 마음의 기준을 가지고 누군가를 평가하는 눈빛으로 있습니까?
사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일은 허용되었지만 손 마른 사람의 치유는 굳이 안식일을어기면서까지 치유할 긴급한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루 지나서 해도 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예수님은 안식일에 그 손 마른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지금 고통받는 한 영혼이 더 중요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그들의 하찮은 규칙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리기 원하셨습니다.
성도님들 마음에 혹시 하나님께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굳이 오늘 하셔야 합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예수님앞에 “굳이”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우리가 주인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되셔야지만 예수님이 하실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을 끝없이 내밀면 우리 수준의 일 밖에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앞에 나에게 익숙한 모든 기준까지 깨뜨릴 수 있습니까? 자꾸 평가하고, 고발하고 싶은 나의 기준을 깨뜨릴 때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삶에 새로운 방식으로 박차고 들어와 경험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되신 주님은 우리 삶을 새롭게 창조하기 원하십니다. 나의 기준을 내려놓고 말씀앞에 나아갑시다. 내 삶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완악한 마음(5)

바리새인들의 고발하려는 마음을 아시면서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일으켜 세워 질문하십니다.
()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님의 말씀앞에 그들이 보인 반응음 잠잠함 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영적 권위 앞에 논리로 싸울 수 없음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하기도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 ‘잠잠하다’의 원어 시제는 미완료입니다.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폭로하셨는데도 그들은 그 마음을 바꾸기 싫어 계속해서 침묵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마음을 완왁한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완악함”: “굳은 마음, 냉담함”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에만 나오는데, ‘바른 말을 들어도 귀를 막고 끝까지 자기 입장을 바꾸지 않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10가지 재앙을 내려도 마음을 강퍅하게 했던 바로와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성령이 주시는 감동이 있으면서도 반응하지 않고 있다면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런 완악한 마음에 예수님은 탄식하시고 노하심으로 반응합니다. 예수님은 성령님께 민감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반응하십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슬픔의 탄식”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 본문에만 나오는 단어인데 ‘지극히 슬퍼하고 상처받은 마음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의 완고함에 주님은 이렇게 슬퍼하고 아파하십니다. 예수님의 노하심은 “의로우신 분노”입니다. 불의를 향해 참지 못하는 주님의 마음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앞에 목이 곧은 백성이 되지 맙시다. 우리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말씀의 감동을 무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은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말씀이 주는 성령의 감동에 애통해야 할 때 애통하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고,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하는 반응을 합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내 삶에 폭발적인 능력의 영향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3. 죽이려는 마음(6)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거부감은 고발하려는 마음에서 완악한 마음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더 나아가게 되면 죽이려는 마음에까지 가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무시할 때 우리는 죄에 동조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놀랍게도 바리새인들이 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헤롯당을 찾아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에 동조합니다.
()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율법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들이었다. 헤롯당은 세속적 권력과 돈과 명예를 추구하며 어느 정도 타협을 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리화 시키는 마음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점점 중요해질 때, 다른 가치들은 점점 작아지고,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지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정말 무서운 상태입니다. 그래도 고발하려는 마음, 완악한 마음은 부정적이더라도 예수님이 간섭하시는 것은 느낍니다. 그러나 죽이려는 마음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 영향력 등 모든 것이 싫어 차단하기 때문에 정말 위험합니다.
예전에 제가 대학생때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은 후 그것이 너무 좋아 후배들에게 훈련을 게 권면했는데도 망설이면 기도하면서 결정해 보자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후배는 기도 안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자기가 싫어하는데 하나님이 하라고 할 것 같아서 아예 안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더 이상 간섭하기를 원치 않는 상태… 이것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나의 영혼이 파괴되어 죽어가는 정말 위험한 상태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자유롭게 반응하며 행동하십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집중하여 한 영혼을 치료하고 회복시킵니다.
한 가운데 일어서라(3), 손을 내밀라(5b) – 멋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당당함이야 말로 정말 자유한 자의 삶입니다.
혹시 성도님들은 “에이 그래도 나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까지는 먹지 않지”라고 안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극단적입니다. 예수님의 편에 같이 서지 않으면 악한 것이며,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우리가 지속적으로 말씀의 감동을 무시하거나, 더 이상 말씀의 영향을 받기를 거절해 버린다면 우리는 내 마음 속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입니다.
()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성경에서도, 역사적으로도 배교한 자들이 있음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기 위해 구원하셨습니다. 내 삶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늘 인정함으로 말씀이 역사하는 삶이 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정죄감을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랑의 자리로 초대하기 위한 말씀으로 들리기를 소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것을 잘 아는 다윗은 범죄한 뒤 회개할 때 마음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의 숨은 것도 다 드러내실 때 피하지 맙시다. 우리 마음 안에 고발하려는 마음, 완악한 마음, 심지어 죽이려는 마음이 있다면 정직하게 주님앞에 드러냅시다. 그리고 다윗과 같이 우리도 기도합시다.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사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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