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2-5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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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그리스도의 비유설교는 솔로몬을 연상시켰다.
헬라어로 ‘비유’라는 말은 ‘잠언, 충고’와 같은 단어이다.
예수님은 비유를 설명해주시지 않는다.
모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상황이다.
말그대로 예수님께서 그들과 소통하지 않으신 것이다.
소통 이전에, 순종이다.
이 비유를 들으며 다들 이해했을까?
예수님께 얻으려고, 그것이 건강이든지, 후의 명예이든지 모였던 자들은 실망하고 돌아섰을 것이다.
또한 단순한 호기심으로 모였던 자들도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유를 궁금해하고 알기 위해 찾아오는 자들은 100배의 열매를 맺었을 것이다.
처음 3종류의 사람은 조금씩은 나아진다.
처음, 길에서는 아예 싹자체가 나지 않았다.
두번째는 싹은 오히려 빨리 난다. 그러나 말라버린다.
세번째는 싹이 나서 자라기까지 한다. 그러나 열매르 맺지 못한다.
이 세종류의 사람이 밭 안에 같이 있다.
여기 4종류의 씨앗을 말하면 마치, 씨앗이 4종류의 땅에 똑같은 수량으로 뿌려진 것처럼 나타난다.
팔레스틴은 우리처럼 심지 않고 뿌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바람에 흩날리거나, 길이나 돌짝에 뿌려게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누구도 쓸데없는 3군데와 좋은 땅에 씨앗을 똑같은 비율로 뿌리지는 않는다.
30배의 수확은 840kg 정도
당시 보통 10배란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다. 그러나 그중 가장 작은 수확이다. 왜냐면 제대로 뿌렸어도 그정도의 수확이 나오기 때문이다.(모든 씨를 좋은 땅에 뿌리면 40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흩어지는 것이 있기 때문에 30정도 될 것이다).
어리석고 무의미하게 행동하는 농부이지만, 본전은 한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손해보지 않는다.
설교
서론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당시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소위 말해 되는대로 살아간다. 물론 여러분중 몇몇은 나는 내 인생의 계획을 확실하게 세우고 있다.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갈지, 확실하지는 않아도 대략적인 윤곽은 잡고 있다고 반박할 수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유혹을 포용한다는 것은 그런 사회적, 신분적, 자본주의적 유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욕망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다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의식주를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욕망부터 시작해서 명예, 사회적 인정등 많은 부분에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그중에서 특히 의식주의 욕망, 소위 말해 본능이라고 불리는 욕망에 대해서 무척이나 관대하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죄가 되는가? 비싸고 좋은 옷들, 명품백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들고 다닌다고 죄가 되는가? 자기 능력만 된다면 마음껏 하라는 것이 요즘의 풍조이다. 그러니까 동성애도 허용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가 유혹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 나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사회가 뭐라고 해도 내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당연한 것이되는게 요즘 사회다. 아무리 부모님이 게임하는거 싫어해도 내가 게임하는게 재미있고 좋으면 게임은 좋은 것이다. 나에 대해서는 관대해지고, 남에 대해서는 인색해진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 하나님앞에 사는 것도 그에 영향을 받는다. 이전에 계시록을 하면서 잠시 다룬것처럼 신학조차, 성경을 보는 눈조차 그에 영향을 받는다.
동성애자들은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서역ㅇ도 동성애를 옹호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렇기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유혹이라 보셨고, 그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셨는지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다.
본론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득이나 자기 좋을대로 사용하는 것을 유혹이라 보셨다.
이것이 첫번째 유혹이다.
첫번째 유혹이 무엇인가?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마귀는 절대 그 떡을 먹으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40일을 굶었는데, 눈앞에 먹을게 생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먹지 않고 배길사람이 있겠는가?
금식수련회 3박4일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겠는가? 만약 돌들을 떡, 정확히 말하면 당시 일반적인 식사였던 납작한 빵, 우리로치면 밥으로 만드셨다면, 그것을 과연 먹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그걸로 끝나겠나? 밥먹으려면 반찬이 생각난다. 당연히 꿀을 만들거나 물을 만드시거나, 여러가지 먹을것을 만드셨을 것이다.
40일동안 그럴 능력이 없어서 금식하셨나?
마귀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와 능력을 네 맘대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혹은 앞서 내가 말했던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그것을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식욕과 결부시켜서 유혹한 것이다.
왜 이것이 유혹인가. 방금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40일동안 금식하셨다. 그리고 금식하는 동안 언제든지 돌들을 떡으로, 물을 꿀로, 다른 잡초들을 맛있는 음식으로 만드실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으셨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그 무엇보다, 하나님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우리의 죄를 짊어질 자신을 만드시는데 주력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유혹에 넘어가게 되면, 그 모든 시간들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말그대로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해진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시며, :3의 말씀을 인용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이다.
둘째는 방법에의 유혹이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고, 모든 것을 정당하고 아름답게 할 필요는 없지 않냐? 라는 말이다.
그 마음들은 다 다를까 틀릴까.
왜냐면 팔레스타인에서는 씨를 심는 것이 아니라 진짜 뿌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뿌리다보면 당연히 씨앗들이 다른데로 샌다.
서로 다른 부분이 있지만 이것이 두번째 유혹과 세번째 유혹에서 중요한 부분중 하나다.
두번째, 거룩한 성의 꼭대기로 마귀는 데리고 간다.
우리는 이로서 알수 있다. 거룩한 성의 꼭대기, 하나님의 보좌를 지금 사탄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 가셨을 때, 그렇게 화를 내신 이유이기도 하다. 성전꼭대기에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 있으니 그러신거다.
사탄은 유혹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신이 세상에 온 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가요? 지금 당신이 성전에 뛰어내림으로 능력을 보여주세요. 그 천사들을 보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면 내 수족이 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도 당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거에요.
원래 아래에서의 개혁보다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훨씬 쉬운법이다. 3년간 공생애, 고난의 세월과 십자가보다는 권력층에게 인상을 남겨 한방에 쉬운 길을 가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뭐로가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만 이루어지면 되지 않냐?
세번째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세상 전부가 지금 사탄의 손에 있으니, 잠시 내앞에 무릎을 꿇으면 되는게 아닌가?
눈앞에 불길이 있는데 그 불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 아닌가? 돌아가야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사탄은 하나님앞에 무릎꿇을수밖에 없으니, 잠시 사탄에게 굴복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잠시 세상의 낙을 누리는게 뭐가 나쁜까? 구밀복검, 표리부동하면 되는게 아닌가?
그리고 그 지방의 특성상 기반암, 암석층위에 앏게 흙이 덮인 곳도 꽤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원하셔서, 오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결론
우리에게도 유혹이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유혹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 눈은, 그 기준은바로 말씀이다. 그리고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도 말씀이다.
그러니 말씀으로 살길 바란다.
잡초가 자라는 곳도 당연히 있었다.
그러나 말씀을 가까이하고 외워도 우리에게 유혹이 찾아올 것이다. 첫번째로 말씀을 내 임의로 해석해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식으로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두번째처럼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란 식의 유혹도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결코 놓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도 그 모든 것을 노치지 않고 온전히 시험을 감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현명한 농부라면, 아니 기본적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그런 곳을 가려가며, 뿌려야 한다. 애당초 좋은 땅 말고는 밭도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러나 오늘 본문의 농부는 무능하고 멍청하다.
그러니 말씀을 등불삼자. 말씀을 도구 삼는게 아니라 나의 길과 등불, 따를 대상으로 삼자.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따라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그는 4가지 땅에 똑같은 양의 씨를 뿌리는 것처럼 묘사된다.
일반적인 농부처럼 좋은땅, 잘 갈아서 준비된 땅에만 집중적으로 뿌리는 것이 아니다.
길에도 뿌리고, 돌이 밑에 있는 앏은 흙에도 뿌리고, 가시덤불로 가득한 곳에도 뿌린다.
이 모든 씨앗들은 어떤 씨앗들인가? 낭비되는 씨앗들이다.
쉽게 말해보자. 우리 입장에서 비유를 바꿔보자.
조별과제를 해야한다.
내게 조원을 선택할 권한이 주어졌다.
그리고 조장은 나뿐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뽑을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뽑겠는가.
능력있는 사람. 나랑 잘 맞는 사람. 그래서 함께 조별과제를 쉽고 재미있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뽑을 것이다.
아예 과제를 할 의욕이 없는 사람 - 길
시작은 쉽게 하지만 끈기가 없어서 조금만 해도 실증내고 도망가는 사람. - 돌
이리저러 다른 게 많아서 자기 역할도 못하고 겨우 조모임만 참석하고, 그 모임시간에도 딴 짓하는 사람. - 가시
너희라면 뽑을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뽑으셨다.
다 부르셨다.
우리에게 주신 씨의 댓가가 자신의 아들의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처럼 그냥 얻게 된 권한이 아니라, 정말 목숨바쳐가며 얻은 귀한 씨를
아무 관심없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지금은 저렇지만, 언젠가 그 의욕없는, 길과같이 죽은 마음이 살아나길 바라시며,
쉽게 실증내고, 포기하고, 좋은 것, 입만 벌ㄹ리고 얻어먹기만 바라는 자들이 함께 그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시며,
하나님보다 내일, 시 시간, 내 돈, 나나나가 중요한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댓가가 그리스도의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좋은 땅에 뿌려진 자들에게도 30배만으로도 만족하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보통 그 당시 수확은 씨앗의 10배정도다
만약 4개의 씨앗을 좋은 땅에 다뿌리면 40이라는 수확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30이면 본전인가? 뿌리다보면 앞서 말했지만 날아가서 길이나, 돌짝,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도 있으니, 잘춰줘야 본전이다.
그럼에도, 30배로 기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그리스도라는 무능한 농부이다.
하나님께서 무능해지시더라도,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를 통해 열매를 보신다면, 기뻐하신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좋은 땅이 아닌, 앞선 3종류의 사람이 아닌가?
아예 말씀에도, 교회에서 하는 것에도, 관심없는 사람 아닌가?
아니면 네 예배 갈게요로 말은 쉽게 하지만, 조금만 어렵고, 나한테 더 편하고 조흔 길이 생기면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아닌가?
그것도 아니면, 내일이 먼저이고 우선이기에 하나님도 말씀도 기도도, 교회도 뒷전인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인내하시며, 무능한 농부라는 조롱을 들으면서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뿌리신다.
내가 좋은 땅이라 생각하는가? 그러면 몇배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30배라면 세상사람들, 안믿는 사람들이 조롱할 것이다. 그렇게 믿는데, 나랑 똑같네?라고 할것이다.
그러니 60배 100배를 위해서 기도하자.
그래서 세상을 향해 우리의 풍성함.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를 위해 우리의 마음을 갈고 닦자. 먼저 좋은 밭이 되자. 더 많은 수확을 위해 달려가자.
바로 말씀과 기도, 에배와 찬양, 그속에서 들려지는 하나님께 순종함만이 우리를 그 곳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 모두 100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기를.
“세상 흔들리고” 찬양
다함께 기도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찬양드리며 헌금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천천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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