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2-4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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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단어가 유혹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왜냐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치관은 모든 유혹을 포용하는 풍조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위 말해 되는대로 살아간다. 물론 여러분중 몇몇은 나는 내 인생의 계획을 확실하게 세우고 있다.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갈지, 확실하지는 않아도 대략적인 윤곽은 잡고 있다고 반박할 수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유혹을 포용한다는 것은 그런 사회적, 신분적, 자본주의적 유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욕망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다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의식주를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욕망부터 시작해서 명예, 사회적 인정등 많은 부분에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그중에서 특히 의식주의 욕망, 소위 말해 본능이라고 불리는 욕망에 대해서 무척이나 관대하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죄가 되는가? 비싸고 좋은 옷들, 명품백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들고 다닌다고 죄가 되는가? 자기 능력만 된다면 마음껏 하라는 것이 요즘의 풍조이다. 그러니까 동성애도 허용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가 유혹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 나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사회가 뭐라고 해도 내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당연한 것이되는게 요즘 사회다. 아무리 부모님이 게임하는거 싫어해도 내가 게임하는게 재미있고 좋으면 게임은 좋은 것이다. 나에 대해서는 관대해지고, 남에 대해서는 인색해진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 하나님앞에 사는 것도 그에 영향을 받는다. 이전에 계시록을 하면서 잠시 다룬것처럼 신학조차, 성경을 보는 눈조차 그에 영향을 받는다.
동성애자들은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서역ㅇ도 동성애를 옹호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렇기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유혹이라 보셨고, 그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셨는지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다.
본론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득이나 자기 좋을대로 사용하는 것을 유혹이라 보셨다.
이것이 첫번째 유혹이다.
첫번째 유혹이 무엇인가?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마귀는 절대 그 떡을 먹으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40일을 굶었는데, 눈앞에 먹을게 생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먹지 않고 배길사람이 있겠는가?
금식수련회 3박4일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겠는가? 만약 돌들을 떡, 정확히 말하면 당시 일반적인 식사였던 납작한 빵, 우리로치면 밥으로 만드셨다면, 그것을 과연 먹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그걸로 끝나겠나? 밥먹으려면 반찬이 생각난다. 당연히 꿀을 만들거나 물을 만드시거나, 여러가지 먹을것을 만드셨을 것이다.
40일동안 그럴 능력이 없어서 금식하셨나?
마귀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와 능력을 네 맘대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혹은 앞서 내가 말했던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그것을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식욕과 결부시켜서 유혹한 것이다.
왜 이것이 유혹인가. 방금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40일동안 금식하셨다. 그리고 금식하는 동안 언제든지 돌들을 떡으로, 물을 꿀로, 다른 잡초들을 맛있는 음식으로 만드실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으셨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그 무엇보다, 하나님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우리의 죄를 짊어질 자신을 만드시는데 주력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유혹에 넘어가게 되면, 그 모든 시간들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말그대로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해진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시며, :3의 말씀을 인용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이다.
둘째는 방법에의 유혹이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고, 모든 것을 정당하고 아름답게 할 필요는 없지 않냐? 라는 말이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를 물어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데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부분이 있지만 이것이 두번째 유혹과 세번째 유혹에서 중요한 부분중 하나다.
두번째, 거룩한 성의 꼭대기로 마귀는 데리고 간다.
우리는 이로서 알수 있다. 거룩한 성의 꼭대기, 하나님의 보좌를 지금 사탄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교회오는 사람도 있다. 그저 습관처럼, 부모님이 시켜서, 몸에 익어서 교회에 오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 가셨을 때, 그렇게 화를 내신 이유이기도 하다. 성전꼭대기에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 있으니 그러신거다.
사탄은 유혹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신이 세상에 온 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가요? 지금 당신이 성전에 뛰어내림으로 능력을 보여주세요. 그 천사들을 보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면 내 수족이 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도 당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거에요.
오늘이 무슨 날인가. 설 연휴중이다. 이 설날에 친척과 가족들도 중간에 뿌리치고 우리가 여기로 모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원래 아래에서의 개혁보다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훨씬 쉬운법이다. 3년간 공생애, 고난의 세월과 십자가보다는 권력층에게 인상을 남겨 한방에 쉬운 길을 가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뭐로가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만 이루어지면 되지 않냐?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는 본문이다.
세번째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세상 전부가 지금 사탄의 손에 있으니, 잠시 내앞에 무릎을 꿇으면 되는게 아닌가?
눈앞에 불길이 있는데 그 불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 아닌가? 돌아가야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사탄은 하나님앞에 무릎꿇을수밖에 없으니, 잠시 사탄에게 굴복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잠시 세상의 낙을 누리는게 뭐가 나쁜까? 구밀복검, 표리부동하면 되는게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원하셔서, 오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지난 주, 예수님께서 부르신 기준과 제자들이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말했다면, 예수님과의 생활속에서 자란 제자들, 믿은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
우리에게도 유혹이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유혹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고 있다.
왜 교회에 오는 이유를 말하다가 뜬금없이 제자들의 파송이야기를 하는줄 아는가?
그 눈은, 그 기준은바로 말씀이다. 그리고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도 말씀이다.
그들이 처음에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부르심의 이유를 알고 따라갔을까?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보고, 함께 산 결과, 부족하지만, 파송을 받을 정도로 자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이유를 찾았다. 물론 그 이유는 오직 이스라엘의 회복, 로마에서의 독립과 개인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는 이유, 그들이 따르는 자신의 개인의 영광과 민족의 부흥이 아닌, 진정한 이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들을 파송하며 두가지를 주셨다. 그 두가지와 이유를 알아보자.
본론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조금더 자라기를 바랬다. 그때문에, 그냥 보내지 않으신다. 두가지를 주시면서 보내신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주신 두가지와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는, 회복하고 치유하는 권능을 주신다.

그 당시 귀신들리고, 병에 걸려 신음하고 약해진 자들은 누구일까? 당연히 하층민들이다. 예수님 본인이 고치시면 부자들이나 바리새인, 사두개인같이 신분이 높은 자들도 올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이런 높은 자들이 오겠는가? 제자난들이 만날 자들은 대부분 가난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개인의 영달을 바라는 제자들을 보시고, 그들이 진정 찾아가야할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알기를 바라신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제자로서 누려야할 영광 이전에, 예수님의 눈이 보는 것을 제자들이 보기를 원하셨다.

둘째, 복음과 복음을 가진 자로서의 담대함을 주신다.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행하는 어떤 기적이라도, 결국 무의미하게 된다.
신대원 다닐 때 반우스개소리 : 위장병고치는 은사있음 부흥한다.
아무리 병을 고친다하더라도, 그들의 삶과 환경이 변하지 않는한, 결국 다시 병에 걸릴 것이다. 중병에 걸린 환자들을 입원시키는 것도, 결국 병을 키우는 환경에서 병을 고치는 환경으로 옮기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죽을 것이다. 죽을 그들을 죽지 않는 환경, 병에 걸릴 환경이 아닌 영원한 행복으로 있는 환경,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복음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하게 한 것이다. 잠시의 평안을 주는 병고침, 귀신쫒음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의 권세를 주신것이다.
동시에 그 천국복음을 가진 자로서의 담대함을 주셨다.
10절 하반절처럼 일꾼이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전, 8절에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라고 하신다. 의사처럼 병을 치유하고, 마음도 치유하였지만, 그 치유의 댓가를 받기를 원치 않으셨다. 왜냐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반대로 10절처럼 하나님을 따라 가는 그들을 사람들이 섬기게 하셨다.
그 천국복음을 듣는 자들이 아무리 못사는 자들이라도, 복음을 가지고 온자들을 섬기며 복음을 가진 자들은 복음으로 그들을 섬기며, 함께 천국의 기쁨을 나누며, 복음의 담대함을 얻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게 하셨다.
정리하자면, 복음과 복음을 가진 자로서의 담대함을 주신 이유는,
복음을 전할 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고, 복음의 담대함을 가질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남을 알게 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돈도 없고 사람들을 치유해주는데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지만, 그 모습을 보며, 존경하며, 또한 필요한 것들이 넘치도록 채워짐, 서로 사랑과 존중속에서 채워짐을 경험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땅의 권력자처럼,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회복의 권능을 통해, 제자들이 자신들이 받을 영광과 권세가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원하셨다.
또한 복음과 담대함을 통해 하나님을 따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며, 채워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사랑과 관용, 인내와 용납속에서 더욱 커감을 느끼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 시야, 내 기준에 맞춘 비전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시야, 하나님의 기준으로 꿈꾸게 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이를 이룬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후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복음과 복음을 가진자로서의 담대함을 얻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믿는 자들이 가진 물건을 통용하며, 제자들은 사도로서 직책을 다하며 세워진 집사들과 성도들은 그들을 존경하며 존중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응ㄹ 알게 하셨다.
우리는 어떤 비전을 꿈꾸고 있는가.
우리는
의사이든, 연예인이든, 기업가이든, 아니면 회사의 직원이든 상관없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나를 보고, 주위를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복음을 가진자로서 담대함을 가지기 바란다.
또한 앞선자들을 섬기며,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
그런 자가 되며, 그런비전을 품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바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삶에서 경험하며, 그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니 말씀으로 살길 바란다.
그러나 말씀을 가까이하고 외워도 우리에게 유혹이 찾아올 것이다. 첫번째로 말씀을 내 임의로 해석해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식으로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두번째처럼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란 식의 유혹도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결코 놓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도 그 모든 것을 노치지 않고 온전히 시험을 감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러니 말씀을 등불삼자. 말씀을 도구 삼는게 아니라 나의 길과 등불, 따를 대상으로 삼자.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따라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처음과 나중” 찬양
다함께 기도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찬양드리며 헌금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천천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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