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2-3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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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단어가 유혹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왜냐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치관은 모든 유혹을 포용하는 풍조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위 말해 되는대로 살아간다. 물론 여러분중 몇몇은 나는 내 인생의 계획을 확실하게 세우고 있다.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갈지, 확실하지는 않아도 대략적인 윤곽은 잡고 있다고 반박할 수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유혹을 포용한다는 것은 그런 사회적, 신분적, 자본주의적 유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욕망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다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의식주를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욕망부터 시작해서 명예, 사회적 인정등 많은 부분에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그중에서 특히 의식주의 욕망, 소위 말해 본능이라고 불리는 욕망에 대해서 무척이나 관대하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죄가 되는가? 비싸고 좋은 옷들, 명품백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들고 다닌다고 죄가 되는가? 자기 능력만 된다면 마음껏 하라는 것이 요즘의 풍조이다. 그러니까 동성애도 허용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가 유혹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 나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사회가 뭐라고 해도 내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당연한 것이되는게 요즘 사회다. 아무리 부모님이 게임하는거 싫어해도 내가 게임하는게 재미있고 좋으면 게임은 좋은 것이다. 나에 대해서는 관대해지고, 남에 대해서는 인색해진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 하나님앞에 사는 것도 그에 영향을 받는다. 이전에 계시록을 하면서 잠시 다룬것처럼 신학조차, 성경을 보는 눈조차 그에 영향을 받는다.
동성애자들은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서역ㅇ도 동성애를 옹호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렇기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유혹이라 보셨고, 그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셨는지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다.
본론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득이나 자기 좋을대로 사용하는 것을 유혹이라 보셨다.
이것이 첫번째 유혹이다.
첫번째 유혹이 무엇인가?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마귀는 절대 그 떡을 먹으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40일을 굶었는데, 눈앞에 먹을게 생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먹지 않고 배길사람이 있겠는가?
금식수련회 3박4일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겠는가? 만약 돌들을 떡, 정확히 말하면 당시 일반적인 식사였던 납작한 빵, 우리로치면 밥으로 만드셨다면, 그것을 과연 먹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그걸로 끝나겠나? 밥먹으려면 반찬이 생각난다. 당연히 꿀을 만들거나 물을 만드시거나, 여러가지 먹을것을 만드셨을 것이다.
40일동안 그럴 능력이 없어서 금식하셨나?
마귀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와 능력을 네 맘대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혹은 앞서 내가 말했던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그것을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식욕과 결부시켜서 유혹한 것이다.
왜 이것이 유혹인가. 방금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40일동안 금식하셨다. 그리고 금식하는 동안 언제든지 돌들을 떡으로, 물을 꿀로, 다른 잡초들을 맛있는 음식으로 만드실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으셨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그 무엇보다, 하나님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우리의 죄를 짊어질 자신을 만드시는데 주력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유혹에 넘어가게 되면, 그 모든 시간들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말그대로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해진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시며, :3의 말씀을 인용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이다. 요즘 스승과 제자라고 하면 낯선 개념이다. 이 개념은 튜터가 아니라 멘토와 멘티에 가깝다 할 수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심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받을 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꿈을 꿀 사람을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슨 기준으로 제자를 부르셨을까? 제자들은 그 부르심에 반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함께 나눠보기 바란다.
둘째는 방법에의 유혹이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고, 모든 것을 정당하고 아름답게 할 필요는 없지 않냐? 라는 말이다.
서로 다른 부분이 있지만 이것이 두번째 유혹과 세번째 유혹에서 중요한 부분중 하나다.
두번째, 거룩한 성의 꼭대기로 마귀는 데리고 간다.
우리는 이로서 알수 있다. 거룩한 성의 꼭대기, 하나님의 보좌를 지금 사탄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 가셨을 때, 그렇게 화를 내신 이유이기도 하다. 성전꼭대기에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 있으니 그러신거다.
사탄은 유혹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신이 세상에 온 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가요? 지금 당신이 성전에 뛰어내림으로 능력을 보여주세요. 그 천사들을 보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면 내 수족이 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도 당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거에요.
원래 아래에서의 개혁보다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훨씬 쉬운법이다. 3년간 공생애, 고난의 세월과 십자가보다는 권력층에게 인상을 남겨 한방에 쉬운 길을 가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뭐로가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만 이루어지면 되지 않냐?
본론
세번째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세상 전부가 지금 사탄의 손에 있으니, 잠시 내앞에 무릎을 꿇으면 되는게 아닌가?
눈앞에 불길이 있는데 그 불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 아닌가? 돌아가야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사탄은 하나님앞에 무릎꿇을수밖에 없으니, 잠시 사탄에게 굴복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잠시 세상의 낙을 누리는게 뭐가 나쁜까? 구밀복검, 표리부동하면 되는게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원하셔서, 오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결론
본문 17절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외치신 말씀이시다. 예수님께서 외치신 것은 구원도 위로도 소망도 아닌 회개다. 자신의 삶을 뒤집어서 하나님께로 되돌리리를 원하신 것이다.
우리에게도 유혹이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유혹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 눈은, 그 기준은바로 말씀이다. 그리고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도 말씀이다.
그러니 말씀으로 살길 바란다.
그러나 말씀을 가까이하고 외워도 우리에게 유혹이 찾아올 것이다. 첫번째로 말씀을 내 임의로 해석해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식으로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두번째처럼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란 식의 유혹도 찾아올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기준도 이와같다. 자기생활과 환경보다 예수님을 따를 자를 찾으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결코 놓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도 그 모든 것을 노치지 않고 온전히 시험을 감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본문에 나온 것처럼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러니 말씀을 등불삼자. 말씀을 도구 삼는게 아니라 나의 길과 등불, 따를 대상으로 삼자.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따라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왜냐면 단순했기 때문이다. 고기를 잡는 사람이 무슨 학식이 많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가난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그물을 가지고 있었고, 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배처럼 크지는 않았겠지만 고기를 잡을만한 배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시대 배 유물
이 배는 1983년부터 4년간 극심한 가뭄이 있을 때, 1986년에 갈릴리호수의 갯펄에서 발견된 배이다.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주전120년에서 주후40년 정도까지 사용되었던 배로 탄소동위원소측정법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즉, 예수님 시대에 어부들이 타고 고기잡이를 했던 배란 말이다. 이 배를 복원한 사진이 이것이다.
사진에 나온 배는 예수님당시에 고기잡이용으로 쓰였던 배이다. 예수님께서 타고 설교를 하신 베드로의 배 역시 이정도 크기로 여겨진다.
복원한 베드로의 배
예수님께서 타고 설교를 하신 베드로의 배 역시 이정도 크기로 여겨진다. 이 배의 길이는 8.2미터 폭은 2.3미터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우리의 상상처럼 그렇게 가난한 사람이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어부로서 배우지 못한 자임은 분명하다. 또한 재산은 있을지언정 하층민에 속한 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리고 이 배는 베드로뿐 아니라 베드로 집안을 먹여살리는 소위 말해 보물 1호 였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즉시 예수님을 따랐다.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처지와 환경, 심지어 재산과 가족보다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자들을 찾았던 것이다.
왜냐면 그래야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모든 소유, 심지어 22절에 나오는바와 같이 아버지를 버려두고 갈 수 있었을까.
여기서 나오는 버려두다는 단어는 쉽게 말해 포기하다라는 단어다. 모든 소유권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아버지를 버려두었다는 것은 자신의 핏줄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먼저 생각했다는 뜻이다.
이들이 무슨 초월적인 통찰력이 있어서 예수님을 보자마자 아 구주이시구나 라고 따랐을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이 아니라 빛을 환히 내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랬을까? 둘다 아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부르시기전에 이미 많은기적과 가르침을 주신다.
귀신도 내쫓으시고, 병자도 고치신다. -41을 보면 시몬의 장모를 고치셨다는 말씀도 있다. 이 시몬은 베드로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역시도 이미 예수님의 능력과 사역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그 크신 예수님, 최소한 선지자이며, 메시아일지 모르는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8처럼 무릎을 꿇고 죄인임을 고백한 것이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는 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정리한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꿈을 꿀 자를 찾으셨다.그것이 제자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렴풋하게나마 알았기 때문에 그 부르심에 반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신다. 알려주시기를 원하시고 보이시길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있으며, 마음이 굳어져 있으면 결코 그 부르심에 반응하지 못한다.
출애굽기의 바로가 그렇고 이스라엘이 그랬다 하나님의 역사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수 있나?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실 때처럼 육체를 가지고 돌아다니시나? 그것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방법은 하나뿐이다. 말씀대로 사는 것. 쉽게 말해 헌신하는 것이다.
요즘 헌신하라고 하면 다들 싫어한다. 열정페이다 뭐다 말이 많다.
부자동네, 가난한 교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나아오시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라고까지 말씀하신다.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나도 대학시절, 또한 사역을 꽤하면서도 헌신하라는 말을 별로 않좋아했다. 그 말 한마디에 그 사람의 노력, 땀, 재물까지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본을 보이셨다.
당시 대제사장은 재물을 뺏었고, 그 결과 그 밑의 제사장들은 굶어죽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지 않으시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가자. 말씀을 따르자. 그 가운데 피곤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있다. 그때, 예수님께 부르짖자.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결국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길을 걸어가고 같은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해 이기쁨이 나타나기를.
“그가 오신 이유” 찬양
다함께 기도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찬양드리며 헌금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천천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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