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8.저녁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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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쪽 좌석에서 기도
종치기
다함께 묵상기도 드림으로 주일저녁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찬송가 88장 찬양드리겠습니다.
김계룡 시무집사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출애굽기 5장 15절에서 21절입니다. 구약 88페이지입니다.교독하겠습니다.

15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16 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17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18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19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15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16 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7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18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19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호산나찬양대 찬양하겠습니다.
설교
서론
오늘 본문은 바로의 보복으로 인해 고통받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적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울 때, 고난과 환난이 다가왔을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살펴보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있기를 소망합니다.
서론
본론
앞선 10절에서 14절은 바로의 명령대로 그대로 이행하고 있는 감독들과 기록원들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록원이란 쉽게 말해 현장감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고용받고 여러 권력을 누리던 일본 앞잡이가 있었듯이, 그 당시 이스라엘에도 애굽에 의해 세움을 받은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4절에 보다시피 이들은 바로에 의해 세움을 받은 자는 아니고, 바로의 종, 신하들이 자신의 업무의 편의를 위해서 자기 임의대로 세운 자들로 보입니다.
시편 100편 1절은 감사의 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이 것은 이 시의 장르, 이 시가 어느때 불러지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쓰여졌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지어진 시이며, 그래서 감사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함께 본문을 살펴보며 언제나 감사할 수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다시피 이들은 애굽인 감독들과 한편이 되어서 함께 백성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의 명령은 무리한 명령이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물론 그들을 몰아세우던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도 애굽인 감독들에 의해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때까지 애굽인의 편에 서있던 기록원들이 바로에게 가서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본론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이 기록원들이 백성의 대표입니까. 백성의 대표는 장로들입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보았듯이 :29에는 장로의 대표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장로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46번 쓰이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장로라는 표현은 단 3번밖에 쓰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장로들만 모세와 아론의 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른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기록원들은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이들이 무슨 권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바로에게 나아갈 수있습니까. 이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바로에 의해서 임명받은 것도 아니고, 바로의 종, 신하들의 편의에 의해 임명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바로에게 가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이러니한 것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어떻게 했다고 성경에는 전혀 나와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첫째, 감사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분명 4:29에서 본바와 같이 이들은 이스라엘의 대표인데도, 그 역할은 전혀 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전에 바로가 갓난 남자아기를 물에 던지라고 할 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나온 것이라곤, 자신들보다 약할 수 있는 모세와 아론이 왔을 때, 백성들을 모은 것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정말로 필요할 때 이들,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들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굽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기록원들이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원, 애굽인의 하인에 불과했던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알고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수 있겠습니까. 기록원들이 실족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먼저 자신들을 당신의 종들, 바로의 종이라고 자칭입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다시피 이스라엘과 자신들은 종, 노예이며, 애굽인들은 바로의 백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하는 호소에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시의 주제가 감사인데, 시편 100편은 감사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감사의 시라는 제목이 붙지 않은 시편 136편은 25절이라는 긴 절 전체가 감사찬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에 반해 감사의 시라는 시편 100편은 감사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르라고 하며 시작합니다.
모세와 아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조차도 바로앞에서 당당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기록원들, 애굽인의 부하역할을 하던 자들이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로역시도 종에게 말하듯이 함부로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는 직역을 한 것인데, 이 말을 의역, 뉘앙스를 살려서 해석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이 즐거운 찬송이라는 말은 기쁨의 함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좀더 의역해서 즐거운 찬송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원 뜻은 함성, 고함이라는 뜻이며, 특별히 전장에서 외치는 함성입니다. 즉, 전쟁에서 돌격하기 전 사기를 고취시기며, 우리의 승리를 확신하며 지르는 함성을 뜻하는 말이 즐거운 찬송의 원 뜻입니다.
“너희가 게을러터졌으니,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라고 말하지.”
여기서 게으르다라는 말의 원래 뜻은 놓다, 풀리다, 축 늘어지다입니다. 바로의 뉘앙스는 너희가 할 일이 없어서 축 늘어져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드는 모양인데, 내가 긴장하도록 만들어주겠다입니다.
이와같이 바로는 이스라엘 기록원들뿐아니라, 이스라엘과 하나님까지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왜 즐거운 찬송이 되냐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기쁨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따금씩 우리나라의 축구같은 종목이 결승전에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라 전체가 들썩들썩합니다. 이겨라고 온갖 함성을 지르기도 합니다. 만약에 결승에서 승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너나할 것없이 완전 하나되는 축제가 열립니다. 그런데, 국운을 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리고 18절에 ‘이제 가서 일해라’ 라고 말을 합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라는 말을 한 이후에, 의도적으로 ‘가라’라는 말을 자신의 명령에 계속 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해라라는 말은 종, 노예와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종이 일하듯이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바로는 ‘너희는 내 종이니 내 뜻대로 가서 내 일이나 해라’ 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은 그제서야 이것이 자신들의 역량을 떠난 일이란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수를 써도 바꿀 수 없는 고난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후 20절은 기록원들이 길에 서있는 모세와 아론을 만났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1절은 이 승리의 함성, 기쁨의 함성을 온땅, 모든 피조물들에게 외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직 승리하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승리를 확신하며 즐거운 찬송, 기쁨의 함성을 지를 수 있습니까. 그 이유가 바로 5절입니다.
이 말씀은 기록원들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모세와 아론을 만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20절에 나온 서있다라는 단어는 대기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만나기 위해 간 기록원들을 기다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상황을 알고 마치 시험을 치르러 가는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기록원들의 반응은 모세와 아론을 향한 원망과 울분밖에 없습니다. 20절에 보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만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 공격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기록원들은 모세와 아론을 보자마자 울분에 차서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21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는 이 말이 시작하자마자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서 판단하다라는 말은 심판하다라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모세와 아론을 향해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할거야라고 저주를 퍼붇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 성실하심이 영원히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기쁨의 함성을 지를 수 있습니다.
기록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부름을 받은 모세와 아론도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의 말을 직접 듣고 백성들을 불러모았던 이스라엘 자손의 장로들도 아닙니다. 오히려 애굽과 타협하여 애굽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기록원들이 이렇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결국 바로에게 찾아가는 것은 이스라엘이 더욱 분열되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기록원들이 찾아가서는 안되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바로앞에 찾아갈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바로가 아니라 모세와 아론에게 가야 했습니다. 물론 애굽의 앞잡이노릇에 익숙해진 기록원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애굽에서의 실권은 없지만 원로로서 존경받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여, 이 기록원들을 설득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기록원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모세와 아론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과 하나님께서 바로를 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에 이르는 선함과 인자, 성실로 인해 이제 모든 땅에게 기쁨의 함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간을 선함과 인자, 성실로 덮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승리의 확신, 기쁨의 함성을 온땅과 그 위에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들리도록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고통스럽기 그지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었다면, 최소한 이스라엘이 분열되지 않고 한 마음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 이 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을 살피신 하나님, 이제 우리를 위해 사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으며 다시한번 바로가 아닌 하나님께 외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 현실은 변하지 않았겠지만, 이 사건은 바로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건이 아니라, 바로의 종, 애굽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다시피 단 한명의 이스라엘인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록원들이 바로를 만나러 갈 때, 그들을 기다린 자는 오직 모세와 아론밖에 없었습니다. 기록원들이 모세와 아론을 그렇게 맹렬히 비난할 때,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줄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승리를 확신하고 기쁨의 함성질렀던 온땅의 모든 믿는 자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나님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승리의 기쁨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승리로 얻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점점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6장 9절에서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6장 9절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라고 되어 있습니다.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만약 기존에 애굽에 머무르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아니면 다른 어떤 자중 단 한사람이라도 기록원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이스라엘을 다시 모았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바로의 마음을 걍퍅하게 하신다는 말씀을 나누었다면 어땠을까요. 최소한 마음의 상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6장 12절에 보다시피 모세의 마음도 무너져서 다시 ‘입이 둔한 자’라는 표현을 내뱉고 있습니다.
적용
둘째,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자입니다.
살다보면 고난을 당할 때도 있고, 혼란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고난과 혼란일 수도 있고, 공동체 모두의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분노의 목소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 목소리로 외쳐 기도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며, 각자 자신이 가진 생각과 기준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고 높으신 뜻이 무엇인지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세이며,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시간보다는 세상에 매여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당연히 시험에 드는 자도 나오며, 여러 가지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직분과 자리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다독이며 헌신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다가감을 묘사한 것이 2절과 4절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 때, 혼란이 생길 때, 우리의 역할 우리의 정체성, 하나님의 자녀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기록원들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세와 아론을 욕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욥과 같이 시험 속에서 정금같이 단련되어 하나님앞에 큰 자가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절은 가장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무엇인지 말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기뻐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내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그 치열한 전투로 얻은 전리품을 들고 한걸음씩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2절은 이런 승리의 개선행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얻은 전리품을 마땅이 드려야할 그분께 드린다는 마음을 가지고 개선행진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섬긴다는 기쁨은 하나님께 다가갈수록 점점더 커집니다. 처음에는 내 손에 있는 것, 내가 얻은 전리품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하나님의 모습이 점점더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게 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술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억지로 부르는 찬양, 남이 부르니 나도 부르는 찬양,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하는 노래가 아닌, 하나님이 커짐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찬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손에 든 전리품, 승리의 댓가보다, 하나님께서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바로 하나님께 가까이가는 출입증입니다. 전장에서 귀환하여, 그 힘든 싸움을 마치고 당당히 성문을 통과할 수 있게 해줍니다. 내 손에 든 전리품, 내가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성의 문 열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싸움을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그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고 시편 100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감사로서 문을 연 승리자는 기쁨의 개가, 승리의 찬송을 높이 부릅니다. 동시에 점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의 안뜰, 오직 하나님께 허락받은 자만이 들어가는 안뜰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더욱 하나님과 가꿔워졌습니다. 처음에는 저 멀리 있는 하나님입니다. 분명 내게 승리를 주실 것이고, 내 승리의 원천이 되시지만,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기쁨의 확신을 가지고 감사하며, 온땅에 선포합니다. 그 결과로 얻어진 것들,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나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립니다. 감사로서 드립니다.
그러다보면 내 안에 하나님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새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임을 느끼고 감사하게 됩니다.
2절과 4절은 이런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감사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며, 결국 나보다 높으신 하나님으로 내 전부가 채워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점점 가까워지며, 우리가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하나님을 앎으로 완성됩니다.
개선행진, 감사로서 개선행진을 하며 나를 하나님으로 채우는 경험을 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멀리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분투한 결과이며 내가 얻어낸 전리품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남들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왔고, 때로는 기쁨은커녕 무감정하게 하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허락하시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 우리를 처음부터 지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궁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작은 승리, 완전한 승리가 아니지만, 장차 올 완전한 승리가 내것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게 해주십니다.
이처럼 감사를 통해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자인지 알게 됩니다.
결론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감사할 일보다 힘겹고 원망스러운 일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이 비참해질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비참해지고, 이득앞에서 작아집니다.
또한 하나님께 점점 가까이갈 때, 항상 기쁨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알수록, 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승리했지만 불구가 되어 한편생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귀환병처럼, 온전치 못한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의 빛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전투로 손이나 발을 잃어버린 내 모습, 피투성이가 되어 지친체로, 전리품만이 내 모든 것인냥 쥐고 있는 내 모습이 드러납니다.
바울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3차 전도여행을 할 때 쓴, :9에서 그는 자신을 ‘사도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칭합니다. 처음 감옥에 갇혔을 때 쓴 :8에서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중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던 바울은 :15에서 자신을 ‘죄인중에 괴수’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내 손에 든 전리품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전하지 못한, 흠많고 상처투성이인 나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나간 둘째 아들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치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그 궁정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물론 어떤 때는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잊고 살 때도 있습니다.
삶에 시련이 닥칠 때, 승리의 함성, 전장의 함성은커녕 비굴한 신음소리도 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런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보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의 칼날, 세상의 공격앞에서 비굴해져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막아주시고 우리 앞서 전진하시는 우리의 대장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으시기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시며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하나님보다 내 손안에 있는 전리품, 세상에서 얻은 것에 눈이 어두워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강한 빛으로 우리를 비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궁정, 하나님의 존전에 이르러,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내가 했던 모든 싸움이 그저 하나님의 소유이신 목장에서 있었던 일의 일부임을 아시게 하십니다.
내 기쁨도, 내 슬픔도, 내 고난도, 내 아픔도, 내 자랑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세상이 나를 버려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과의 싸움, 나와의 싸움, 그 모든 순간을 믿음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며,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찬송가 515장 다함께 찬양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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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2020년 요람용 사진, 주소, 연락처등의 변경을 원하시는 분들은 12월 마지막 주까지 사무실로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ㅇ 이번 주 목요전도는 3남, 5여전도회입니다.
ㅇ 이번 주 금요기도회는 연합구역예배로 드리고, 특송은 중,고등부 교사입니다.
ㅇ 부산 여전도회 연합회 월례회가 내일 오전 11시에 여전도회관에서 있습니다.
ㅇ 환우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ㅇ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손잡으시고 좋으신 하나님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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