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가 누구이기에

출애굽기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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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וְאַחַ֗ר בָּ֚אוּ מֹשֶׁ֣ה וְאַהֲרֹ֔ן וַיֹּאמְר֖וּ אֶל־פַּרְעֹ֑ה כֹּֽה־אָמַ֤ר יְהוָה֙ אֱלֹהֵ֣י יִשְׂרָאֵ֔ל שַׁלַּח֙ אֶת־עַמִּ֔י וְיָחֹ֥גּוּ לִ֖י בַּמִּדְבָּֽר׃

2 וַיֹּ֣אמֶר פַּרְעֹ֔ה מִ֤י יְהוָה֙ אֲשֶׁ֣ר אֶשְׁמַ֣ע בְּקֹלֹ֔ו לְשַׁלַּ֖ח אֶת־יִשְׂרָאֵ֑ל לֹ֤א יָדַ֨עְתִּי֙ אֶת־יְהוָ֔ה וְגַ֥ם אֶת־יִשְׂרָאֵ֖ל לֹ֥א אֲשַׁלֵּֽחַ׃

3 וַיֹּ֣אמְר֔וּ אֱלֹהֵ֥י הָעִבְרִ֖ים נִקְרָ֣א עָלֵ֑ינוּ נֵ֣לֲכָה נָּ֡א דֶּרֶךְ֩ שְׁלֹ֨שֶׁת יָמִ֜ים בַּמִּדְבָּ֗ר וְנִזְבְּחָה֙ לַֽיהוָ֣ה אֱלֹהֵ֔ינוּ פֶּ֨ן־יִפְגָּעֵ֔נוּ בַּדֶּ֖בֶר א֥וֹ בֶחָֽרֶב׃

4 וַיֹּ֤אמֶר אֲלֵהֶם֙ מֶ֣לֶךְ מִצְרַ֔יִם לָ֚מָּה מֹשֶׁ֣ה וְאַהֲרֹ֔ן תַּפְרִ֥יעוּ אֶת־הָעָ֖ם מִמַּֽעֲשָׂ֑יו לְכ֖וּ לְסִבְלֹתֵיכֶֽם׃

5 וַיֹּ֣אמֶר פַּרְעֹ֔ה הֵן־רַבִּ֥ים עַתָּ֖ה עַ֣ם הָאָ֑רֶץ וְהִשְׁבַּתֶּ֥ם אֹתָ֖ם מִסִּבְלֹתָֽם׃

6 וַיְצַ֥ו פַּרְעֹ֖ה בַּיּ֣וֹם הַה֑וּא אֶת־הַנֹּגְשִׂ֣ים בָּעָ֔ם וְאֶת־שֹׁטְרָ֖יו לֵאמֹֽר׃

7 לֹ֣א תֹאסִפ֞וּן לָתֵ֨ת תֶּ֧בֶן לָעָ֛ם לִלְבֹּ֥ן הַלְּבֵנִ֖ים כִּתְמ֣וֹל שִׁלְשֹׁ֑ם הֵ֚ם יֵֽלְכ֔וּ וְקֹשְׁשׁ֥וּ לָהֶ֖ם תֶּֽבֶן׃

8 וְאֶת־מַתְכֹּ֨נֶת הַלְּבֵנִ֜ים אֲשֶׁ֣ר הֵם֩ עֹשִׂ֨ים תְּמ֤וֹל שִׁלְשֹׁם֙ תָּשִׂ֣ימוּ עֲלֵיהֶ֔ם לֹ֥א תִגְרְע֖וּ מִמֶּ֑נּוּ כִּֽי־נִרְפִּ֣ים הֵ֔ם עַל־כֵּ֗ן הֵ֤ם צֹֽעֲקִים֙ לֵאמֹ֔ר נֵלְכָ֖ה נִזְבְּחָ֥ה לֵאלֹהֵֽינוּ׃

9 תִּכְבַּ֧ד הָעֲבֹדָ֛ה עַל־הָאֲנָשִׁ֖ים וְיַעֲשׂוּ־בָ֑הּ וְאַל־יִשְׁע֖וּ בְּדִבְרֵי־שָֽׁקֶר׃

1 וְאַחַ֗ר בָּ֚אוּ מֹשֶׁ֣ה וְאַהֲרֹ֔ן
וַיֹּאמְר֖וּ
אֶל־פַּרְעֹ֑ה
כֹּֽה־אָמַ֤ר יְהוָה֙ אֱלֹהֵ֣י יִשְׂרָאֵ֔ל
שַׁלַּח֙ אֶת־עַמִּ֔י
וְיָחֹ֥גּוּ לִ֖י
בַּמִּדְבָּֽר׃
그후에 모세와 아론이 갔다(칼 완)1/4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칼 바익톨)1/8
바로에게1/2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칼 완)1/4
내 백성을 보내라(피엘 명령)1/8
그들이 내게 절기를 지킬 것이다(칼 미완)1/16
그 광야에서1/2
: 그후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말했다.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내게 그 광야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다.
출애굽의 이유 : 절기를 지킴.
절기는 언약의 상징이다.
출애굽은 언약에서 비롯됨을 말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예배드린다는 말이다.
하지만 바로의 입장 에서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가서 논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결코 통하지 않는 말이다.
2 וַיֹּ֣אמֶר פַּרְעֹ֔ה
מִ֤י יְהוָה֙ אֲשֶׁ֣ר אֶשְׁמַ֣ע בְּקֹלֹ֔ו
לְשַׁלַּ֖ח
אֶת־יִשְׂרָאֵ֑ל
לֹ֤א יָדַ֨עְתִּי֙ אֶת־יְהוָ֔ה
וְגַ֥ם אֶת־יִשְׂרָאֵ֖ל
לֹ֥א אֲשַׁלֵּֽחַ׃
그리고 바로가 말했다(칼 바익톨)1/4
내가 그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칼 미완) 여호와가 누구냐?1/4
보내라는(피엘 부정사)1/8
이스라엘을1/2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칼 완)1/4
또한 이스라엘을1/4
나는 보내지 않겠다(피엘 미완)1/2
: 그리고 바로가 말했다. “내가 그의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야 한다는 여호와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도 나는 보내지 못하겠다.
바로는 여호와를 모른다는 말로 모든 것을 일축한다.
그의 입장에서 여호와는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명이다.
3 וַיֹּ֣אמְר֔וּ
אֱלֹהֵ֥י הָעִבְרִ֖ים
נִקְרָ֣א עָלֵ֑ינוּ
נֵ֣לֲכָה נָּ֡א דֶּרֶךְ֩ שְׁלֹ֨שֶׁת יָמִ֜ים בַּמִּדְבָּ֗ר וְנִזְבְּחָה֙ לַֽיהוָ֣ה אֱלֹהֵ֔ינוּ
פֶּ֨ן־יִפְגָּעֵ֔נוּ
בַּדֶּ֖בֶר
א֥וֹ בֶחָֽרֶב׃
그들이 말했다(칼 바익톨)1/4
히브리인의 하나님께서1/8
우리를 만나셨다(니팔 완료)1/2
우리가 광야길을 3일정도 가게 하소서(칼 미완)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제사하게 하소서(발 미완)1/4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를 치실 것입니다(칼 미완)1/8
전염병으로1/16
아니면 칼로1/2
: 그들이 말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광야길을 3일정도 가게 해주세요. 그리고 저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제사하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전염병이나 칼로 저희를 치실겁니다.”
너무나 비굴하다.
하나님께서 치시는 대상이 바로와 이집트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치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을 치신다고 한다.
왜냐면 바로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실제 바로는 그럴 권세를 갖고 있다.
4 וַיֹּ֤אמֶר אֲלֵהֶם֙ מֶ֣לֶךְ מִצְרַ֔יִם
לָ֚מָּה מֹשֶׁ֣ה וְאַהֲרֹ֔ן
תַּפְרִ֥יעוּ אֶת־הָעָ֖ם
מִמַּֽעֲשָׂ֑יו
לְכ֖וּ
לְסִבְלֹתֵיכֶֽם׃
그들에게 애굽왕이 말했다1/4
모세와 아론아 왜1/8
너희가 그 백성을 풀어주려고 하느냐?(히필 미완)1/16
그의 일에서1/2
가라(칼 명령)1/4
너희 노역을 위해1/2
: 그들에게 애굽왕이 말했다. “모세와 아론아 왜 너희가 그 백성을 그의 일에서 풀어주려고 하느냐? 가서 너희가 해야할 노역이나 해라.”
처음에 일은 그냥 일. 아샤에서 나왔다.
나중에 일은, 중노동, 고된일, 해야할 일이다.
애굽왕은 백성의 일보다 너희가 할 일이 더 무거운 거같은데 딴데 신경쓸 겨를이 있냐라고 빈정거리고 있는 중이다.
바로에서 호칭이 애굽왕으로 변한다.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의 진정한 왕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왕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애굽왕보다 낮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과는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5 וַיֹּ֣אמֶר פַּרְעֹ֔ה
הֵן־רַבִּ֥ים עַתָּ֖ה
עַ֣ם הָאָ֑רֶץ
וְהִשְׁבַּתֶּ֥ם אֹתָ֖ם
מִסִּבְלֹתָֽם׃
바로가 말했다(칼 바익톨)1/4
보라 이제 많구나1/8
그 땅에 백성이1/2
너희가 그들을 멈추게 했다(히필 완)1/4
그들의 노역에서1/2
: 바로가 말했다. “보라 이제 땅에 백성이 많구나. 그런데 너희가 그들을 그들의 노역에서 멈추게 하는구나.”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많은데, 일을 그만 시키라고? 너희가 뭔데?
이런 뉘앙스다.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다.
아론과 모세의 비굴한 태도는 하나님의 명을 바로에게, 세상에게 잘 전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 자체도 무시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6 וַיְצַ֥ו פַּרְעֹ֖ה
בַּיּ֣וֹם הַה֑וּא
אֶת־הַנֹּגְשִׂ֣ים בָּעָ֔ם
וְאֶת־שֹׁטְרָ֖יו
לֵאמֹֽר׃
그리고 바로는 명령했다(피엘 바익톨)1/4
당일에1/2
그 백성에게 일을 시키는 자에게(칼 분사)1/2
그리고 그의 현장감독에게1/4
말하기를(칼 부정사)1/2
: 그리고 바로는 그날 바로 그 백성에게 일을 시키는 자와 현장감독에게 명령을 내렸다. 말하길.
바로는 바로 실행에 옮긴다.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실무직들에게 명령한다.
7 לֹ֣א תֹאסִפ֞וּן לָתֵ֨ת תֶּ֧בֶן לָעָ֛ם לִלְבֹּ֥ן הַלְּבֵנִ֖ים
כִּתְמ֣וֹל שִׁלְשֹׁ֑ם
הֵ֚ם יֵֽלְכ֔וּ
וְקֹשְׁשׁ֥וּ לָהֶ֖ם
תֶּֽבֶן׃
너희는 더이상 그 백성들에게 벽돌을 만들기(칼 부정사) 위한 짚을 주는 것을(칼 부정사) 하지 마라(히필 부정사)1/4
전처럼1/2
그들이 갈 것이다(칼 미완)1/4
그들을 위해 모을 것이다(피엘 미완)1/8
짚을1/2
: 너희는 더이상 이전처럼 그 백성들에게 벽돌을 만들기 위한 짚을 주는 것을 하지마라. 그들이 그들을 위해 가서 짚을 모을 것이다.
바로는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짚을 모으기 위해서 가게 한다.
모세와 아론의 말을 그대로 뒤집어서 복수한 것이다.
모세와 아론의 비굴한 태도는 하나님의 능력없이 되었고, 그것은 세상에서 조롱과 멸시라는 결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실제 현실에서 우리가 당당하게 신앙을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면 우리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게는 마차 바로 처럼, 처음 듣는,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8 וְאֶת־מַתְכֹּ֨נֶת הַלְּבֵנִ֜ים אֲשֶׁ֣ר הֵם֩ עֹשִׂ֨ים תְּמ֤וֹל שִׁלְשֹׁם֙ תָּשִׂ֣ימוּ עֲלֵיהֶ֔ם
לֹ֥א תִגְרְע֖וּ
מִמֶּ֑נּוּ
כִּֽי־נִרְפִּ֣ים הֵ֔ם
עַל־כֵּ֗ן הֵ֤ם צֹֽעֲקִים֙ לֵאמֹ֔ר
נֵלְכָ֖ה
נִזְבְּחָ֥ה לֵאלֹהֵֽינוּ׃
그리고 그들이 만드는(칼 분사) 그 벽돌의 숫자를 전과같이 그들에게 할당할 것이다(칼 미완)1/4
줄이지 말 것이다(칼 미완)1/8
그들에게1/2
왜냐면 그들이 게을러져 있기 때문이다(니팔 분사)1/4
그래서 그들이 소리질러(칼 분사) 말하길(칼 부정사)1/8
우리가 갈 것이다(칼 미완)1/16
우리의 신(하나님)께 제사할 것이다(칼 미완)1/2
: 그러나 그들이 만드는 벽돌의 숫자는 전과같이 그들에게 할당하고 줄이지 말것이다. 왜냐면 그들이 게을러서 소리질러 말하길 우리가 가서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할 것이다라고 한다.
완전히 멸시한다.
더욱 채찍질한다.
사실, 모세와 아론이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주장했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오히려 더욱 큰 핍박과 압제가 닥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종이라면 우리의 도리이다.
당당하든, 비굴하든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것은 같다.
그게 아니라면 세상과 완전히 섞여서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9 תִּכְבַּ֧ד הָעֲבֹדָ֛ה עַל־הָאֲנָשִׁ֖ים
וְיַעֲשׂוּ־בָ֑הּ
וְאַל־יִשְׁע֖וּ
בְּדִבְרֵי־שָֽׁקֶר׃
그 사람들의 일을 더 무겁게 할 것이다(칼 미완)1/4
그래서 그들이 일하게 할 것이다(칼 미완)1/2
그래서 그들이 고려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칼 미완)1/4
거짓말을1/2
: 그 사람들의 일을 더 무겁게 해서 그들이 일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거짓말을 생각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말,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못하게 하다 또한 사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닌, 의견이나 소망을 부정하는 단어다.
그 말을 백성들이 듣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가져온 하나님의 말씀을 신의 말이 아닌 모세와 아론이 꾸며낸 거짓말로 만드려는 바로의 정치적 술수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연스럽게 모세와 아론을 추방시키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9절에서 그들이나, 그 백성이 아닌 그사람들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모세와 아론을 분리시키려는 의도다.
세상은 우리를 갈라놓게 만든다.
교회내에서 복음을 따르는 자,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도 정치적으로 모략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서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의 논리와 메시지들을 교회안으로 가지고 와서 그 시스템으로 교회를 변화시키려 한다.
상식이전에 성경
거듭난 이성, 거듭난 방법, 거듭난 삶
그게 아니면 우리가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라고 말하는 자가 된다.
구조
1-3절 바로와의 대담(모세와 아론의 비굴함)
1절 :18의 말씀을 그대로 말함.
1절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음
그러나 별로 지혜로운 말은 아님
바로에게 갑자기 듣도보도 못한 신을 경배하기 위해 노예들을 보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
2절 바로의 반응
여호와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를 모른다.
당연히 못보내겠다.
3절 모세와 아론의 대답(비굴함)
매우 공손하게 말한다.
공손함은 왕앞에서 하는 것이니 괜찮다.
하지만 그 내용 때문에 공손함이 아니라 비굴함이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염병이나 칼로 저희를 치실겁니다
친다고 한 것이 누구인가?
:19에 보면 맞는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있다.
하지만 왜 자기자신이 화를 당한다라고 말하고 있는가?
너무나 비굴하다.
4절 애굽왕의 비웃음
바로가 아니라 애굽왕이다.
모세와 아론의 비굴함은 이집트민족의 바로가 아니라, 애굽땅위에 사는 모든 자의 왕, 애굽왕을 만들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인데, 그들의 비굴함은 하나님의 권위를 빼앗아 바로에게 갖다 바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모든 권위를 가지게 된 애굽왕은 비웃는다.
백성의 일보다 너희가 할 일이 더 무거운 거같은데 딴데 신경쓸 겨를이
있냐라고 빈정거리고 있는 중이다.
결국 모세와 아론 자신만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까지 무시당했다.
왜, 모세와 아론은 이 조롱에 아무말도 못했을까.
:17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건드린 바로와 그의 집 전체가 큰 재앙을 당한다.
이것이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분명 애굽인들은 그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요셉에 대한 기록이 있을 것이다. 애굽의 다른 모든 신들도 예언하지 못한 것을 예언하시고 실행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을 말했다면 바로가 그렇게 비웃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방해는 했겠지만, 그렇게 앞에서 조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이 두려웠을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와 아론의 비굴함은 이미 보이신 하나님의 능력도 가리는 결과를 낳았다.
5절 역효과
노역이 심해짐.
5절에서 중요한 뉘앙스는 너희가 뭔데, 이 백성에게 일을 그만 시키라고 하는거냐?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다.
6절 바로의 반격
바로 그날 모세와 아론이 가자마자 일을 벌인다.
자신의 권위를 모세와 아론이 침해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철저하게 하나님은 무시당한다.
7-8절 바로의 모략 : 짚을 모으기 위해 가게 하라, 벽돌 생산량은 같게 하라.
7절 : 짚을 모으기 위해 가게 하라
바로는 가게 한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노역을 위한 짚을 모으기 위해 가게 한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완전히 반대로 행한 것이다.
이를 통해 백성과 모세,아론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모략을 하는 것이다.
8절 하루 벽돌 생산량은 변하지 않는다.
백성들에게 더욱 큰 고통을 주는 실질적인 명령이다.
9절 모략의 목적
않게 하라 : 사실이 아닌 의견이나 소망을 부정하는 단어.
거짓말
-> 이 두가지로 모세와 아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들이 꾸며낸 거짓말로 만든다.
그사람들의 노동 : 갑자기 그들, 그 백성이 아닌 그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거짓말로 믿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아론과 모세를 쫓아내게 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일반적인 사람들이 된다.
하나님의 종은 아론과 모세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갈라놓게 만든다.
교회내에서 복음을 따르는 자,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도 정치적으로 모략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서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의 논리와 메시지들을 교회안으로 가지고 와서 그 시스템으로 교회를 변화시키려 한다.
상식이전에 성경
거듭난 이성, 거듭난 방법, 거듭난 삶
그게 아니면 우리가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라고 말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비굴하게 대하든지, 당당하게 대하든지 세상의 반응은 비슷할 것이다. 오히려 비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하신 일들, 교회를 통해 역사하신 것들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의 술수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세상과 완전 동화되어, 세상과 다를바없이 살 것이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결국 세상과 다른 말을 해야한다.
당당하게 하든지, 비굴하게 하든지, 세상의 압력은 똑같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들에게는 요셉이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지 않았다는 변명거리라도 있다.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설교
서론
오늘 본문은 모세와 아론이 첫 번째로 바로 앞에 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눈에 보이는 바로 앞에서 누구를 두려워했을까요. 본문을 살펴보며, 모세와 아론의 모습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본문은 바로와의 대담으로 시작합니다. 1절에서 바로 앞에 처음으로 선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1절의 내용은 :18절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전해라 하는 것을 전했습니다. 몇가지 빠진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빠진 부분은 3절에서 다시 말하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바로의 반응역시 매우 당연한 반응입니다. 노예들이 갑자기 듣도보도 못한 신의 이름을 대며 제사하러 가겠다고 3일길을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줄 주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특히 광야에서 3일길이면 이미 쫓는게 불가능합니다. 3일길을 가게 하라는 것을 우리를 해방시켜달라는 것과 동일한 말입니다.
바로 입장에서는 2절의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3절 후반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라는 구절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19에 누굴친다고 합니까. 바로를 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침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 말을 함으로써,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구걸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커녕 소위 말해 자기 밥그릇도 찾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4절에서 애굽왕은 비웃고 있습니다. 4절의 내용은 ‘백성의 일보다 너희는 일이 가볍고 편한가보지? 내가 보기엔 너희가 할 일이 더 힘들거 같은데?“라는 빈정거리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바로는 이스라엘의 노역을 더욱 힘들게 만듬으로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게 됩니다. 딱 바로의 빈정거림 그대로 된 것입니다.
말그대로 애굽인의 왕 바로에서 애굽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왕, 애굽왕이 된 것입니다. 바로를 애굽왕으로 높여준 것이 누구입니까. 모세와 아론의 비굴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와 아론이 바로의 종처럼 행동했기에, 그들은 민족 전체를 팔아먹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바로는 2절에서 물어볼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와 아론에게 더 초점을 맞춥니다.
모세와 아론의 비굴함은 결국 자기 자신만 비굴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조차 무시당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시당할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하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창12장에는 아브람이 사래를 데리고 애굽으로 간 일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애굽왕은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사래를 데리고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로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뿐입니까. 요셉의 일도 있습니다. 풍년과 흉년을 주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통해 애굽의 모든 신조차 하나님보다 못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 모세와 아론은 4절에서 애굽왕이 그렇게 빈정거릴 때,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지 못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 바로가 무서웠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비틀어서 전했습니다.
그들이 만약 담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리고 아브람과 사래의 일과 요셉의 일을 말하며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6절처럼 그날 당장 감독관을 불러서 이스라엘백성을 괴롭히려고 했을까요? 아마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왕실의 기록을 뒤져서 사실인지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인 것을 알고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고 빈정거리고 괴롭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웠을테니까요.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너무나 비굴했기 때문에, 바로는 너무나 쉽게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6절처럼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을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서 한가지 효과를 노립니다.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는 결과를 노립니다.
먼저 7절에서 나오는 가서 짚을 모으게 하라는 것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완전히 반대로 뒤집은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요청은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애굽땅으로 가서 애굽사람을 위해 짚을 모아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모세와 아론,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데, 너희는 어떻게 대처할래라고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9절에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않게하라 라는 말은 사실이 아닌 소망이나 의견을 부정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즉, 모세와 아론이 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순전히 모세와 아론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거짓말이라고 말함으로 이런 뜻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면당하고 쫓겨난 것처럼, 이번에도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게 하려는 술수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8절까지는 백성, 그들이라는 표현을 쓰다가 9절에 그사람들이라고 부르는 호칭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쫓아낸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그냥 사람이 되길 바라며 쓴 표현입니다.
적용
물론 모세와 아론이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다 말했다고 해서, 바로가 굴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 음험하게 이스라엘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당당하게 전했다면, 최소한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무시당하는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는 말을 세상사람들에게 하면 그들은 우리를 비웃거나 화를 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앞에서 비굴하게 된다면, 그들은 정말로 우리를 함부러 대하고, 하나님도 함부러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뭐냐고 물으시면 당당하게 말해줍시다. 우리나라 독립선언문을 쓴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이 16명입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인구는 카톨릭까지 합쳐서 2%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까. 교회는 계속해서 어려운자를 돌보며 지내왔습니다. 지금도 교회나 교회와 관련된 기관이 운영하는 고아원이나 양로원이 많습니다.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가 어디서 출발했습니까. 개신교의 대표인 칼빈에 의해서 출발했습니다.
왜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이나 유럽은 소위 노가다라고 부르는 기술자들도 존경을 받고 좋은 대우를 받습니까.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소명이기에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라는 교회가 가진 믿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퍼지기 전에 먼저 교육열풍이 불어버렸기에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현재 사회를 이루는 근간까지 교회가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모세와 아론처럼 세상앞에 비굴해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 위대한 일들을 우리도 잊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국 우리의 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식만도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비굴함을 넘어서 아예 바로의 편이 된 사람도 교회안에 많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기반이 되고 기준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어느순간부터 사회의 논리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결정하는데, 기도와 말씀이 우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 효율과 자본, 마케팅같은 것들이 더 우선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의 것을 모두 배제할수도 없고 배제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온 땅을 기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이라는 틀로 세상의 논리들을 컨트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세상의 논리에 의해 컨트롤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속에 모세와 아론은 비굴하지만 최소한 하나님의 편에 섰습니다.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논리에 따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 바로의 편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모세와 아론에게는 변명거리라도 있었습니다. 왜냐면 요셉이후 애굽에서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변명거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뭐라 말할 것입니까. 무슨 변명이 통하겠습니까.
두려워해도 좋고, 비굴해도 좋으니 그래도 하나님의 편에 설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당당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그 크신 역사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은혜의 일꾼으로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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