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7.저녁예배설교

저녁예배설교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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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끝 슬리퍼
성가대쪽 좌석에서 기도
종치기
다함께 묵상기도 드림으로 주일저녁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찬송가 589장 찬양드리겠습니다.
전유수 시무집사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시편 100편 1절에서 5절입니다. 구약 875페이지입니다.교독하겠습니다.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8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29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30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5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9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호산나찬양대 찬양하겠습니다.
설교
서론
서론
서론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모세의 의심은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변함없이 계속 모세의 의심어린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시편 100편 1절은 감사의 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이 것은 이 시의 장르, 이 시가 어느때 불러지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쓰여졌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지어진 시이며, 그래서 감사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함께 본문을 살펴보며 언제나 감사할 수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길을 나선 모세는 결코 가볍지 않은 발걸음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시간에 보았듯이, 그의 마음이 아직까지 완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애굽으로 가는 것에 대한 근심과 걱정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함께 살펴보는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본론
본론
자신에 대해 의심하고 자신을 부른 하나님을 의심했던 모세는 이제 자신의 동포들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1절에서 모세의 어조는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보다는 그들이 ‘못믿어~ 라고 말하면 어떻게 할겁니까?’에 가깝습니다. 왜냐면 모세는 이미 한번 동족들에 의해서 배신당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억때문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이 구원해야 할 동족을 믿지 못합니다.
27절은 하나님께서 아론을 부르시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은 모세와는 많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라, 바로를 만나라라고 분명한 목표와 목적지를 정해주십니다. 그러나 아론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광야로 가라는 말씀밖에 하지 않습니다.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만나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서 모세를 만나기는 하지만, 아론은 호렙산이라는 목적지를 듣지 못합니다. 그저 광야로 나가라는 말씀만 듣습니다.
이런 모세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은 무엇이냐?”입니다.
첫째, 감사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40년전에 헤어진 동생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어디인지 확실한 목적지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다른 말로 하면 광야로 가서 모세를 찾아라는 말씀입니다. 광야는 쉽게 말해 사막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끔찍한 광야에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으러 가야합니다. 그것도 40년 전에 헤어진 동생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약속이라도 받았는데, 아론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이 질문은 지금까지 모세가 하나님께 했던 2가지 질문과 똑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3장 11절에서 모세는 자신을 의심하며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자신이 누군지 알려달라는 질문이 아니라, 나는 그런 일을 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라는 자기 불신에서 나온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셨고, 함께 하시겠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시의 주제가 감사인데, 시편 100편은 감사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감사의 시라는 제목이 붙지 않은 시편 136편은 25절이라는 긴 절 전체가 감사찬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에 반해 감사의 시라는 시편 100편은 감사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르라고 하며 시작합니다.
:12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며, 이미 아론이 모세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오고있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아론이 꽤 오랜 기간을 광야에서 헤메고 다녔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돌아와 이드로를 만나고, 여정을 준비하고 다시 호렙산으로 돌아올 때까지 광야에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시일은 알수 없지만 모든 시일을 합치면 최소한 며칠에서 몇주까지 광야에서 있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13절의 ‘그의 이름은 무언인가’ 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라고 했지만 사실 모세가 하나님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습니다. 이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기에, 지금까지 애굽에서 고난당하는 것을 방치하다가 이제와서 구원하겠다고 하느냐라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대한 의심이 담긴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를 통해 영원불변하심, 편재하심,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조상의 하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이 되시고 너의 민족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답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즐거운 찬송이라는 말은 기쁨의 함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좀더 의역해서 즐거운 찬송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원 뜻은 함성, 고함이라는 뜻이며, 특별히 전장에서 외치는 함성입니다. 즉, 전쟁에서 돌격하기 전 사기를 고취시기며, 우리의 승리를 확신하며 지르는 함성을 뜻하는 말이 즐거운 찬송의 원 뜻입니다.
평생 애굽에서 산 노인이 광야에서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지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언제 자신의 동생인 모세를 만날 수 있다는 기약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계속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의 민족을 의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라 해도, 그들은 결단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겁니다. 내가 이렇게 배신당하고 40년동안 늙은 것을 보십시오! 라는게 모세가 하나님께 말하고 싶은 본심일 것입니다.
이 단어가 왜 즐거운 찬송이 되냐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기쁨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따금씩 우리나라의 축구같은 종목이 결승전에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라 전체가 들썩들썩합니다. 이겨라고 온갖 함성을 지르기도 합니다. 만약에 결승에서 승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너나할 것없이 완전 하나되는 축제가 열립니다. 그런데, 국운을 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아론의 순종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고, 며칠, 몇주가 걸렸든지 광야에서 헤메었든지 하나님의 산에 와서 모세를 만났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2절에서 물어보신 것입니다.
1절은 이 승리의 함성, 기쁨의 함성을 온땅, 모든 피조물들에게 외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직 승리하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승리를 확신하며 즐거운 찬송, 기쁨의 함성을 지를 수 있습니까. 그 이유가 바로 5절입니다.
그가 겪었던 고난과, 애굽에서 나오기 위해 했던 수고역시 기록하지 않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인의 종이었습니다. 종이 주인에게 자신의 볼일이 있어서 다른 곳에 갔다오겠다고 하면 쉽게 허락해줄 주인이 어디있겠습니까.
‘네 손에 있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 성실하심이 영원히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기쁨의 함성을 지를 수 있습니다.
27절에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런 엄청난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부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론이 어떻게 했다라는 말씀은 적혀있지 않습니다. 그저 그가 갔다,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났다, 모세에게 입맞추었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정말 아무말도 없이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에 있는게 지팡이란 것을 몰라서 물어보셨겠습니까. 혹시 지팡이가 뭐하는건지 몰라서 물어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위에서 모세가 했던 두 질문, 그대로 다시 모세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즉, 이 질문은, ‘네 손에 든 그것은 무슨 능력이 있느냐?’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에 이르는 선함과 인자, 성실로 인해 이제 모든 땅에게 기쁨의 함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간을 선함과 인자, 성실로 덮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승리의 확신, 기쁨의 함성을 온땅과 그 위에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들리도록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에 이르는 선함과 인자, 성실로 인해 이제 모든 땅에게 기쁨의 함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간을 선함과 인자, 성실로 덮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승리의 확신, 기쁨의 함성을 온땅과 그 위에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들리도록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29절에서 31절까지 나오는 장로들과 백성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지팡이는 그저 지팡이일뿐입니다. 생명도 없는, 주인의 손을 떠나면 그저 나무막대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지팡이를 변화시키십니다.
이렇게 승리를 확신하고 기쁨의 함성질렀던 온땅의 모든 믿는 자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나님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승리의 기쁨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승리로 얻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점점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29절은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장로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특별한 표현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장로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왜냐면 성경에서 이스라엘 장로라는 표현은 46번이 나오는데 비해, 이스라엘 자손의 장로라는 표현은 단 3번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9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에스겔8장에서 쓰였습니다. 에스겔 8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장로 70명이 한명도 빠짐없이 우상숭배하는 장면을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의 장로라는 표현은 그저 장로들의 생각만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로서 모여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땅에 던지라는 명령에 순종하니 지팡이가 무엇으로 변합니까. 뱀으로 변합니다. 살아서 꿈틀거리게 되었습니다. 뱀은 오래도록 풍요와 지혜, 의술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뱀처럼 지혜로워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30절에 분명 모인 것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인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막대기에 불과한 지팡이가 살아있는 뱀, 모세를 위협해서 도망치게 할 정도의 뱀으로 변했습니다. 지혜와 풍요, 치유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 다가감을 묘사한 것이 2절과 4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땅에 던지라라는 단 한가지 말씀에 순종했을 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모세, 왕자였던 모세, 광야에서 40년간 훈련받은 모세가 순종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여기서 우리는 또한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은 가장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무엇인지 말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기뻐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내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그 치열한 전투로 얻은 전리품을 들고 한걸음씩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2절은 이런 승리의 개선행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얻은 전리품을 마땅이 드려야할 그분께 드린다는 마음을 가지고 개선행진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한번 명령을 내리십니다. 뱀의 꼬리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모세가 그 명령대로 뱀의 꼬리를 잡자 뱀은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어떤 상태입니까. 애굽의 노예로 있습니다. 노예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모인다고 하면 지배계층이 허락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모인다해도 매우 까다로운 절차와 엄중한 감시속에서 모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섬긴다는 기쁨은 하나님께 다가갈수록 점점더 커집니다. 처음에는 내 손에 있는 것, 내가 얻은 전리품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하나님의 모습이 점점더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게 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술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억지로 부르는 찬양, 남이 부르니 나도 부르는 찬양,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하는 노래가 아닌, 하나님이 커짐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찬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손에 든 전리품, 승리의 댓가보다, 하나님께서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과정에서도 사실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니 도망갑니다. 3절에 피하매는 날아오는 공을 피하듯이 몸을 살짝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도망쳐서 뱀한테서 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을 잡아라라고 말씀하는데 4절에서 모세는 뱀을 붙잡습니다. 우리말에는 똑같이 잡아라 잡았다라고 되어있지만, 히브리어에서는 다른 단어로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평범하게 물건잡듯이 잡으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사냥감을 잡듯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꽉 낚아채듯이 붙잡은 것입니다. 땅꾼이 뱀목을 잡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30절에 백성이 모인 자리에 애굽의 병사들과 감독들이 나와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자칫 반역과도 같은 말,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들으셨다는 말씀을 듣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바로 하나님께 가까이가는 출입증입니다. 전장에서 귀환하여, 그 힘든 싸움을 마치고 당당히 성문을 통과할 수 있게 해줍니다. 내 손에 든 전리품, 내가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성의 문 열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싸움을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그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고 시편 100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곁에 있는데, 뱀잡는 것하나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아무말도 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이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모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40년전에 도망갔던 모세란 자가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라는 말만 들었을 것입니다.
감사로서 문을 연 승리자는 기쁨의 개가, 승리의 찬송을 높이 부릅니다. 동시에 점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의 안뜰, 오직 하나님께 허락받은 자만이 들어가는 안뜰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더욱 하나님과 가꿔워졌습니다. 처음에는 저 멀리 있는 하나님입니다. 분명 내게 승리를 주실 것이고, 내 승리의 원천이 되시지만,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기쁨의 확신을 가지고 감사하며, 온땅에 선포합니다. 그 결과로 얻어진 것들,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나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립니다. 감사로서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두 번째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품에 넣은 손에 나병이 났다가 낫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쉽게 믿어지겠습니까. 특히 400년이 넘게 애굽에 있으며 그 문화에 우상에 젖어있던 이스라엘이 이름도 모르던 우리 조상의 신이 ‘여호와’이시며, 그분께서 찾으시고 고난을 살피셨다는 말을 믿고, 그 말만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보면 내 안에 하나님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새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임을 느끼고 감사하게 됩니다.
뱀은 무엇의 상징이라고 했습니까. 풍요, 지혜, 의술, 다른 말로 치유의 상징입니다. 즉, 두 번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병이라는 저주와 그 치유, 생명 자체를 관장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납니다.
2절과 4절은 이런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감사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며, 결국 나보다 높으신 하나님으로 내 전부가 채워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이 두가지 저주는 더욱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점점 가까워지며, 우리가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31절에 뭐라 하고 있습니까. 백성들이 믿었다로 시작합니다. 들었다는 그 다음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다라고 하기도 전에, 그 이름만을 듣고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들었고, 그 즉시 하나님께 경배하며 예배드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뱀은 파라오의 왕관에 항상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파라오에게 지혜를 주며, 파라오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를 키운 공주, 여자의 몸으로 최초로 애굽의 왕이 되었던 하트셉수트의 조각에도 왕의 관에 뱀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하나님을 앎으로 완성됩니다.
마치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문도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산으로 가서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 뱀이, 모세가 머리도 아닌 꼬리를 잡으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습니다. 이집트에서 가장 하층이라 할 수 있는 유목민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궁정, 그곳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
아론도 이스라엘 백성도 분명 수많은 난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또한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분명 이 말씀과 기적을 하는 순간에는 모르지만, 모세는 바로와 대면했을 때, 왕관에 달려있는 뱀의 형상을 보며, 자신의 지팡이를 보았을 것입니다.
개선행진, 감사로서 개선행진을 하며 나를 하나님으로 채우는 경험을 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게 됩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렇게 거부하고 안될거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할 것은 순종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모세의 목숨을 위협했던 바로가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바로는 쓸모없는 나무토막같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입니다.
지금까지는 멀리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분투한 결과이며 내가 얻어낸 전리품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남들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왔고, 때로는 기쁨은커녕 무감정하게 하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만은 제대로 순종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한 자는 모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2번째 기적, 나병이 낫는 7절에서 한가지 단어가 3번이나 나옵니다. 그 단어는 되돌리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에서는 번역하기 어색해서 다시 품에 넣으라고 2번 쓰이고 마지막에 되돌아왔다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허락하시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 우리를 처음부터 지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궁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8절에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이적을 말합니다.
뱀이 생명없는 지팡이로 되돌아갔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모든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나병걸린 손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지금은 마치 나병에 걸린 것처럼 무시당하고 멸시당하고, 고통받고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시며, 편재하시며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움직이시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없애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작은 승리, 완전한 승리가 아니지만, 장차 올 완전한 승리가 내것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28절에서 모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이 아니라 이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 내가 기적을 행할 것이다가 강조점입니다.
모세가 불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준비하셨습니다. 2개로도 충분한데 또 주십니다.
이처럼 감사를 통해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자인지 알게 됩니다.
이것은 모세가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따르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모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기적을 행한다는, 자신에게 있는 능력인 것입니다.
결론
또 주십니다 넘치도록 주십니다
그러나 30절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30절에도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이적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때 강조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아론은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우리의 모든 고난을 보셨다는 그 말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직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감사할 일보다 힘겹고 원망스러운 일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이 비참해질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비참해지고, 이득앞에서 작아집니다.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는 표적을 또 주십니다. 그를 통해 애굽의 모든 신보다 하나님께서 크심을 나타내십니다. 바로 모세를 위해서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 한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사람같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강조한 모세입니까. 아니면 그 모든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고 모세를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데 집중한 아론입니까. 하나님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따르지 못해서, 결국 할례까지 시행하지 않았던 모세입니까. 애굽의 삼엄한 감시와 경고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모였고, 그 자리에 가지도 못했지만 그저 귀에 들리는 소문만으로 하나님을 믿고 경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까.
그럼에도 어떤 때는 나 자신이 비참해질 때도 있습니다. 이 고생을 하고도 손에 쥔 것, 통장에 들어온 것을 볼 때마다 힘겨워지고, 한숨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를 위해 8절에서는 표적의 소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기적이 무슨 말을 합니까. 기적이 아닌 기적을 베푸는 모세가 말을 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모세의 말을 듣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표적의 소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준비하심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만 제외하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안된 사람은 오직 모세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점점 가까이갈 때, 항상 기쁨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알수록, 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승리했지만 불구가 되어 한편생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귀환병처럼, 온전치 못한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의 빛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전투로 손이나 발을 잃어버린 내 모습, 피투성이가 되어 지친체로, 전리품만이 내 모든 것인냥 쥐고 있는 내 모습이 드러납니다.
바울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3차 전도여행을 할 때 쓴, :9에서 그는 자신을 ‘사도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칭합니다. 처음 감옥에 갇혔을 때 쓴 :8에서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중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던 바울은 :15에서 자신을 ‘죄인중에 괴수’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모세에게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내 약함이 드러나고, 더욱 환경이 나빠질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감사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내 손에 든 전리품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전하지 못한, 흠많고 상처투성이인 나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모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자들의 마음을 돌리셨는데, 모세의 마음은 변화시키지 않으셨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집나간 둘째 아들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치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그 궁정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모세가 겪었던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나라고,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동족들도 말씀대로 나아옴을 경험하라고 부어주십니다. 그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경험이었다면, 아픔과 괴로움이 치유되는 경험도 하게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바로 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저 종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기 원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끝까지 참으시고 계십니다. 주위 모든 상황들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걱정하고 고민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자 거짓말같이 모든 상황이 풀림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잊고 살 때도 있습니다.
결론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택하심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택하신 우리를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계시는지, 알게 하십니다.
삶에 시련이 닥칠 때, 승리의 함성, 전장의 함성은커녕 비굴한 신음소리도 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런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보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의 칼날, 세상의 공격앞에서 비굴해져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막아주시고 우리 앞서 전진하시는 우리의 대장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으시기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시며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임하고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당장 모세가 깨닫지 못함에도 주십니다. 두가지 표적으로 충분한데도 또다시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넘치도록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어떤 때, 모세처럼 우리가 그것이 은혜인줄 모르고 넘어가도 개의치 않으시고 부어주십니다.
살다보면,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났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로 의롭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적의 칼날, 세상의 공격앞에서 비굴해져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막아주시고 우리 앞서 전진하시는 우리의 대장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으십니다.
우리는 혹시 오늘 말씀의 모세의 모습같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뱀으로 만드셨는데, 그 뱀이 무서워서 도망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뱀을 잡으라고 했더니, 마치 뱀을 사냥하듯이 온갖방법을 동원해서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가 나무토막같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불신에 빠져있는 모세와 같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순종하지도, 기다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사람들이 아닌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들이 아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하나님보다 내 손안에 있는 전리품, 세상에서 얻은 것에 눈이 어두워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강한 빛으로 우리를 비추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가 말씀을 통해,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그 깊은 속내를 당장은 이해할 수 없어도 따를 수있기를 바랍니다.
아론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준비됨은 분명 모세의 마음에 와닿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앞에 설 담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궁정, 하나님의 존전에 이르러,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내가 했던 모든 싸움이 그저 하나님의 소유이신 목장에서 있었던 일의 일부임을 아시게 하십니다.
어떨 때 모세를 광야의 한 복판, 호렙산으로 인도하셨듯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앞에 설 담력을 주시고 있습니다.
내 기쁨도, 내 슬픔도, 내 고난도, 내 아픔도, 내 자랑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원한 생명의 길에 서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어떨 때, 우리가 투덜거리는 그 불평을 하나하나 대답하시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인내하며 기다리십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앞에 우리 또한 준비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던 모세처럼, 세상의 빛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세상이 나를 버려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처럼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면, 결국 모세처럼 하나님을 세상을, 자신을 믿지 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의 틀을 벗고, 세상의 관념들을 벗고, 하나님을 먼저 보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은혜와 축복이 넘치길 소원합니다.
그런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과의 싸움, 나와의 싸움, 그 모든 순간을 믿음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며,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찬송가 429장 다함께 찬양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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