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추수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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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론
서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길을 나선 모세는 결코 가볍지 않은 발걸음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시간에 보았듯이, 그의 마음이 아직까지 완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애굽으로 가는 것에 대한 근심과 걱정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함께 살펴보는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주일이 다시 왔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며, 함께 감사의 의미에 대해 되새겨보길 바란다.
본론
왜 이런 표현이 나왔나? 요즘 건강에 대해 많이 말함 ->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
27절은 하나님께서 아론을 부르시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은 모세와는 많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라, 바로를 만나라라고 분명한 목표와 목적지를 정해주십니다. 그러나 아론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광야로 가라는 말씀밖에 하지 않습니다.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만나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서 모세를 만나기는 하지만, 아론은 호렙산이라는 목적지를 듣지 못합니다. 그저 광야로 나가라는 말씀만 듣습니다.
그러나 당시 육체란 감옥이었다.
로고스, 이데아
40년전에 헤어진 동생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어디인지 확실한 목적지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다른 말로 하면 광야로 가서 모세를 찾아라는 말씀입니다. 광야는 쉽게 말해 사막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끔찍한 광야에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으러 가야합니다. 그것도 40년 전에 헤어진 동생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약속이라도 받았는데, 아론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12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며, 이미 아론이 모세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오고있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아론이 꽤 오랜 기간을 광야에서 헤메고 다녔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돌아와 이드로를 만나고, 여정을 준비하고 다시 호렙산으로 돌아올 때까지 광야에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시일은 알수 없지만 모든 시일을 합치면 최소한 며칠에서 몇주까지 광야에서 있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평생 애굽에서 산 노인이 광야에서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지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언제 자신의 동생인 모세를 만날 수 있다는 기약도 없습니다.
그리고 영은 모든 선한 것의 근본, 본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육과 영을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아론의 순종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고, 며칠, 몇주가 걸렸든지 광야에서 헤메었든지 하나님의 산에 와서 모세를 만났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성경에는 성령이라 하지 않고 그냥 영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겪었던 고난과, 애굽에서 나오기 위해 했던 수고역시 기록하지 않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인의 종이었습니다. 종이 주인에게 자신의 볼일이 있어서 다른 곳에 갔다오겠다고 하면 쉽게 허락해줄 주인이 어디있겠습니까.
이것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맞춰서 말하자면, 죄악된 인간 vs 성령의 역사다.
27절에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런 엄청난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부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론이 어떻게 했다라는 말씀은 적혀있지 않습니다. 그저 그가 갔다,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났다, 모세에게 입맞추었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정말 아무말도 없이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29절에서 31절까지 나오는 장로들과 백성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육체라고 몸만 나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29절은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장로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특별한 표현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장로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왜냐면 성경에서 이스라엘 장로라는 표현은 46번이 나오는데 비해, 이스라엘 자손의 장로라는 표현은 단 3번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9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에스겔8장에서 쓰였습니다. 에스겔 8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장로 70명이 한명도 빠짐없이 우상숭배하는 장면을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의 장로라는 표현은 그저 장로들의 생각만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로서 모여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알아보자.
그래서 30절에 분명 모인 것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인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본론
본론
1. 육체의 일
여기서 우리는 또한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 : 일-> 명백함 : 짧은 시간에 결과. 행동의 과정과 결과가 명백하게 나타남. 누가봐도 알수 있음.
지금 이스라엘은 어떤 상태입니까. 애굽의 노예로 있습니다. 노예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모인다고 하면 지배계층이 허락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모인다해도 매우 까다로운 절차와 엄중한 감시속에서 모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30절에 백성이 모인 자리에 애굽의 병사들과 감독들이 나와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자칫 반역과도 같은 말,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들으셨다는 말씀을 듣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일이라고 나온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이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모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40년전에 도망갔던 모세란 자가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라는 말만 들었을 것입니다.
모두 짧은 시간에, 한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음행 더러움 호색(방종) -> 성적 범죄에 관련된 단어들 -> 성적 죄의 특성 : 한순간에 일어남.
쉽게 믿어지겠습니까. 특히 400년이 넘게 애굽에 있으며 그 문화에 우상에 젖어있던 이스라엘이 이름도 모르던 우리 조상의 신이 ‘여호와’이시며, 그분께서 찾으시고 고난을 살피셨다는 말을 믿고, 그 말만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우상숭배 주술(점치는 것도 포함) -> 절이나 성당가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님. 생활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들. 오늘의 운세부터 시작해서 타로카드같이 재미로도 할 수 있는 것. 또한 하나님의 뜻보다 그 장소의 분위기같은 것을 맞추기 위해 하는 것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납니다.
원수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 어울려 살면서 언제든지 한순간에 일어날수 있는 일들.
31절에 뭐라 하고 있습니까. 백성들이 믿었다로 시작합니다. 들었다는 그 다음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다라고 하기도 전에, 그 이름만을 듣고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들었고, 그 즉시 하나님께 경배하며 예배드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짓는 것은 소위 파티다. 그냥 몇명 모여서 으싸으쌰 하는게 전체보다 우선시되면 그게 파당이다.
마치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문도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산으로 가서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아론도 이스라엘 백성도 분명 수많은 난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또한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성경보다 교회보다 자기 친한 사람먼저 챙기게 된다.
술취함 방탕함 -> 연회의 자리에서 술취하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렇게 거부하고 안될거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할 것은 순종밖에 없었습니다.
=> 모두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차하면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세만은 제대로 순종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한 자는 모세밖에 없습니다.
28절에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이적을 말합니다.
2. 성령의 열매
본문은 사실 추수감사절과는 상관없는 본문이다. 우리가 잘아는 3가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28절에서 모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이 아니라 이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 내가 기적을 행할 것이다가 강조점입니다.
성령 : 열매-> 오랜 시간이 걸림.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음. 사랑하는지 오래참는지 자비로운지등, 이것은 오랫동안 겪어야 진짜로 나온다. 서로 사랑한다고 결혼한 커플들이 더 싸우는 경우도 있다. 오랫동안 서로 알아가며, 그 알아가는 과정을 온전히 인내하고 사랑하고 관용하며 온유하는등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조금씩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따르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모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기적을 행한다는, 자신에게 있는 능력인 것입니다.
나무가 자라서 맺는 첫 열매는 정말 볼품없다. 그러나 점점 좋은 열매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30절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30절에도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이적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때 강조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아론은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우리의 모든 고난을 보셨다는 그 말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직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투자를 해야 열린다. 열매를 위해 꽃을 준비하고 그 꽃을 열매로 만들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보면 한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사람같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강조한 모세입니까. 아니면 그 모든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고 모세를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데 집중한 아론입니까. 하나님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따르지 못해서, 결국 할례까지 시행하지 않았던 모세입니까. 애굽의 삼엄한 감시와 경고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모였고, 그 자리에 가지도 못했지만 그저 귀에 들리는 소문만으로 하나님을 믿고 경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까.
꽃은 중간에 과정이 있어야 열매가 된다.
그리고 그를 위해 나무가 튼튼해야 한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준비하심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만 제외하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안된 사람은 오직 모세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모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자들의 마음을 돌리셨는데, 모세의 마음은 변화시키지 않으셨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준비하고 투자하신 것을 생각해보라.
이전에 설교한 적이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신약의 십계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저 종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기 원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끝까지 참으시고 계십니다. 주위 모든 상황들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걱정하고 고민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자 거짓말같이 모든 상황이 풀림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창조하시고, 죄악을 인내하셨다. 홍수 이후 또한 바벨탑을 인내하셨다. 이스라엘을 준비하시고 크도록 투자하셨다. 우리같으면 알고 있으면서 지원하겠나?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택하심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택하신 우리를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계시는지, 알게 하십니다.
그후 예수 그리스도를 오시게 하고 죽이셨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 구원이라는 열매가 우리에게 왔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부분에 집중해보자.
살다보면,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났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로 의롭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선물, 값을 매길수 없는 열매에 우리는 무슨 열매로 보답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사람들이 아닌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들이 아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먼저 24절처럼 성령으로 걸어가 믿음으로 튼튼한 자들이 되자
추수감사절, 추석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론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준비됨은 분명 모세의 마음에 와닿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앞에 설 담력을 주었을 것입니다.
열매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튼튼함, 비전 능력, 성품 환경등을 투자할 수 있기를 그래서 꽃을 피우기를 그 꽃이 열매가 될 수있도록 서로 돕기를 소망한다.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에 추수감사절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작물은 그냥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물이 적으면 자라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물이 많으면 썩어버린다. 땅의 토질이 약간 달라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중간에 벌레들이 들끓으면 당연히 열매를 맺지 못한다.
병이 돌면 다 죽는다. 이 모든 것을 이겨도 태풍이나,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메뚜기 떼가 돌면 모든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간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소위 땅을 파먹는 사람들이지만, 누구보다 하늘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다.
맑은 날 하루, 비오는 날 하루에 울고 웃고 근심하다가 기뻐하는 것이 그들의 삶이다.
추수감사절은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다른 무엇도 아닌, 하나님께서 이 1년을 온전히 축복하셨기에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물론 좋은 일만 있지는 않다. 풍요로운, 많은 수확을 거둔 곳도 있지만, 소출이 적은 곳도 있다.
그럼에도, 1년간의 수고를 하나님께서 아시고 은혜를 내려주셨음을 기뻐하는 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이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가장 슬픈날이고, 비통한 날이 될수도 있다.
성경에 보면 종종 가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표적으로 엘리야선지자때, 3년 가뭄이다.
그때,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며 어떤 심정으로 추수감사절을 보냈을까.
씨를 뿌리고 1년동안 온갖 정성을 다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휴식이란 없다. 1년 365일 내내 논으로 밭으로 나가야 한다. 하루라도 쉬면 잡초가 생기고, 벌레가 끓는다. 하루의 차이로 죽어가는 작물이 생긴다. 그들은 말그대로 땅에 매여 산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은 하늘이 땅의 매임을 풀어주는 날이다. 다시 매일 것이지만, 다시한번 땅에 밭에 논에 묶일 것이지만, 그날과 그후 며칠, 길게는 몇주동안은 그런 걱정없이 살수 있는 기쁨의 날이다.
그런 날에, 아무런 소출없이, 뿌린 씨앗의 양보다 적은 열매를 거둔 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이번에 고3들은 수능을 쳤다. 길게는 12년,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공교육의 열매를 맺는 날이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가. 수많은 세월들이 있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냈다.
마치 농부가 1년 365일중 단 하루도 마음편히 쉬지 못하는 것처럼, 너희 고3들은 지금까지 그런 압박감속에서 지냈다.
나머지 고1 고2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제 우리차례구나. 난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떤 지역은 기쁨으로 축하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떤 지역은 그 소출, 열매, 결과를 보며 좌절하고 슬퍼할 것이다.
만약 너희의 수능 성적으로 가족중 한명이 죽어야 한다면 어떨거같은가. 수능등급이 낮아서 그 가족을 한명 버려야 한다면 어떤 마음이 될거 같은가.
추수감사절은 그 모든 애환과 그 모든 슬픔, 괴로움이 얽혀있는 날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는 기쁨과 즐거움, 행복이 얽혀있는 날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감사하고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날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좌절과 절망, 슬픔과 자기자신에 대한 비통함과 실망감이 가득한 날이다.
하지만 이 날은 감사의 날이다. 왜냐면 새로운 내일을 계획하고, 하나님께서 또한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채울 것을 약속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이다. 상황과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쥐고 놓치지 않고, 우리가 울때 함께 울고 우리가 힘들어할 때 함께 힘들어하시고, 우리가 좌절할 때 함때 마음아파 하시기에, 기도하는 날이다.
우리는 이 추수감사절에 어떤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것인가.
우리의 비통을 담아 드리자. 슬픔과 아픔을 담아 드리자. 애환을 담아 드리자.
그럴 때,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을 감사로 바꾸어주실 것이다. 기쁨이 넘치게 하실 것이다. 새로운 한해를 소망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담아 하나님께 드릴수 있는 우리,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릴수 있는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앞에 설 담력을 주시고 있습니다.
“주 은혜임을” 찬양
그러니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앞에 우리 또한 준비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던 모세처럼, 세상의 빛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함께 기도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찬양드리며 헌금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천천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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