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0.저녁예배설교

저녁예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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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왼쪽 끝 슬리퍼
성가대쪽 좌석에서 기도
종치기
다함께 묵상기도 드림으로 주일저녁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찬송가 279장 찬양드리겠습니다.
최태희 시무집사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출애굽기 4장 1절에서 9절입니다. 구약 86페이지입니다.교독하겠습니다.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5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9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호산나찬양대 찬양하겠습니다.
설교
서론
서론
출애굽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방어만 하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애굽왕이 어떤 공격을 이스라엘에게 하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스라엘 자손을 번성시키는 것뿐입니다. 공방을 주고 받을 때, 여러 수를 쓰고 가장 지혜롭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하기 마련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러시지 않으십니다. 물론 지난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일하시고 계시는지 알아본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하나님의 역사를 애굽은 결코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왕은 가장 비겁하고 잔인한 수를 씁니다. 갓난 아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닌, 짐승에게도 하지 않을 방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잔인하고 야비한 공격을 막아내십니다. 그리고 그 역사하심에 함께한 두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을 살펴보며, 이 두 여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수 있었는지 나누어보고, 우리 역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참여하는 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모세의 의심은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변함없이 계속 모세의 의심어린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본론
본론
본문은 애굽왕이 히브리산파 2명을 부르며 시작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명령을 받은 산파의 이름을 적고 있습니다. 이름이 나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요셉의 사망이후, 모세의 출생까지, 약 24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이스라엘인 중에 이름이 성경에 나온 자는 지금 이 두산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명의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신의 모습을 통해 보여줍니다.
자신에 대해 의심하고 자신을 부른 하나님을 의심했던 모세는 이제 자신의 동포들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1절에서 모세의 어조는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보다는 그들이 ‘못믿어~ 라고 말하면 어떻게 할겁니까?’에 가깝습니다. 왜냐면 모세는 이미 한번 동족들에 의해서 배신당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억때문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이 구원해야 할 동족을 믿지 못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함은 세상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높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은 무엇이냐?”입니다.
16절에서 애굽왕의 명령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참 끔찍한 명령입니다.
이 질문은 지금까지 모세가 하나님께 했던 2가지 질문과 똑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3장 11절에서 모세는 자신을 의심하며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자신이 누군지 알려달라는 질문이 아니라, 나는 그런 일을 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라는 자기 불신에서 나온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셨고, 함께 하시겠다라고 답하셨습니다.
더욱이 히브리어본문을 보면 이 명령이 완료형, 이미 이루어진 일로 나와있습니다. 성경에서 명령인데 완료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실 때 외에는 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을 예언하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벌써 실행되어, 이루어진 일이다라는 뉘앙스를 주기 위해 이렇게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애굽왕은 자신이 그저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명령했으니 무조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왕이 아니라 신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안에 모든 민족의 생사여탈권을 지닌자로서 신으로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13절의 ‘그의 이름은 무언인가’ 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라고 했지만 사실 모세가 하나님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습니다. 이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기에, 지금까지 애굽에서 고난당하는 것을 방치하다가 이제와서 구원하겠다고 하느냐라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대한 의심이 담긴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를 통해 영원불변하심, 편재하심,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조상의 하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이 되시고 너의 민족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답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명령은 너무나 잔인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계속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의 민족을 의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라 해도, 그들은 결단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겁니다. 내가 이렇게 배신당하고 40년동안 늙은 것을 보십시오! 라는게 모세가 하나님께 말하고 싶은 본심일 것입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명령은 히브리여자 산파 2명에게 내려졌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이스라엘에는 장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소집한 것도 아니라, 여자 산파, 그중 2명만 불러놓고 명령합니다. 그것도 아기를 학살하라는 잔혹한 명령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내가 명령했지만, 모든 원망과 그로 인한 공격은 너희 여자 2명이 다 뒤집어쓰라는 뜻입니다. 만약 실행되어 너무 큰 정치적 리스크가 생기면, 이 두 산파만 처형해서 민심을 다스리겠다는 악독한 심보가 뒤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2절에서 물어보신 것입니다.
애굽왕을 넘어 신이 되고싶어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과 리스크는 하나도지지 않겠다는 정말 치졸한 심보입니다. 거기다 여자아이는 살림으로써, 자신이 좋을대로 사용하겠다는 음험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화려한 궁전에서, 높은 보좌에 앉아, 신처럼 명령을 내리지만, 그 실체는 한낱 노예민족의 여자산파만도 못합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러나 애굽전체를 다스리는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분명 두 산파에게는 엄청난 시련과 갈등, 고난과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에 있는게 지팡이란 것을 몰라서 물어보셨겠습니까. 혹시 지팡이가 뭐하는건지 몰라서 물어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위에서 모세가 했던 두 질문, 그대로 다시 모세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즉, 이 질문은, ‘네 손에 든 그것은 무슨 능력이 있느냐?’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제 두 산파는 둘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내 생명을 주관하는 왕의 명령, 그 권위를 따를 것인가. 내 조상의 신, 실체도 없고 성전도 없고, 정확한 교리도 없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다인 하나님의 권위를 따를 것인가입니다.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입니까. 이 당시 신의 권위의 기준은 몇 번 말씀드렸지만 그 민족의 위치입니다. 노예민족의 신은 신들중에서 노예입니다. 신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인, 성전도 없고 화려한 신상도 없습니다. 더욱이 성경도 없습니다. 왜냐면 모세오경의 기록시기를 bc1200년경으로 보는데, 이때는 bc1500년경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았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신화와 교리까지 완비된 애굽의 우상들에 비해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지팡이는 그저 지팡이일뿐입니다. 생명도 없는, 주인의 손을 떠나면 그저 나무막대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지팡이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가 애굽의 우상들에게 물든 것으로 보이는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땅에 던지라는 명령에 순종하니 지팡이가 무엇으로 변합니까. 뱀으로 변합니다. 살아서 꿈틀거리게 되었습니다. 뱀은 오래도록 풍요와 지혜, 의술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뱀처럼 지혜로워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은 말합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즉, 산파들은 애굽왕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더 높이 봤고 자신을 죽일 애굽왕보다 하나님을 더욱 높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부분을 ‘산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죽은 나무막대기에 불과한 지팡이가 살아있는 뱀, 모세를 위협해서 도망치게 할 정도의 뱀으로 변했습니다. 지혜와 풍요, 치유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잘 살펴보면 우리 시대와 매우 비슷합니다. 우리가 노예는 아니지만, 말씀의 권위보다 세상이 더 높아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것은 너무나 힘들지만, 현대인답게 사는 것은 너무나 쉽고 편안한 시대입니다. 그냥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하면 됩니다. 법을 제정하고 법관들도 법을 바꾸면서 시대가 달리지고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법도 개편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법조차 바뀌는데, 우리가 법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지만 이 두 산파, 한낱 히브리여자에 불과했던 이 둘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당시 세상의 모든 물결과, 당장 눈앞에 있는 왕의 권위와 그 협박앞에서도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세가 그 모든 것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어떤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위에 있음을 알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땅에 던지라라는 단 한가지 말씀에 순종했을 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모세, 왕자였던 모세, 광야에서 40년간 훈련받은 모세가 순종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둘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인내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한 결과는 어땠습니까. 잘 되었습니까. 아무일 없이 넘어갔습니까. 애굽왕의 분노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한번 명령을 내리십니다. 뱀의 꼬리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모세가 그 명령대로 뱀의 꼬리를 잡자 뱀은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18절에 애굽왕은 분노하며 말합니다. 살렸느냐를 강조합니다. 자신의 결정에 반발하여, 자신의 권위를 훼손한 자들을 향해 말합니다. 한 주석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 너희가 무슨 권위로 이렇게 했느냐? 애굽왕은 자신의 권위가 침해당한 것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심판할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산파는 죽음을 각오하고 애굽왕앞에 섰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 과정에서도 사실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니 도망갑니다. 3절에 피하매는 날아오는 공을 피하듯이 몸을 살짝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도망쳐서 뱀한테서 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을 잡아라라고 말씀하는데 4절에서 모세는 뱀을 붙잡습니다. 우리말에는 똑같이 잡아라 잡았다라고 되어있지만, 히브리어에서는 다른 단어로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평범하게 물건잡듯이 잡으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사냥감을 잡듯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꽉 낚아채듯이 붙잡은 것입니다. 땅꾼이 뱀목을 잡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믿고 따랐지만, 두 산파가 직면한 것은 죽음의 위기였습니다. 우리야 결과를 알고 있지만 두 산파가 결과를 알았을까요.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은 세상의 그 어떤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 권세가 높으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곁에 있는데, 뱀잡는 것하나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아무말도 하시지 않습니다.
고난이 더욱더 심해져도, 이 고난보다 하나님께서 더욱 크시다는 것을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죽겠다고 할 지점까지 우리를 몰아붙일수도 있습니다. 이 두 산파가 바로 앞에 섰던 것처럼, 우리를 몰아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믿고 따릅시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이런 믿음과 인내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두 번째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품에 넣은 손에 나병이 났다가 낫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이제,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한 두 산파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납니다. 극한상황까지 믿음을 지킨 두 산파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은 엄청납니다.
뱀은 무엇의 상징이라고 했습니까. 풍요, 지혜, 의술, 다른 말로 치유의 상징입니다. 즉, 두 번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병이라는 저주와 그 치유, 생명 자체를 관장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위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천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아니고,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두가지 저주는 더욱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먼저 산파들에게 지혜를 부으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술에 바로 앞에서 할말이 있게 하십니다.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입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산파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분명히 화가 난 바로앞에서 지혜로운 대답을 할수 있도록 마음에 지혜를 부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부으신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산파들은 긴장을 했겠지만, 바로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할 수있었습니다. 이것은 19절에 애굽왕이 아니라 바로라고 칭함에서도 나타납니다. 애굽땅에 사는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애굽인들만의 왕, 바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인 두 산파가 바로를 무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키심과 지혜는 우리의 전인격과 몸에까지 역사하십니다.
뱀은 파라오의 왕관에 항상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파라오에게 지혜를 주며, 파라오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를 키운 공주, 여자의 몸으로 최초로 애굽의 왕이 되었던 하트셉수트의 조각에도 왕의 관에 뱀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키심과 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 뱀이, 모세가 머리도 아닌 꼬리를 잡으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습니다. 이집트에서 가장 하층이라 할 수 있는 유목민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바로를 미련하게 하십니다. 분명 바로는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산파들을 징죄해야 하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산파들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합니다. 정말 모든 이스라엘 여인들이 건장해서 아이를 잘 낳을까요? 라헬은 왜 죽었습니까. 아이낳다 죽지 않았습니까. 생각할 것없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텐데 바로는 그말에 수긍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미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산파들의 말에 복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미련한 자가 지혜로운 자의 말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이 말씀과 기적을 하는 순간에는 모르지만, 모세는 바로와 대면했을 때, 왕관에 달려있는 뱀의 형상을 보며, 자신의 지팡이를 보았을 것입니다.
분명 세상은 우리를 시험하고 극한으로 몰고 갈테지만, 세상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높고, 세상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모세의 목숨을 위협했던 바로가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바로는 쓸모없는 나무토막같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두가지 기적은 지금까지 모세의 목숨을 위협했던 바로가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바로는 쓸모없는 나무토막같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입니다.
은혜를 베풀다라는 말은 선하게 행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산파들에게 선하게 행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좀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산파들이 좋게, 잘되게 만드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번째 기적, 나병이 낫는 7절에서 한가지 단어가 3번이나 나옵니다. 그 단어는 되돌리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에서는 번역하기 어색해서 다시 품에 넣으라고 2번 쓰이고 마지막에 되돌아왔다로 번역되었습니다.
20절에 산파들이 잘되니 백성들이 번성하고 강해졌다라고 나옵니다. 이건 산파라는 역할을 이해하면 알 수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파들을 잘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산파들의 일거리가 늘어났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죠? 아이가 더 많이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출산하는 여인이 많아야 산파들이 할 일이 많고 그에 따른 댓가도 많이 받을테니까요. 산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도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 역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선하게, 잘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소원합니다.
뱀이 생명없는 지팡이로 되돌아갔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모든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나병걸린 손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지금은 마치 나병에 걸린 것처럼 무시당하고 멸시당하고, 고통받고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시며, 편재하시며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움직이시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없애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산파들의 집을 세우셨습니다.
모세가 불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준비하셨습니다. 2개로도 충분한데 또 주십니다.
이것은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아는대로 개인이 잘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집안이 번성한다는 뜻입니다. 나만, 당대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집안이 든든히 세워져서 대대로 복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또 주십니다 넘치도록 주십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21절의 후반.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다윗언약과 똑같습니다. 바로 후반절에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성경을 보면 다른 단어는 2개뿐입니다. ‘그들을 위해, 너를 위해, 하나님이, 여호와가’ 이 두가지뿐입니다. 삼하7장의 언약, 다윗언약을 통해 누가 우리에게 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언약이 바로 다윗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오해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을 높일 메시아를 찾게한 언약이기도 합니다. 말그대로 이 언약에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는 표적을 또 주십니다. 그를 통해 애굽의 모든 신보다 하나님께서 크심을 나타내십니다. 바로 모세를 위해서 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윗언약과 똑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실행하셨습니다. 누구에게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실행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높이십니다. 그가 세상에서 고난받고 압박받아 낮아진 것 이상으로 높이십니다. 그러니 이를 기억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되길 소원합니다.
그를 위해 8절에서는 표적의 소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기적이 무슨 말을 합니까. 기적이 아닌 기적을 베푸는 모세가 말을 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모세의 말을 듣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표적의 소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모세에게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받는 이스라엘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 여인을 통해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엇인지, 경외함으로 받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모세가 겪었던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나라고,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동족들도 말씀대로 나아옴을 경험하라고 부어주십니다. 그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경험이었다면, 아픔과 괴로움이 치유되는 경험도 하게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바로 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첫째, 이세상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가 더욱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주십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임하고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당장 모세가 깨닫지 못함에도 주십니다. 두가지 표적으로 충분한데도 또다시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넘치도록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어떤 때, 모세처럼 우리가 그것이 은혜인줄 모르고 넘어가도 개의치 않으시고 부어주십니다.
첫째, 모든 위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지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임하고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두가지 표적으로 충분한데도 또다시 부어주셨듯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어떤 때, 우리가 그것이 은혜인줄 모르고 넘어가도 개의치 않으시고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혹시 오늘 말씀의 모세의 모습같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뱀으로 만드셨는데, 그 뱀이 무서워서 도망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뱀을 잡으라고 했더니, 마치 뱀을 사냥하듯이 온갖방법을 동원해서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가 나무토막같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불신에 빠져있는 모세와 같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순종하지도, 기다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둘째,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른 말로 잘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잘됨은 개인을 벗어나 민족 전체로 영향을 미치게 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말씀을 통해,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그 깊은 속내를 당장은 이해할 수 없어도 따를 수있기를 바랍니다.
이 두가지 표적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불신에 빠져있는 모세와 같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순종하지도, 기다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말씀을 통해,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떨 때 모세를 광야의 한 복판, 호렙산으로 인도하셨듯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믿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원한 생명의 길에 서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어떨 때, 우리가 불평하는 그 불평을 하나하나 대답하시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인내하며 기다리십니다.
셋째, 그의 집안에 복을 주시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함께 동참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떨 때 모세를 광야의 한 복판, 호렙산으로 인도하셨듯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믿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원한 생명의 길에 서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어떨 때, 우리가 불평하는 그 불평을 하나하나 대답하시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인내하며 기다리십니다.
어떨 때 모세를 광야의 한 복판, 호렙산으로 인도하셨듯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믿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원한 생명의 길에 서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어떨 때, 우리가 투덜거리는 그 불평을 하나하나 대답하시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인내하며 기다리십니다.
모세처럼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면, 결국 모세처럼 하나님을 세상을, 자신을 믿지 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의 틀을 벗고, 세상의 관념들을 벗고, 하나님을 먼저 보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은혜와 축복이 넘치길 소원합니다.
이런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모두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하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찬송가 369장 다함께 찬양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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