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37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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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론
여러분에게 교회란 어떤 곳인가? 교회라고 하면 어떤 느낌인가? 이 질문에 한번쯤 스스로 대답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교회의 이미지는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어떤 분이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싫은 사람은 교회를 떠나게 된다. 당장은 이 교회를 떠나 저 교회로 가지만, 대부분은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은 믿음에서 파선하는 경우도 많다.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의 문제는 교회안에서 서로 싸우거나 미워하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 모두 믿는 자이지만 당연히 서로 싸울수도 있다. 교회안에서 정말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목사님하고도 서로 싸울수 있다. 그래서 결국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옮기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정말 자신의 구주로 믿고, 소위 내 생명을 예수님께 빚졌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교회로 돌아온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이미지와 우리의 신앙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오늘은 교회에 대해 알아보자.
본론
먼저 교회는 성령께서 세운 곳이다.
오늘 40절까지 설교는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하는 설교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베드로와 믿는 모든 자들은 성령의 임재를 기다렸다. 그를 위해 기도했다.
오순절이 있기 전에 그들의 모임은 교회가 아니었다. 전혀 드러나지도 않았고, 그들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무엇인지, 다른 말로 대체 우리의 모임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후 사람들은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움직이기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모여서 기도만 할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성령께서 오신 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교회가 되었다.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게 되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교회에 대해 살펴보았다. 교회는 성령께서 세우신 곳이다. 교회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끝까지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러나 이 땅의 교회에는 가라지가 있을수 있다. 그래서 독초인 가라지에 의해 다치고, 어떨 때는 가라지가 아닌데도, 서로를 가라지라고 여기며 미워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교회는 사랑과 회복의 요람이 되어야 한다. 서로 미워하고 다칠수 있지만, 그것들을 어떤 때는 안아주고, 어떤 때는 질책하며, 회복하고 성정하게 하는 사랑의 공동체다. 그리고 그 사랑위에 하나님을 경외함, 두려워함이 있는 곳이다. 이것이 교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도우셨다. 그 결과 기적과 기사들이 일어났다.
그 기적을 체험한 자들은 함께 모여 서로서로를 도와주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나누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즉, 교회는 성령께서 다스리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은, 이런 일이 없다하더라도 교회는 교회란 것이다.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다. 우리에게 초대교회와 같은 기적이 있는가?
서로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가? 단순히 같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돈이나 물질을 나누어주는가?
그렇다면, 교회 내의 사람들이 교회로 인해 성장한다면, 교회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성장하는가? 한번 알아보자.
그런일은 별로 없다.
어떤 사람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공부해보니, 초대교회도 100년쯤 지나니까 똑같더라. 200년정도 되니, 즉, 3세기정도 되니 우리보다 못하더라.
본론
멀리갈 것도 없이 사도바울의 서신들만 봐도 말로도 하기 힘든 온갖짓들을 다 한다.
사도행전의 모습은 최초의 교회의 모습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 - 성령의 역사하심.
미안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는 이랬지만, 나중에 유대인이 아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충돌했다. 선교를 허용하기는 했지만, 끝까지 보수적이었고, 결국 유대인들에게 흡수되었다.
지난시간에 살펴본바와 같이 교회의 성장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단한번으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회내부에 들어왔다.
환상을 깨자면 41절에서 47절의 모습이 50년정도 지나니 사라졌다는 소리다.
즉,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했다.
5000명이면 엄청나게 많이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를 10만으로 추정한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교회는 예루살렘 인구의 5%에 불과하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라고 믿는 그들에게 이것은 매우 답답한 상황이라 할 수있다.
당연히 그들의 전도는 동족에게 향할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내 증인되라고 했지만, 그것을 이방민족을 구원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도는 교회의 성장의 원동력이다. 전도가 없으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보다 같은 유대인을 전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4장이후 유대인들이 전도되었다는 말씀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교회를 핍박하는 내용만 나온다. 대표적으로 스데반집사의 순교가 7장에 나오고 사울의 박해가 나온다. 그래서 특히 사마리아에서 믿는 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흩어지는 장면도 나온다.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 생업, 앞길을 포기한 것이다.
그 후에는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냥 이방인이 아니라 내시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후 사울의 회개, 베드로의 기적과 이방인의 회심이후 오늘의 사건이 나온다.
왜 전도 이야기를 하며, 이 이야기를 하는가. 전도는 교회성장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전도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교회를 성장시키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권면하시는 것이다.
왜 오늘 본문 1절부터 10절까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는가.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베드로의 증언으로 이들은 겨우 받아들인다. 하지만 행동하지는 않는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방인을 위해 누구를 파송했는가. 선교를 위해 누구를 보냈는가.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외려 안디옥의 교회에서 사울과 바나바를 파송했다.
그리고 이후 교회사는 예루살렘 교회가 단 한번도 크게 성장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오히려 점점 약해져 종국에는 그저 첫교회였다는 명예만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는 그것조차 희미해졌다고 한다.
교회는 전도를 통해 자란다. 우리는 그렇다면 그 전도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첫교회, 장자이신 예루살렘 교회의 촛대를 옮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촛대가 옮겨진 예루살렘 교회는 서서히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세워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그 뜻에 순종하는 자녀들에 의해 세워진다.
그러나 이예루살렘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순종,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이 그들을 떠났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지만, 우리가 불순종하고 우리 마음대로 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모든 것을 불태우는 불로 우리에게 올 것이다.
그 불속에서도 끝까지 고집을 피웠던 예루살렘 교회는 완전히 불타 없어져 버렸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하나님께 겸비하는 삶,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향으로 갈 수 있게 준비된 자가 되길 원한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 우리의 교회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방향으로 변화되길 소원한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우리 모두가 되고 교회가 되길 소원한다.
한마디로 세대가 바뀌니 사라졌다는 뜻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우리는 각자 교회는 이래야지. 사역자들은 이래야지. 집사님들 장로님들은 이래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 생각을 하는 여러분은 나는 이래야지 라고 생각하는가?
2세기를 넘어 3세기가 되었을 때, 많은 핍박들이 사라졌다. 교회는 대놓고 건물을 세우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핍박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말했는지 아는가? 사역자들에게 모든 도덕과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성경과 하나님의 뜻과 별 관계없는 삶을 살았다.
그들의 논리는. 너희는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니 너희만 잘하면 되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은 것처럼, 너희도 우리 대신해서 똑바로 살아라 였다.
그리고 그때, 가장 큰 박해가 닥쳤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교회를 떠났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각자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본적도 없을 것이다. 왜냐면 부모님이 다니라고 해서 학교에 다니고 다니라고 해서 교회에 다니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자신이 고민하고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 내가 지금 말하는 고민과 생각은 말씀을 보고 들으며 고민하는 것이다. 혼자서 사색하는게 아니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자신의 고집은 쎄서, 자신의 기준에 벗어나면 쉽게 등을 돌린다.
하지만 교회는 성령께서 세우셨다. 그러나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가 성령께서 세우신 기반에 어떤 교회를 만들지 우리에게 맡기셨다.
천지창조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되었다면, 교회를 세움은 성령을 통해 기반을 놓으시고 그 이후를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의 교회가 세워지고 어떤 곳은 이곳이 교회인가싶은 곳도 있다.
그때문에 우리속에 교회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결국 우리속에 있는 이미지대로 교회를 세워나갈 것이다.
우리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나는 우리의 교회가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담대히 선포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절대 순종했으면 좋겠다.
(양치기견)
또 하나님께서 피값주고 사신 형제 자매들을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사랑과 은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 우리의 목소리와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그 결과 이렇게 억지로 친구들을 교회로 끌여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움직여서 구원받는 사람을 우리에게 이끌어주시는 역사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나의 교회는 이렇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가.
나와 같지는 않지만, 말씀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상을 가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이미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기쁨으로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소원한다.
“주님 말씀하시면” 찬양
다함께 기도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찬양드리며 헌금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천천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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