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1.저녁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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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끝 슬리퍼
성가대쪽 좌석에서 기도
종치기
다함께 묵상기도 드림으로 주일저녁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찬송가 251장 찬양드리겠습니다.
강성술 시무집사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출애굽기 1장 15절에서 22절입니다. 구약 82페이지입니다.교독하겠습니다.
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호산나찬양대 찬양하겠습니다.
설교
서론
서론
출애굽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방어만 하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애굽왕이 어떤 공격을 이스라엘에게 하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스라엘 자손을 번성시키는 것뿐입니다. 공방을 주고 받을 때, 여러 수를 쓰고 가장 지혜롭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하기 마련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러시지 않으십니다. 물론 지난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일하시고 계시는지 알아본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힘든 삶을 사는 것같습니다. 평안해도 그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그렇게 삽니다. 힘든 시기는 더욱 힘들어집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하나님의 역사를 애굽은 결코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왕은 가장 비겁하고 잔인한 수를 씁니다. 갓난 아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닌, 짐승에게도 하지 않을 방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잔인하고 야비한 공격을 막아내십니다. 그리고 그 역사하심에 함께한 두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을 살펴보며, 이 두 여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수 있었는지 나누어보고, 우리 역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참여하는 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본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가장 먼저 구하는 것은 위로와 평안인 것 같습니다.
본문은 애굽왕이 히브리산파 2명을 부르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위로와 평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사리 지치지 않고, 조그마한 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조그만 돌부리를 오히려 뽑아버릴 수 있는 강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강해지며, 그를 위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와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명령을 받은 산파의 이름을 적고 있습니다. 이름이 나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요셉의 사망이후, 모세의 출생까지, 약 24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이스라엘인 중에 이름이 성경에 나온 자는 지금 이 두산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명의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신의 모습을 통해 보여줍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함은 세상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높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본론
16절에서 애굽왕의 명령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참 끔찍한 명령입니다.
더욱이 히브리어본문을 보면 이 명령이 완료형, 이미 이루어진 일로 나와있습니다. 성경에서 명령인데 완료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실 때 외에는 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을 예언하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벌써 실행되어, 이루어진 일이다라는 뉘앙스를 주기 위해 이렇게 사용합니다.
가장 먼저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하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애굽왕은 자신이 그저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명령했으니 무조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왕이 아니라 신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안에 모든 민족의 생사여탈권을 지닌자로서 신으로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강해진다.
하지만 그 명령은 너무나 잔인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9절에 은혜로서 굳게함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우리가 은혜로 강해지고 은혜로 강해짐이 좋다는 뜻입니다.
이 명령은 히브리여자 산파 2명에게 내려졌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이스라엘에는 장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소집한 것도 아니라, 여자 산파, 그중 2명만 불러놓고 명령합니다. 그것도 아기를 학살하라는 잔혹한 명령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내가 명령했지만, 모든 원망과 그로 인한 공격은 너희 여자 2명이 다 뒤집어쓰라는 뜻입니다. 만약 실행되어 너무 큰 정치적 리스크가 생기면, 이 두 산파만 처형해서 민심을 다스리겠다는 악독한 심보가 뒤에 있는 것입니다.
9절은 음식과 은혜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튼튼히 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하지만 몸을 강하게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몸이 강해도, 마음이 약하면, 무엇이든지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9절은 우리의 마음이 강해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들, 가르침들에 끌려다니지 말라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애굽왕을 넘어 신이 되고싶어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과 리스크는 하나도지지 않겠다는 정말 치졸한 심보입니다. 거기다 여자아이는 살림으로써, 자신이 좋을대로 사용하겠다는 음험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화려한 궁전에서, 높은 보좌에 앉아, 신처럼 명령을 내리지만, 그 실체는 한낱 노예민족의 여자산파만도 못합니다.
그 근거로 나오는 것이 10절과 11절입니다. 10절과 11절은 지상 제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 드려지는 제사와 제단입니다. 분명 제단이 있지만, 그 제단을 섬기는 자들조차 그 제단에서 드려지는 제물, 음식을 먹을 권한이 없다라고 말을 합니다. 11절은 땅에 있는 제단은 땅에 있는 규칙대로 피는 성소로, 육체는 영문밖에서 불살라진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애굽전체를 다스리는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분명 두 산파에게는 엄청난 시련과 갈등, 고난과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세상은 세상의 원칙에 따라 일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의 몫은 없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을 따라가고, 세상의 제단에 제물을 드려봐야, 그 제물에 대한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산파는 둘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내 생명을 주관하는 왕의 명령, 그 권위를 따를 것인가. 내 조상의 신, 실체도 없고 성전도 없고, 정확한 교리도 없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다인 하나님의 권위를 따를 것인가입니다.
또한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앞서가신 예수 그리스도조차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12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심문당하실 때,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문밖에 나아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입니까. 이 당시 신의 권위의 기준은 몇 번 말씀드렸지만 그 민족의 위치입니다. 노예민족의 신은 신들중에서 노예입니다. 신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인, 성전도 없고 화려한 신상도 없습니다. 더욱이 성경도 없습니다. 왜냐면 모세오경의 기록시기를 bc1200년경으로 보는데, 이때는 bc1500년경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았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신화와 교리까지 완비된 애굽의 우상들에 비해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가 애굽의 우상들에게 물든 것으로 보이는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바로 뒤따라오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거룩이라는 죄악에 물든 사람은 결코 갈수 없는 그곳을 향한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이 어떤 것인지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이 세상의 방식으로 마음을 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그대로 어불성설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함은 세상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높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7절은 말합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즉, 산파들은 애굽왕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더 높이 봤고 자신을 죽일 애굽왕보다 하나님을 더욱 높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부분을 ‘산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13절에 말씀하십니다.
이 때의 상황을 잘 살펴보면 우리 시대와 매우 비슷합니다. 우리가 노예는 아니지만, 말씀의 권위보다 세상이 더 높아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것은 너무나 힘들지만, 현대인답게 사는 것은 너무나 쉽고 편안한 시대입니다. 그냥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하면 됩니다. 법을 제정하고 법관들도 법을 바꾸면서 시대가 달리지고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법도 개편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법조차 바뀌는데, 우리가 법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하지만 이 두 산파, 한낱 히브리여자에 불과했던 이 둘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당시 세상의 모든 물결과, 당장 눈앞에 있는 왕의 권위와 그 협박앞에서도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세가 그 모든 것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어떤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위에 있음을 알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인내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 피와 살을 받아먹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강해지고, 강해지기 이전에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영문밖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한 결과는 어땠습니까. 잘 되었습니까. 아무일 없이 넘어갔습니까. 애굽왕의 분노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8절에 애굽왕은 분노하며 말합니다. 살렸느냐를 강조합니다. 자신의 결정에 반발하여, 자신의 권위를 훼손한 자들을 향해 말합니다. 한 주석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 너희가 무슨 권위로 이렇게 했느냐? 애굽왕은 자신의 권위가 침해당한 것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심판할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산파는 죽음을 각오하고 애굽왕앞에 섰을 것입니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습니다. 영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삶의 기반도 없고, 세상이 제공하는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영문밖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 그 십자가의 치욕을 우리도 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믿고 따랐지만, 두 산파가 직면한 것은 죽음의 위기였습니다. 우리야 결과를 알고 있지만 두 산파가 결과를 알았을까요.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은 세상의 그 어떤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 권세가 높으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강해지고 싶습니까. 좀더 잘 살기 위해서아닙니까. 지금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힘들어하는 것이 아닌 더욱 굳건해지고, 강건해져서 더욱 멋진 삶을 살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둘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인내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고난이 더욱더 심해져도, 이 고난보다 하나님께서 더욱 크시다는 것을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죽겠다고 할 지점까지 우리를 몰아붙일수도 있습니다. 이 두 산파가 바로 앞에 섰던 것처럼, 우리를 몰아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믿고 따릅시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이런 믿음과 인내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강건해질 자리는 그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영문밖으로 나아가는 곳이며,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길에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한 두 산파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납니다. 극한상황까지 믿음을 지킨 두 산파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은 엄청납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짊어진 짐만으로도 버거운데 그리스도의 치욕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그래서 더욱 망설이고 있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위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지키십니다.
우리가 있는 여기에는 우리가 머물 곳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14절에 영구한 이란 말의 원 뜻은 머물다, 거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는 자리 내가 일하는 자리, 그래서 내가 얻을 자리를 보고 그것을 위해 더욱 굳건해 지길 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벌써 그 자리, 세상과 어울리려는 자리에 그리스도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어울리려는 그 자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천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아니고,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영원히 살 거입니까.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영원히 이 땅에서 살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영원히 누릴 것을 준비하고 그를 위해 강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저 천국에 우리의 자리를 마련해놓으셨습니다.
먼저 산파들에게 지혜를 부으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술에 바로 앞에서 할말이 있게 하십니다.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입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산파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분명히 화가 난 바로앞에서 지혜로운 대답을 할수 있도록 마음에 지혜를 부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부으신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산파들은 긴장을 했겠지만, 바로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할 수있었습니다. 이것은 19절에 애굽왕이 아니라 바로라고 칭함에서도 나타납니다. 애굽땅에 사는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애굽인들만의 왕, 바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인 두 산파가 바로를 무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키심과 지혜는 우리의 전인격과 몸에까지 역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자리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앞서 12장 13절에서 말씀 드렸듯이 길에 발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발에 길을 맞추는 자로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키심과 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바로를 미련하게 하십니다. 분명 바로는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산파들을 징죄해야 하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산파들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합니다. 정말 모든 이스라엘 여인들이 건장해서 아이를 잘 낳을까요? 라헬은 왜 죽었습니까. 아이낳다 죽지 않았습니까. 생각할 것없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텐데 바로는 그말에 수긍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미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산파들의 말에 복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미련한 자가 지혜로운 자의 말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저 소위 말해 영혼없이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강건해지지 않는다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분명 세상은 우리를 시험하고 극한으로 몰고 갈테지만, 세상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높고, 세상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문밖으로 나아왔고, 앞서 가신 예수님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고 우리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전쟁에 징집병으로 끌려온 자는 아무 생각없이 따라가면 됩니다. 하지만 왕자로서 공주로서 참여한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를 베풀다라는 말은 선하게 행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산파들에게 선하게 행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좀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산파들이 좋게, 잘되게 만드셨다라는 뜻입니다.
20절에 산파들이 잘되니 백성들이 번성하고 강해졌다라고 나옵니다. 이건 산파라는 역할을 이해하면 알 수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파들을 잘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산파들의 일거리가 늘어났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죠? 아이가 더 많이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출산하는 여인이 많아야 산파들이 할 일이 많고 그에 따른 댓가도 많이 받을테니까요. 산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도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길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므로 영문밖으로, 예수께로 나아가는 길에 몇가지가 필요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 역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선하게, 잘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소원합니다.
먼저 찬양의 열매가 필요합니다. 길이 힘들다고 어렵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과 불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술에 찬양이라는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왜냐면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한번의 완전한 제사를 드렸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만으로도 기쁨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슬플 때, 입에서 찬양이 떠나지 않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산파들의 집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아는대로 개인이 잘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집안이 번성한다는 뜻입니다. 나만, 당대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집안이 든든히 세워져서 대대로 복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둘째, 찬양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선행과 나눔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형제 자매된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행, 바르게 사는 것과, 나눔, 나누며 사는 삶을 바라십니다. 그리고 찬양과, 바르게 삶과 나누며 삶이 하나될 때 우리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21절의 후반.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다윗언약과 똑같습니다. 바로 후반절에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성경을 보면 다른 단어는 2개뿐입니다. ‘그들을 위해, 너를 위해, 하나님이, 여호와가’ 이 두가지뿐입니다. 삼하7장의 언약, 다윗언약을 통해 누가 우리에게 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언약이 바로 다윗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오해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을 높일 메시아를 찾게한 언약이기도 합니다. 말그대로 이 언약에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돌아보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발에 길을 맞춘다는 것은 내 발에 길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발에 길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언약과 똑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실행하셨습니다. 누구에게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실행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앞장서 인도하는 자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높이십니다. 그가 세상에서 고난받고 압박받아 낮아진 것 이상으로 높이십니다. 그러니 이를 기억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되길 소원합니다.
결론
모두가 알다시피, 오직 이 일만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때, 그들은 그들의 삶과 죽음으로 뒤따르는 자들을 인도했습니다. 언제나 빚진자의 심정으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이 말씀은 묵상한 저에게 큰 경고입니다. 빚진자의 심정을 잃는다면, 앞선 자가 아니라 뒤쳐진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받는 이스라엘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 여인을 통해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엇인지, 경외함으로 받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분명 히브리서의 당시에도 앞선자였다가 뒤쳐진자가 된, 인도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습니다. 담담히 모든 인도자들이 빚진자의 심정으로 행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첫째, 이세상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가 더욱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니 앞선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왜 17절 마지막에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모든 위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지키십니다.
우리의 가장 좋은 인도자이자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공생애기간에도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귀신을 쫓지 못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원하십니다.
둘째,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른 말로 잘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잘됨은 개인을 벗어나 민족 전체로 영향을 미치게 하십니다.
결론
셋째, 그의 집안에 복을 주시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함께 동참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런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모두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하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은혜로 강해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영문밖으로, 우리에게 강요하는 세상의 틀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따라갈 때만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지고 갈 때, 힘든 일들이 많이 찾아올 것입니다. 시험거리들이 무수히 우리를 방해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입술에 찬양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찬양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릴 수 있는 기쁨의 제사입니다. 찬양을 귀히 여기시고 찬양의 열매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찬양의 열매는 바르게 삶과 나눔이 합쳐질 때,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시는 제사, 예배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한걸음마다 찬양이 새겨지는 역사가 있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앞선 자를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근심이 아닌 기쁨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자가 되어, 나만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모두가 강해지는 우리 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찬송가 313장 다함께 찬양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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