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18.저녁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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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끝 슬리퍼
성가대쪽 좌석에서 기도
종치기
다함께 묵상기도 드림으로 주일저녁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찬송가 95장 찬양드리겠습니다.
최병욱 시무집사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12절에서 17절입니다. 신약 369페이지입니다.교독하겠습니다.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호산나찬양대 찬양하겠습니다.
설교
서론
서론
우리는 항상 힘든 삶을 사는 것같습니다. 평안해도 그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그렇게 삽니다. 힘든 시기는 더욱 힘들어집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마치 마라톤과 같습니다. 잠시 앞선다고 끝까지 앞선 자라고 확신할 수도 없고, 지금 뒤쳐져 있다고 영원히 뒤쳐진다고 할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혼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믿음의 경주, 믿음의 싸움에 임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가장 먼저 구하는 것은 위로와 평안인 것 같습니다.
본론
그런데, 이 위로와 평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사리 지치지 않고, 조그마한 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조그만 돌부리를 오히려 뽑아버릴 수 있는 강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강해지며, 그를 위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와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는 명령을 하며 시작합니다. 이 명령은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믿는 모든 사람을 향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사람에게 하는 명령임과 동시에, 우리 전체를 향해 하시는 명령입니다.
본론
즉, 우리가 믿는 자라면, 우리에게는 평강과 거룩을 따라갈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하며 시작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평강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강해진다.
오늘 본문에서 화평함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11절에 나온 평강과 같은 단어입니다.
9절에 은혜로서 굳게함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우리가 은혜로 강해지고 은혜로 강해짐이 좋다는 뜻입니다.
11절에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징계, 다른 말로 하나님의 훈련의 결과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9절은 음식과 은혜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튼튼히 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하지만 몸을 강하게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몸이 강해도, 마음이 약하면, 무엇이든지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9절은 우리의 마음이 강해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들, 가르침들에 끌려다니지 말라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이해하기 쉽게 의와 평강의 열매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이 말을 직역하면 ‘의로운 평강의 열매’입니다. 의의 열매와 평강의 열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강이라는 열매 자체가 의롭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 근거로 나오는 것이 10절과 11절입니다. 10절과 11절은 지상 제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 드려지는 제사와 제단입니다. 분명 제단이 있지만, 그 제단을 섬기는 자들조차 그 제단에서 드려지는 제물, 음식을 먹을 권한이 없다라고 말을 합니다. 11절은 땅에 있는 제단은 땅에 있는 규칙대로 피는 성소로, 육체는 영문밖에서 불살라진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전 구절인 10절 후반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는 오직 은혜로 강해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근거로 나오는 것이 10절과 11절입니다. 10절과 11절은 지상 제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 드려지는 제사와 제단입니다. 분명 제단이 있지만, 그 제단을 섬기는 자들조차 그 제단에서 드려지는 제물, 음식을 먹을 권한이 없다라고 말을 합니다. 11절은 땅에 있는 제단은 땅에 있는 규칙대로 피는 성소로, 육체는 영문밖에서 불살라진다라고 말을 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
이 말씀대로 세상은 세상의 원칙에 따라 일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의 몫은 없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을 따라가고, 세상의 제단에 제물을 드려봐야, 그 제물에 대한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여 맺는 열매가 11절에 나오는 의로운 평강의 열매입니다.
또한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앞서가신 예수 그리스도조차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12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심문당하실 때,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문밖에 나아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강이라는 열매는 의로움과 거룩함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의 평화속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그것은 그 평강의 열매속에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뒤따라오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거룩이라는 죄악에 물든 사람은 결코 갈수 없는 그곳을 향한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평안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란 결론이 나옵니다. 오히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평강속에 거하기 위해 애쓰고 힘쓰라고 하십니다. 평화 속에 있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이 세상의 방식으로 마음을 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그대로 어불성설입니다.
은혜 받아서 그 결과로 평안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다른 원인에 의해서 우리가 평화로운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 안에 거하기 위해 애쓰고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말씀하십니다.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브리서를 처음 읽었던 성도들은 과연 평안함 속에 있었습니까.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불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담대하게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도 있었겠지만, 하루하루를 괴로워하며 주일이 되면 예배의 자리로 가야할지를 고민하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 피와 살을 받아먹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강해지고, 강해지기 이전에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영문밖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평강이었습니다. 이 평강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 이제까지 지켜주셨고, 지금도 지키시고 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잠시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화평이 먼저 있어야지만 평강이 우리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평안이 우리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진정, 의로움과 거룩함을 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습니다. 영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삶의 기반도 없고, 세상이 제공하는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영문밖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 그 십자가의 치욕을 우리도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니 평강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 환경이 불안하며, 내 직장이 불안하며, 내 위치가 붕 뜬 것같습니까. 평강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애쓰며, 온 힘을 다해 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따르라는 말은 가혹하리만치 힘쓰라는 의미입니다. 앞사람이 오라고 하든 말든 다른 곳에 기웃기웃하다가 너무 멀어졌다 싶으면 후다닥 뛰어가는 게 아닙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는 등반대처럼, 외줄타기로 절벽을 올라가는 팀처럼, 앞사람을 놓치면 죽는다는 각오로 필사적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강해지고 싶습니까. 좀더 잘 살기 위해서아닙니까. 지금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힘들어하는 것이 아닌 더욱 굳건해지고, 강건해져서 더욱 멋진 삶을 살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강건해질 자리는 그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영문밖으로 나아가는 곳이며,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길에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평강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죄는 끈적하며 끈질기게 우리에게 달라붙을 것입니다. 특히 사람사이에서 온 갈등과 그 갈등에서 나온 분노와 원망, 슬픔과 같은 감정들은 정말 끊임없이 우리를 쿡쿡 찌를 것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짊어진 짐만으로도 버거운데 그리스도의 치욕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그래서 더욱 망설이고 있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평강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여기에는 우리가 머물 곳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14절에 영구한 이란 말의 원 뜻은 머물다, 거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는 자리 내가 일하는 자리, 그래서 내가 얻을 자리를 보고 그것을 위해 더욱 굳건해 지길 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벌써 그 자리, 세상과 어울리려는 자리에 그리스도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어울리려는 그 자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평강을 구하되,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강을 구하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영원히 살 거입니까.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영원히 이 땅에서 살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영원히 누릴 것을 준비하고 그를 위해 강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저 천국에 우리의 자리를 마련해놓으셨습니다.
저는 지금 평강, 평안, 평화라는 단어를 섞어서 쓰고 있습니다. 그 어떤 단어이든지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고 화평한 상태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가지를 전달하기 위해 섞어서 썼습니다. 이 세가지 단어가 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이라는 의미가 되듯이,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려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자리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앞서 12장 13절에서 말씀 드렸듯이 길에 발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발에 길을 맞추는 자로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 한명만 평안하다고, 평화롭다고 정말 평강에 이를수 있습니까. 옆에서 형제가 죽어가며, 아파서 신음합니다. 어떤 형제는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서 실족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나만 평화롭다면, 그것은 평안입니까.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평화는 관계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도, 우리의 모든 일, 즉 일이라는 관계속에 얽매인 모든 사람들이 다 형통하게 돌아가야 그 평안이 찾아옵니다. 결코 평화란 혼자서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모두가 함께 손을 잡고 이 평안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저 소위 말해 영혼없이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강건해지지 않는다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마치 믿음의 선진들과 천사들이 증인들이 되어서 구름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빽빽한 안개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응원하는 것처럼, 우리는 함께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평강을 구해야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문밖으로 나아왔고, 앞서 가신 예수님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고 우리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15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 라고 합니다. 다르게 번역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잘 살피라입니다. 그것도 한번 살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피라고 하십니다. 이 살피라는 말은 다른 뜻으로 감독하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심판이 경기에 집중해서 선수들을 보듯이 우리도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살필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징집병으로 끌려온 자는 아무 생각없이 따라가면 됩니다. 하지만 왕자로서 공주로서 참여한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피지 않으면 쓴뿌리, 죄악들은 너무나 쉽게 우리가운데 퍼집니다. 나중에 알아차렸을 때는 그것이 당연한 분위기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적당히 사람들과 거리를 둡니다.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습으로 가면을 씁니다. 물론 이런 모습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함께 있는 사람을 배려하며, 서로 맞추어가며, 하나되는 것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마치 2인3각 달리기처럼, 우리는 발맞추어 달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강이 사라지고, 서로 사랑으로 살핌이 사라지면, 배려가 아닌 나 자신을 방어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하게 됩니다. 서로 눈치보며 나서지 않고, 내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단 하나라도 내어놓기 싫어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길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므로 영문밖으로, 예수께로 나아가는 길에 몇가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평강입니까. 그 결과를 16절에서 노골적으로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렇게 소위 말해 자기만 생각하게 되면, 너희중에서 에서가 나올 것이다. 조금의 이익을 위해 장자의 명분, 믿음과 평강을 팔아버리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에서는 회개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믿음의 길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때는 눈물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 눈물은 오직 자기만을 위한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만, 에서는 자신이 축복받지 못했기에 그 울분으로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는 늦습니다.
먼저 찬양의 열매가 필요합니다. 길이 힘들다고 어렵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과 불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술에 찬양이라는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왜냐면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한번의 완전한 제사를 드렸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만으로도 기쁨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슬플 때, 입에서 찬양이 떠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러니 우리들 중에 에서를 만드는 자가 되지 맙시다. 이삭과 리브가가 피흘려서라도, 목숨을 걸고라도 자신의 아들 에서가 이방여자와 결혼 하는 것을 막고, 그 전에 사냥을 배운다고 밖으로 다니며, 온갖 이방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온 힘을 다해 막았다면, 에서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둘째, 찬양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선행과 나눔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형제 자매된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행, 바르게 사는 것과, 나눔, 나누며 사는 삶을 바라십니다. 그리고 찬양과, 바르게 삶과 나누며 삶이 하나될 때 우리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됩니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평강을 구합시다. 우리의 평강을 구합시다. 분명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돌아보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발에 길을 맞춘다는 것은 내 발에 길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발에 길을 맞추는 것입니다.
결론
마지막으로, 앞장서 인도하는 자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정리하며, 한가지만 더 나누기 원합니다. 이렇게 평강을 구하는 과정은 너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나눈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 채찍질까지 하십니다. 왜인줄 아십니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가 더욱 강하게 되어 승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깍아 자신에게 맞추려는 세상에 대항할 힘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오직 이 일만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때, 그들은 그들의 삶과 죽음으로 뒤따르는 자들을 인도했습니다. 언제나 빚진자의 심정으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이 말씀은 묵상한 저에게 큰 경고입니다. 빚진자의 심정을 잃는다면, 앞선 자가 아니라 뒤쳐진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며, 사랑으로 채찍질하십니다.
분명 히브리서의 당시에도 앞선자였다가 뒤쳐진자가 된, 인도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습니다. 담담히 모든 인도자들이 빚진자의 심정으로 행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채찍질합니다. 휴전선 근처에 몇만명의 장병들이 있습니다. 모든 지휘관들은 그 수많은 장병들이 10분안에 다 죽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10분을 위해 군은 우리의 수많은 아들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총알받이로 쓰기 위해 훈련시킵니다.
그러니 앞선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왜 17절 마지막에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비정한 세상에 대항하고, 지지않고 우리가 달려가게 하시기 위해 사랑으로 우리를 채찍질하십니다.
우리의 가장 좋은 인도자이자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공생애기간에도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귀신을 쫓지 못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니 애쓰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도 챙기기 힘든데, 내가 왜 옆사람까지 챙겨야 하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결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11장 6절에서 상주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가장 값진 상을 더하시기 위함입니다.
은혜로 강해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영문밖으로, 우리에게 강요하는 세상의 틀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따라갈 때만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예수님께 시선을 두기 위해 평강을 추구합시다. 필사적으로 추구합시다. 우리 모두가 함께 추구합시다. 그래서 우리를 길들여서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쓰려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지고 갈 때, 힘든 일들이 많이 찾아올 것입니다. 시험거리들이 무수히 우리를 방해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입술에 찬양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찬양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릴 수 있는 기쁨의 제사입니다. 찬양을 귀히 여기시고 찬양의 열매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찬양의 열매는 바르게 삶과 나눔이 합쳐질 때,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시는 제사, 예배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한걸음마다 찬양이 새겨지는 역사가 있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앞선 자를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근심이 아닌 기쁨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자가 되어, 나만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모두가 강해지는 우리 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찬송가 211장 다함께 찬양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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