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31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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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론
흔히 사람들에게는 몇가지 가면이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해 상황과 상대에 맞는 대처를 한다는 뜻이다.
진짜 중학교나 고등학교때 배운 것처럼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배우고 공부하는가?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는가?
오히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주위 환경을 위해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공부를 잘하면 어떻게 되나. 내가 만족스럽고 공부 잘하는 나 자신이 뿌듯하고 내가 뭔가 성취한 기분이 드는가?
솔직히 그런 기분이 든다고 해도, 그것은 주위에서 칭찬하고 박수쳐주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수능 만점을 받았는데도, 주위에서 관심이 없다면, 자아가 실현되었다는 느낌은 전혀 받을수가 없다.
그래서 ㅂ잘 보면 게임을 좋아하ㄴ고 잘하는 친구는 좋아하는 그룹으로,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친구들은 운동하는 그룹으로 가게 된다.
하다못해, 동아리나 여러 모임을 찾아서라도 가게 된다. 그래서 그곳에서 인정받고 나누고 싶어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게 공부든, 운동이든, 그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주위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 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를 보고 하기 보다는 주변을 보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다니는 것도, 외모를 가꾸는 것도, 돈을많이 버는 것도,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모두 주변을 향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주변을 살피는 자들과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자들, 그 둘중, 누가 하나님을 만났는지를 보여준다.
본론
삭개오 이야기는 다 알 것이다. 이 이야기를 다 말할 필요는 없다. 지루하기만 하다.
하지만 몇가지만 짚어보자.
삭개오는 세리장이다. 영어로 ruler of tax collector다.
내가 왜 영어로 말했냐면, 누가복음 18장에서 ruler가 한명더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부자 청년이다. 예수님께 와서 구원의 길을 물어봤으나, 재산을 포기하라는 말에 구원을 포기해버린 바로 그 청년이다. 그 청년을 눅18장에서는 ruler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관리로 번역되었다.
삭개오와 부자관리 둘다 룰러다. 둘다 부자다. 하지만 사회적인 위치는 전혀 다르다. 부자청년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명성있는 자다. 부와 권력 명예, 모두다 얻은 자다.
그러나 똑같이 룰러이고, 부자인 삭개오는 전혀 다르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볼린다. 세리장을 다른 말로 바꾸면 뭔지 아는가? 민족반역자다.
왜냐면 세금을 거둔다는 것은 로마에 충성한다는 뜻이다. 세리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관청에 스스로 신청을 해야한다. 그 과정은 경매와 비슷하다. 자신이 많은 세금을 거둘수 있고, 그 능력을 증명해야 세리로 뽑힌다. 경쟁을 한다면, 그중에서 가장 많은세금을 거두는 자가 뽑힌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상황이 변하고 사람과 마찰이 생기거나 하면 참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마치 결혼을 한 부부가 그렇다.
삭개오는 그런 세리들을 다스리는 자다. 한마디로 가장 많은 세금을 거두는 위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로마에 정복당한상태였기에, 삭개오의 상황은 일제앞잡이 중에서 대장앞잡이다.
지금 우리로 따지면 우리가 이렇게 불매운동을 하고 있는데, 더욱 일본 제품을 사고 회사에 가서 사원들에게 일본제품을 사지 않으면 패널티를 주고, 일부러 일본관광을 잡아서 사원들을 일본으로 가게하는 자다.
그래서 민족 반역자라는 소리다.
똑같은 부자이며 룰러이지만, 한명은 민족의 애국자이며, 한명은 민족반역자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리고 애국자는 예수님을 떠났다. 그는 길을 가더 예수님을 불러 세우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가 예수님께 찾아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물론 마가복음을 보면 그는 예수님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그가 무릎꿇은 것을 본 자신의 아랫사람은 아무도 없다.
의처증, 의부증.
그는 철저히 높은 자였다. 부도, 명예도, 아무것도 포기하지 못하는 자였다.
반역자는 예수님께 다가왔다. 사람들이 그를 밀쳐 예수님을 못만나게 하자, 나이가 들어 늙은 몸으로 나무에 올라갔다(물론 그 나무는 오르기 쉬웠다). 분명 그의 아랫사람도 보았을테지만,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께 갔을 때, 그는 그의 부를 기꺼이 포기하였다.
왜냐면 낮은 나, 비천한 나를 받아주실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소위 말해 밑바닥을 보이는 상황이 생긴다. 너무 피곤하고ㅗ 지쳐서 그럴수도 있고, 긴장을 풀고 편안한 상황이라 그럴수도 있다ㅏ.
이것만이 아니다. 누가복음 낮은 자와 높은 자의 비교로 가득차있다. 낮은 과부, 어린아이, 세리, 맹인들은 예수님께 기꺼이 나아온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구원을 너무나 기뻐하고 어쩔줄 몰라한다. 높은 자들, 바리새인, 부자, 서기관, 제사장들은 결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베푸는 구원은 좋게 말해 선택의 문제이며, 만약 많은 비용이 들거나, 내 위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버렸다.
결론
처음했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우리는 왜 꿈을 꾸는가. 왜 계속 비전을 가지려고 하는가. 그래서 그 비전을 따라 최선을 다해 달려가려고 하는가. 높아지기 위해서다. 주위의 환경보다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다. 그 결과 나를 신봉하고 선망하고 따르는 것들이 가득찬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없다. 나는 철저히 외부의 것으로 만족을 얻는 자다. 돼지고기, 소고기를 먹었으면, 그걸 소화시켜 내 살을 만들어야 하는데, 반대로 돼지살, 소살을 내게 붙여놓고 이게 내살이다.라고 하는 하고 있다.
부모자식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낮아지자. 내가 부족함을 알자. 내가 세상의 것으로 채워도, 그게 본질적으로 내 것이 될수 없음을 인정하다. 왜? 그리스도 예수의 살과 피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지만, 이 세상 것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밑바닥, 이기적인 마음을 보이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나.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우리가 아무리 잘해왔더라도, 그거 한방에 끝나버린다.
상황이 바뀌면 날아갈 것이다. 조금만 인식이 바뀌어도 없어질 것이다. 전쟁이라도 나면 내 재산은 모조리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말그대로 돼지살 소살을 붙여놓고 내 살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공부, 용돈
그러니 낮아지자. 내 부족함을 인정하자. 주변이 아무리 풍족해도, 그래서 내가 정말 풍족한 삶을 사는 것같아도,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서 후 하고 부시면 날아갈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그래서 우리는 더욱 가면을 쓰고, 우리의 밑바닥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
회사나 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낮은 곳으로 , 낮은 마음으로, 낮은 자리로 언제나 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그런데, 오늘, 자신들의 밑바닥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제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한결같은, 오히려 더 사랑으로 다가가는 예수님이 있다. 살펴보자.
이렇듯,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있다.
이렇게 믿음이 중요하다면, 우리가 믿음이 깊어지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바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인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다. 한번 살펴보자.
본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근심하지 마라,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왜냐면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신다는 말을 듣고 불안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뉘앙스로 보아하니 절대 좋은 곳으로 간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제자들 모두가 흩어질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지금껏 고생하며 따라왔다. 먹을 양식이 없어 지나가다가 보이는 밀밭에 들어가서 밀이삭을 잘라 먹어야 할 지경이다. 말 그대로 허기만 겨우 면하는 식이다. 예루살렘에 들어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익지 않은 열매를 찾아 길을 벗어날 때도 제자들이 말리지 않는 것을 생각해보면, 예수님께도,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배를 채우는 것이 익숙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했다. 왜냐면 그들 앞에 빛나는 길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가기만 하면, 그곳에 도착하면 예수님께서 뭔가를 하실 것이다라는 바람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번에 보았듯이 두 제자가 자신들이 무슨 소리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 제자들에게 희망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었다. 마치 다윗을 따르던 신하들이, 빨리 다윗이 왕좌에 오르기를 바랬던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고 믿고 기대하던 제자들에게 찬물을 끼얹으신 본문이 13장이다.
제자들이 마음에 근심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근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들을 위해서 근심하고 있다. 첫째로 가신다는 말속에 혹시 우리들은 버리고 가는 것아냐?라는 의문이 있는 것이다.
특히 모든 제자들이 흩어진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생각하지만,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이 생각을 했을 거 같은가? 그것도 지금 잔치를 벌이고 있는 집도 예수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구해진 것인데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아닌 내입장만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 바로 제자들의 밑바닥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의 밑바닥을 보면 돌변한다. 아, 저 사람 좋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아니네. 저것밖에 안되는 사람이네. 라고 판단한다. 그후 그 사람과 거리를 둔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의 밑바닥을 보고 있다. 3년동안 예수님을 따랐지만, 결국 자기 영화를 위해서였고, 지금은 예수님이 혹시 자신들을 버리고 딴 놈들과 이 세상 권력을 잡을지 불안해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께서 어떤 뜻으로 이 말씀을 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당연히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뿔뿔히 흩어지고 부인하는 것이다.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떤가.
1절에서 4절의 말씀이다.
쉽게 말해 이런 말이다.
걱정마, 너희 하나님 믿지? 나도 믿어. 내가 너희를 버리고 어디를 가겠어? 내가 지금 가는 것도 너희를 위해서 가는 거야. 내 아버지집, 사람은 갈수도 누릴수도 없는 그 아름다운 곳에 너희의 자리를 마련하러 가는거야. 나만 가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 자리 찜해놓고 다시 와서 너희도 데리고 갈거야. 내가 어디로 갈지 너희도 알고있어(자연스레 알게 될거야).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 소위 밑바닥을 드러낸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 길이 십자가라는 것도 모르고 자신들이 그 십자가를 질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다는 사실도 모르고 끝까지 우리는 모르니 우리도 데러가 달라고 말하는 도마의 말에도 부드럽게 위로하신다.
끝까지 눈으로 보여달라고 8절에서 제자들이 말하자, 뭐라고 하시나.
나는 이것을 하지만 너희는 나보다 더 큰 것을 할 거야. 왜냐면 하늘 아버지가 너희를 도우실 거니까 라고 12절에 말씀하신다.
더욱이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줄 것이라고 14절에 말씀하신다.
보았듯이 제자들은 시종일관 혹시 자기가 한 고생이 헛수고로 돌아갈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들은 정말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사랑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종일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같은 뜻의 말을 다른 말로 바꿔서 다시 위로하시고, 다시 힘주시고, 다시 용기내라 하신다.
결론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기적인 제자들, 밑바닥을 드러낸 제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위로하시고 힘주심을 보여주신다.
이 예수님을 알아가자. 우리가 아무리 어처구니 없는 것을 요구해도 받아주신다. 우리가 밑바닥을 드러내고 이기적으로 해도, 우리를 안아주신다.
사람은 이 모습을 보고 치를 떨어도,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사랑하신다. 안으신다.
이 예수님을 경험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기도로, 예배로, 헌신으로, 삶으로 우리 예수님을 알아가지 않겠는가.
지금은 이기적인 제자들이 후에 어떻게 변화되고 쓰이고 영광받았는지 생각하며, 우리역시, 제자가 아닌 사도가 되는, 빛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찬양
다함께 기도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찬양드리며 헌금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천천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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