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푯대를 향한 경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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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은 우리의 신앙의 끝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여정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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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어제 본문의 말씀을 통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육체를 신뢰하는 율법주의 자들에 대하여 경계하며,
그리스도를 얻고자 다른 모든 것들은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를 강조하였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에 이어 반도덕주의자들에 대해 새로운 경계와 권고를 주는 말씀이다.
이에 앞서 그들에게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정진하는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당시에,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더 이상 어떤 도덕적인 노력도 필요 없다고 한 반도덕주의자들이 있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더 이 상 어떤 도덕적인 노력도 필요 없다고 한 반도덕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의 전제로 주어진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 이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나 새 생 명을 얻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생명의 본체는 하늘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비로소 나타나게 됩니 다(골 3:3 ,4). 그러한 의미에서 성도들의 현재의 삶은 목표에 이른 상태가 아니라 도 리어 목표를 향해 영적인 경주를 하는 과정 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함을 향해 신앙의 정 진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나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생명의 본체는 하늘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골 3:3 ,4).
그러한 의미에서 성도들의 현재의 삶은 목표에 이른 상태가 아니라 도리어 목표를 향해 영적인 경주를 하는 과정인 것이다.
저는 수능이 끝나고 대학교에 입학한 다음에 이제 드디어 해방이다. 자유다. 수능이라는 올가미에서 벗어났구나 했는데, 그게 시작이더라구요.
토플 점수를 받고, 대학원 입학 허가를 받은 다음에, 이제 영어 끝이 아니라, 진짜는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매주, 하루하루 레포트를 쓰면서 그때가 진짜 영어를 하는 과정이었다.
성도의 삶, 그 믿음의 여정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요 구세주로 믿고, 끝! 이 아니라, 그 때부터 진짜가 시작되는 것이다.
매일의 삶 가운데 수많은 유혹과 어려움 가운데, 그 믿음의 고백이 진실된 고백임을 증명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본론

복음 안에서의 전진 (12-16)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예수님을 믿는 즉시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영적으로 온전한 성숙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 교회에 대해, 이러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지만,
예수를 믿는 즉시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성숙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요 교만이다.
바울은 분명히 이야기하기를,
10 , 11절에서 말한 그 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과 부활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얻었다 함도 아니요’ 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본받는 것 을 아직 얻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또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는 말은 영생 부활에 이르는 것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말입 니다.
즉 바울의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 다는 말인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이라는 말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 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났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는 그곳에서 부활하신 그리스 도와의 만남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회심은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열망하는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 서는 믿음의 경주 즉 영적 성장을 위해 계속 달음질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쫓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의 길에서 돌이켜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의 회심은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열망하는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 서는 믿음의 경주 즉 영적 성장을 위해 계속 달음질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아가노라’ 는 말은
여기서 ‘달려가노라, 쫓아가노라’ 는 말은 ‘추적하다’ 라는 의미로 사냥이나 달리기 경주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추적하다’ 라는 의미로 사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육상 경기가 빈번하게 개최되었기 때문에,
육상 경기자들이 골인 지점을 향해 전력 질주하여 달리는 모습이 익숙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하여 그렇게 전력 질주를 하여야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또한 경건하고 헌신적인 삶으로 많은 성도들에게 본이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바울 자신은 여전히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말한다.
2002년에 한국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었을 때에,
개최국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히딩크라는 훌륭한 감독을 모셔서 훈련을 하고, 마침내 월드컵 경기를 하게 되었는데,
16강에 오르고 나서, 우리는 다 이루었다. 목표를 이루었다. 라고 자랑했지만,
히딩크 감독이 인터뷰 때 뭐라고 하냐면,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 라고 한다.
바울에게,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회심은 우리의 신앙의 끝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여정의 시작인 것이다.
결혼이 사랑의 끝이 아니라, 결혼을 통해 매일 매일 사랑하는 사람과 살며 정말 그 사랑이 진실된지를 증명해나가는 것처럼,
예수님의 알았으니까 끝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 깊이 교제하며, 그 분을 더 닮아가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며, 예수님 다시 오실 날까지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이루었다. 나는 구원받았다. 끝이 아니라,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매일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상을 받기까지
부지런히 하나님을 좇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의 여정, 믿음의 여정 가운데, 앞으로 전진해가고 있으세요?
앞으로
그 푯대를 향하여 매일 매일 조금씩이라도, 주님 닮아가기 위해 주님 좇아가고 있으세요?
아니면, “나는 이미 다 이루었어” 라고 생각하며, 주저 앉아 있으세요?
또는 “과거에 나 그렇게 열심히 했었어” 라고 뒤에 있는 지난 일에 안주하고 있으세요?
소원하기는, 오늘 이 말씀의 바울처럼, 그의 신앙의 자세처럼,
푯대를 행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오늘도 예수를 향해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이 말씀의 바울처럼, 푯대를 행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본절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 우고 닮아가고자 하는 바울의 진지한 노력을 보게 됩니다.
냥이나 달리기 경주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절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 우고 닮아가고자 하는 바울의 진지한 노력을 보게 됩니다.

하늘 시민권자의 삶 (17-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여기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 본 받은 모습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 본 받은 모습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이 본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들으면 상당히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이 본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들으면 상당히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바울이 교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바울은 자신이 완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아직도 얻지 못하고, 온전히 이루지 못한 부족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미완성과 미성숙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삶, 그 삶을 본받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삶을 본받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신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몇가지를 이야기합니다.

1. 바울은 자신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한다.

사도바울은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자신이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이 땅에 살아가고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구원받은 자임을 늘 명심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도바울이 이 땅에서 시원치 않은 신분과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지상에서 최고의 권리와 유익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 시민권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로서 이 땅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권세있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져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이 궁극적으로 따르고 살아가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법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이 세상의 법, 로마인의 법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늘에 속한 자의 자존감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빌립보교회에는 사도 바울의 모범을 따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을 향하여서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그들은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땅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집착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법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삶이 아니라 자신들이 주인이 되어서 살아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18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땅의 일에 얽매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시민권은 사도바울과 같이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법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줄로 믿습니다

2. 또한 사도바울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을 늘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19절에 땅의 일을 생각하고 좇아가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멸망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멋지고 인기 있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없는 삶은 결국은 멸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멸망 받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죄로 인해 멸망하는 것을 막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교회에 멸망으로 인생을 마칠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섬기지 말아야 할 엉뚱한 신을 섬기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저희들이 섬기는 신이 그들의 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위장 말입니다.
이는 육체의 하자는 데로 하는 육체의 욕망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슬픈 일지만 자신의 배를 신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자신의 몸을 위하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몸을 신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국을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은 1800년대의 사람으로서, 당시의 사회상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편이 낫고, 만족해하는 바보가 되기보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
당시 자본주의가 물질적 만족과 쾌락에만 집착하여서 정신적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며 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물질의 풍요와 육신적 쾌락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돼지와 같이 배부른 삶을 보장해 준다고 해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배부른 돼지와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보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기뻐하고 만족한다고 해서 바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섬기는 것은, 그 분이 우리에게 이 땅에서 배부름을 보장해 주시고 풍요케 해 주시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는 썩어질 육체를 위해서 살아가다가 멸망 당할 우리의 운명을, 천국의 영생에 참여할 구원의 운명으로 바꾸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배부르고 부요하다가 죽을 운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감으로 영생을 얻을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 없이 배부른 자가 인생의 성공자가 아니요 따라갈 모범이 아닙니다. 도리어 멸망자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이 땅이 끝이 아니라, 영생을 소망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의 마지막, 아니 영원한 생명으로의 첫걸음을 늘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3. 그리고 사도바울은 진정한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땅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을 자랑스럽고 영광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알아주는 것에 대해서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도리어 그러한 것들이 부끄러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땅에서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맡겨주신 일을 행하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사도바울은 21절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땅에 속한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영광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사도바울과 마찬가지로 ‘낮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Our lowly bodies, ‘낮은 몸’이라 함은 죄짓기 쉬운 욕망가운데 있고, 고난 받고 죽음과 질병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미천한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낮은 몸이 영광된 몸의 형체로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가운데서 영광의 몸의 형체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영광된 몸으로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된 몸으로 변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몸은 낮은 몸이라고 했습니다. 이 낮은 몸은 이 땅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꾸미고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낮은 몸을 가지고 나의 만족과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좀 더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인내한다고 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영광된 존재로 변화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고난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많더라도 실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낮은 몸을 가지고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되면 그분은 우리의 몸을 그의 몸과 같이 영광된 몸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진정한 영광의 몸으로 바꾸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결론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의 모범을 통해
ㅇㅗㄴ
우리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이 땅에 속한 사람인지, 하늘에 속한 사람인지,
우리의 삶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며, 늘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우리의 낮은 몸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진정한 영광은 이 땅에서 낮은 몸을 아무리 치장하고 높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우리의 낮은 몸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무엇보다도 하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만나기를 기대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늘 어떠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할까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아직과 이미 사이 | 박노해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여러분은, 어떠한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를 이 땅에서 해 나가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모범으로 따르라고 여러분의 삶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오늘 하루 더 주님 깊이 알아가고, 주님 닮아가기를, 주님께 달려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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