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30.저녁예배순서

저녁예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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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끝 슬리퍼
성가대쪽 좌석에서 기도
종치기
다함께 묵상기도 드림으로 주일저녁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찬송가 86장 찬양드리겠습니다.
임성빈 시무집사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히브리서 9장 23절에서 28절입니다. 신약 362페이지입니다.교독하겠습니다.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호산나찬양대 찬양하겠습니다.
설교
서론
지난 시간 보았듯이 그 당시 성도들에게 새언약은 낯설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 어렵다는 말은 난해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언약을 믿고 따라 살기가 너무나 힘들다는 의미입니다. 왜냐면 그들이 믿음으로서 받는 핍박은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옛방식으로 돌아가고자 하는유혹속에서 살았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런 유혹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15절까지 성전의 불완전함과 하늘 성전의 완전함을 대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시며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심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이미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가졌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영원한 기업이 우리의 무엇인가로 된 것이 아님을 알고 주님앞에 겸손함으로, 양심적으로 생각하며 나아가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당시의 박해와 죽음은 매우 커다란 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위로와 우리를 향한 권면을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중요한 강조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입니다. 대제사장에 대한 내용이 2장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설교제목 중에도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 큰 대제사장이라는 설교제목도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구원의 근원이지만, 이 역시도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의 근원되시기 위해 기꺼이 대제사장직에 오르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나눠보겠습니다.
본론
16절과 17절은 갑자기 유언에 대해 언급합니다. 15절에서 새 언약을 말하다가 유언이 나온 이유는 헬라어로 언약이라는 단어가 유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로도 언약이라는 단어는 자르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 역시 서로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약속을 뜻합니다.
본론
16절에서 유언과 죽음을 말하는 것은 15절에서 말한 대속의 죽음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첫 언약, 시내산 언약, 다른 말로 백성의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19절부터 21절까지는 출애굽기 24장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24장까지 모든 언약을 다 세운 후에 한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모세가 피를 언약이 적힌 두루마리와 백성들에게 뿌리고, 그것으로 모라자 성전에서 사용되는 모든 기구들에 뿌렸느냐. 그 이유는 언약은 죽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말하기를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죄를 사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대제사장이라는 직위가 어떤 것인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자신을 제물로 드렸다는 것은 앞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왜 다시 이 때, 이 말을 반복하고 있을까요. 어찌보면 이 말은 앞구절을 좀더 풀어쓴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 말씀을 단순히 생각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언약이 제의적인 측면, 쉽게 말해 유대인의 제사와 직접 비교해도 훨씬 탁월하다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당시 수신자들의 상황역시 고려해야 합니다.
그당시 성도들에게 죽음은 멀리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당장 내가 죽을수도 있다라고 말하면, 진심으로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까. 그럴수도 있겠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을거야가 우리의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왜냐면 그당시 성도들에게 죽음은 멀리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장 내가 죽을수도 있다라고 말하면, 진심으로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까. 그럴수도 있겠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을거야가 우리의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대제사장은 1절에 설명하는 것처럼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백성들중에서 함께 있는 자입니다. 자신도 백성들처럼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먼저 속죄제를 드려야 대속죄일에 온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수 있는 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했습니다. 로마에서 일어난 박해가 언제 자신들이 사는 지역까지 뻗어올지 모릅니다. 특히 로마에서 사는 성도들은 말그대로 하루하루가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대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속성중 하나가 드러납니다. 대제사장은 백성과 함께 있는 자여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백성과 공감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공감이라는 말은 2절에 용납이라고 번역된 단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들은 사자밥이 되었고, 도로의 가로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조롱을 담에서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바로 죽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몇시간에서 며칠정도는 살아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까지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들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배하고 히브리서의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들의 형제 자매들은 십자가에서 고통중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밤에는 끔찍하게 불타죽고 있습니다. 낮에는 사자밥이 되어 뼈도 제대로 남지 못하고 죽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살며,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 성전을 관리하며,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까지 들어갈 수 있는 대제사장이지만, 스스로가 불완전하며, 죄악투성임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지성소에서 죽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연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평범한 삶을 사는 자들의 어려움을 알고 그들의 고민을 알고 들어주며 함께 나눌수 있는 자가 바로 대제사장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등, 모든 제사에서 중보의 역할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 중보, 중재자란 양쪽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누명을 쓰고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동시에 그냥 말한마디면 그런 처참한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성도들을 보며 광신적이며, 미련한 자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도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6절부터 유언,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새언약의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바로 죽음을 통해서 였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새언약의 우월성이 아니라 우리의 구주께서도 같은 고난을 겪으셨음을 상기시킵니다. 까지 말씀한 그 내용을 다시한번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대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는 모세가 아니라 아론입니다. 모세는 선지자라고는 칭하지만 대제사장은 아닙니다. 왜 아론이 대제사장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백성과 함께 있던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그 이후에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40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간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전혀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실제적으로 접해보지 못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아론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세가 올때까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한 자였습니다. 누구보다 이스라엘 백성의 어려움과 아픔을 잘 아는 자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떠난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새로운 신을 요구하자 우상을 만드는 죄악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정하신 방법이 아니라 구약에서 이미 이렇게 하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 근거로서 출애굽기 24장에서 언약이 체결된 후에 모세가 뿌린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루마리와 온백성과 성전의 모든 기구들에 뿌려졌습니다.
저 옛약속, 율법조차 피흘림이 있어야 정결함, 죄사함이 있지 않느냐. 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누구보다 이스라엘백성들을 이해하고 그 백성들의 마음과 감정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모세가 아닌 아론이 대제사장인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며칠 전 함께 예배드리던 형제자매중 몇사람이 지금 한사람은 십자가에 박혀있고, 한사람은 사자밥이 되어 죽었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는 도마의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점점 예배에서 멀어지고, 구원의 길보다는 당장 내 목숨을 건질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대제사장은 이런 공감의 능력이 있는 자였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들은 공감은커녕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힘쓴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만들고 로마의 화폐가 아닌 유대의 화폐로 받았습니다. 중간에 환전상을 만들고 환전상으로부터 돈을 받았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는 유대인들은 이중으로 대제사장들에게 자신의 예물을 말그대로 강탈당해야 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예물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대제사장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기록을 보면, 제사장들중에 굶어죽은 자가 종종 나왔다고 합니다. 왜냐면 원래 제사를 집례하게 되면 제물중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받아야 합니다.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그에 영합한 권력을 잡은 자들은 그 제사장이 제사의 몫으로 받은 제물들을 뺏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몫조차 뺏긴 제사장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형제 자매의 시신을 그대로 놔둬야 하겠습니까.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러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장례를 치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나도 그리스도를 믿으니 죽이시오라는 뜻입니다.
결국 잡히면 온갖 조롱을 당하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바로 언약을 위해서다. 우리가 섬겼던 옛언약, 저 지상 성전도 피흘림이 있지 않느냐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다 모형에 불과하다. 모형이 이렇게 많은 양과 소의 피를 흘려야 한다면, 하늘의 참 성전은 어떤 피가 흘려야 할 것인가.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서민의 삶은커녕 같은 제사장의 삶조차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원래 대제사장은 사독계열, 다른 말로 아론의 자손들만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두개인이라는 명칭 자체가 사독계열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독계열 제사장의 계보는 중간기에 완전히 끊겨버립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그당시 왕의 입맛에 따라 바뀌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대제사장들은 매년 다른 피를 드려야 했습니다. 수많은 제물들로 수많은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의 제사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26절 후반절에 말씀하듯이 단번의 제사로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단 한번의 제사, 단 한번의 죽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없이 했습니다. 새언약의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중보하시며, 하늘장막에서 섬기는 직분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대제사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공감의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정통성을 지켜주던 혈통조차 끊겼습니다. 그렇게 가장 암울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죽음, 누명을 쓰고, 광신적이라 비난당하며,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미련한 자라고 조롱받으며 맞이하는, 이 죽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죽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으로 새언약을 성취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뜻하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론도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을 잃어버렸고,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렸던 백성들을 아버지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가장 고귀한 직분을 맡으셨습니다.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래서 그는 아론보다 더욱 잘 공감하시는 분이십니다. 7절에 나온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습니다. 이는 겟세마네의 기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와 같이 연약하지도 않으신데, 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당하시고, 우리와 같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차마 하지 못하는 통곡과 눈물을 대신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번,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대는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보며 어떤 결심을 하실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죽음조차 그리스도의 증거로 삼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8절 후반절에 지금까지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림하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때문에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우리를 위해 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들으심을 얻으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의 필요가 전혀 없는 아들이심에도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이라는 구원을 받으셨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능력이 있는 성부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셨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고난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이 고난, 끔찍한 죽음들이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죽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에 지고 있음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보았듯이 그 당시 성도들에게 새언약은 낯설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 어렵다는 말은 난해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언약을 믿고 따라 살기가 너무나 힘들다는 의미입니다. 왜냐면 그들이 믿음으로서 받는 핍박은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렇기에 그들은 쉽게 옛방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런 유혹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15절까지 성전의 불완전함과 하늘 성전의 완전함을 대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시며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심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이미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가졌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영원한 기업이 우리의 무엇인가로 된 것이 아님을 알고 주님앞에 겸손함으로, 양심적으로 생각하며 나아가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당시의 박해와 죽음은 매우 커다란 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위로와 우리를 향한 권면을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16절과 17절은 갑자기 유언에 대해 언급합니다. 15절에서 새 언약을 말하다가 유언이 나온 이유는 헬라어로 언약이라는 단어가 유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로도 언약이라는 단어는 자르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 역시 서로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약속을 뜻합니다.
16절에서 유언과 죽음을 말하는 것은 15절에서 말한 대속의 죽음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첫 언약, 시내산 언약, 다른 말로 백성의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19절부터 21절까지는 출애굽기 24장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24장까지 모든 언약을 다 세운 후에 한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모세가 피를 언약이 적힌 두루마리와 백성들에게 뿌리고, 그것으로 모라자 성전에서 사용되는 모든 기구들에 뿌렸느냐. 그 이유는 언약은 죽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말하기를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죄를 사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자신을 제물로 드렸다는 것은 앞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왜 다시 이 때, 이 말을 반복하고 있을까요. 어찌보면 이 말은 앞구절을 좀더 풀어쓴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왜냐면 그당시 성도들에게 죽음은 멀리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장 내가 죽을수도 있다라고 말하면, 진심으로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까. 그럴수도 있겠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을거야가 우리의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했습니다. 로마에서 일어난 박해가 언제 자신들이 사는 지역까지 뻗어올지 모릅니다. 특히 로마에서 사는 성도들은 말그대로 하루하루가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들은 사자밥이 되었고, 도로의 가로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조롱을 담에서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바로 죽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몇시간에서 며칠정도는 살아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까지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들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배하고 히브리서의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들의 형제 자매들은 십자가에서 고통중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밤에는 끔찍하게 불타죽고 있습니다. 낮에는 사자밥이 되어 뼈도 제대로 남지 못하고 죽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누명을 쓰고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동시에 그냥 말한마디면 그런 처참한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성도들을 보며 광신적이며, 미련한 자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도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6절부터 유언,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새언약의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바로 죽음을 통해서 였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정하신 방법이 아니라 구약에서 이미 이렇게 하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 근거로서 출애굽기 24장에서 언약이 체결된 후에 모세가 뿌린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루마리와 온백성과 성전의 모든 기구들에 뿌려졌습니다.
저 옛약속, 율법조차 피흘림이 있어야 정결함, 죄사함이 있지 않느냐. 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며칠 전 함께 예배드리던 형제자매중 몇사람이 지금 한사람은 십자가에 박혀있고, 한사람은 사자밥이 되어 죽었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는 도마의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점점 예배에서 멀어지고, 구원의 길보다는 당장 내 목숨을 건질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형제 자매의 시신을 그대로 놔둬야 하겠습니까.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러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장례를 치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나도 그리스도를 믿으니 죽이시오라는 뜻입니다.
결국 잡히면 온갖 조롱을 당하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바로 언약을 위해서다. 우리가 섬겼던 옛언약, 저 지상 성전도 피흘림이 있지 않느냐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다 모형에 불과하다. 모형이 이렇게 많은 양과 소의 피를 흘려야 한다면, 하늘의 참 성전은 어떤 피가 흘려야 할 것인가.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0:23–25 NKRV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대제사장들은 매년 다른 피를 드려야 했습니다. 수많은 제물들로 수많은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의 제사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26절 후반절에 말씀하듯이 단번의 제사로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단 한번의 제사, 단 한번의 죽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없이 했습니다. 새언약의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중보하시며, 하늘장막에서 섬기는 직분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죽음, 누명을 쓰고, 광신적이라 비난당하며,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미련한 자라고 조롱받으며 맞이하는, 이 죽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죽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으로 새언약을 성취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뜻하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는 한번,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대는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보며 어떤 결심을 하실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죽음조차 그리스도의 증거로 삼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8절 후반절에 지금까지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림하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때문에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우리를 위해 임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이 고난, 끔찍한 죽음들이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죽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에 지고 있음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세상사람들은 우리가 광신적이라 조롱할 수있습니다. 뭐하러 그렇게 헌금하고, 뭐하러 니시간 내어서 헌신하고 봉사하냐. 어차피 인생 즐기는거 아니냐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를 조롱하는 그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요즘 비혼족, 딩크족, 욜로족등 수많은 말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결국은 나혼자 잘먹고 즐기고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아예 결혼하지 말고 즐기고 살던지, 결혼하더라도 애는 낳지 말고 서로 수입합쳐서 그걸로 해외여행도 다니며 더 즐겁게 살자. 한번 사는 인생 즐기며 살자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내에서 믿는 자들도 그런 생각에 동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자가 아니라 더 즐겁게 내 생각과 기준에 합당하게 살자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죽을 것이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그 단번의 죽으심을 통해 새언약의 대제사장이 되셨다. 이 히브리서를 처음 읽은 자들은 그렇게 끔찍하게, 또한 온갖 조롱속에서 죽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그 결과 30년 후, 노예나 자유민이 아니라 황제의 사촌인 클레맨스가 순교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셔서 황제의 사촌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입니다.
단 한번 사는 인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의 제사로서 자신을 드리신 것처럼, 우리역시 단 한번의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실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시겠습니까.
저가 말했다시피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준에서 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좌편에 있는 예수로 만드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처럼 죽음으로 오히려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자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히브리서의 첫 수신자들처럼 단 한번뿐인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이 어두워져가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 그대로 행하십니다. 이것은 6절과 10절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6절에서는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말합니다. 10절에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말합니다.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제사장과 대제사장입니다. 기자의 실수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사람들은 우리가 광신적이라 조롱할 수있습니다. 뭐하러 그렇게 헌금하고, 뭐하러 니시간 내어서 헌신하고 봉사하냐. 어차피 인생 즐기는거 아니냐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를 조롱하는 그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요즘 비혼족, 딩크족, 욜로족등 수많은 말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결국은 나혼자 잘먹고 즐기고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아예 결혼하지 말고 즐기고 살던지, 결혼하더라도 애는 낳지 말고 서로 수입합쳐서 그걸로 해외여행도 다니며 더 즐겁게 살자. 한번 사는 인생 즐기며 살자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제사를 드린 후, 자신의 몫이 없으면 굶어죽을 정도로 힘든 제사장의 삶과, 그 모든 제사장과 백성들의 삶에 완전히 공감하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온전히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그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깊이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서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이며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내에서 믿는 자들도 그런 생각에 동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자가 아니라 더 즐겁게 내 생각과 기준에 합당하게 살자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결론
하지만 오늘 말씀은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죽을 것이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그 단번의 죽으심을 통해 새언약의 대제사장이 되셨다. 이 히브리서를 처음 읽은 자들은 그렇게 끔찍하게, 또한 온갖 조롱속에서 죽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그 결과 30년 후, 노예나 자유민이 아니라 황제의 사촌인 클레맨스가 순교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셔서 황제의 사촌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입니다.
단 한번 사는 인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의 제사로서 자신을 드리신 것처럼, 우리역시 단 한번의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실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시겠습니까.
살다보면, 성경말씀과 우리의 삶이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너무나 복된 말씀이지만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살라고 하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우리의 상황과 처지는 알지못하고 단순히 이렇게 해야한다는 교훈으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저가 말했다시피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준에서 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좌편에 있는 예수로 만드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처럼 죽음으로 오히려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자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히브리서의 첫 수신자들처럼 단 한번뿐인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이 어두워져가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시기에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아예 우리 마음을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흔들리면, 성령님의 집에 지진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울면 성령님이 같이 웁니다. 가족중 한 사람이 힘들면 모두가 힘든 것같이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한 가족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칭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에 함께 공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로하고 권면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를 맡기기 원합니다.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우리의 구원의 근원께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분안에서 안식을 얻으며, 우리의 일함이 아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며, 다시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대제사장되신 우리의 구주와 함께 이 좁은 길을 걸어갈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찬송가 246장 다함께 찬양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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