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구원

수요예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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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과 고난의 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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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석

1 이때문에 우리가 들었던 것(듣게 된 것)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떠내려가지 않도록.
듣게 된 것에 집중해야 한다. 어떻게? 한층더! 뭐하려고?
듣고 순종하는 자.
단순히 듣는게 아니다. 프로스는 움직임, 무엇을 향해가서 붙드는 것이다. 말씀에 집중하고 붙들지 않으면 떠내려 간다.
우리는 떠내려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신다.
그 붙드심을 믿고 흐느적거리는게 아니라, 우리역시 집중하고 붙들어야 한다.
고난은 그 붙듬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순간이다.
우리가 얼마나 붙들고 있는가가 나타난다.
2 왜냐면 천사들을 통하여 이야기하신 말씀이 믿을만하여 모든 범죄와 불순종이 정당한 징벌을 받았는데,
조건문 에이
만약에 천사를 통해서 얘기된 말씀 확실하게 되고 모든 빗겨간 것(범과, 완전히 어긴게 아니라 한두개를 어김) 과 불순종(한두개에 불순종, 하지만 중요한 것을 불순종:씻고 밥먹고 학교가라->학교는 안감, 나도 다 믿어, 그런데, 박해하니까, 예수님만 부정하는거지 ->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음)
그들이 받았다.
엔디콘(합당한)
미스아포도시안(미스아포[삸]+도) : 보응
가나안 정탐의 결과로 보응을 받았지만, 40년의 벌을 받고 그 다음날 가자!고 했던 것.
-> 조금 다른 것. 하지만 많이 다른 것.
우리가 이렇게 큰 구원, 아들이 주신 구원을 삐딱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어떻게 보응을 피하겠냐?
3 우리가! 이 엄청난 구원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피할수 있겠는가, 이것은 처음에 그 주를 통하여 말씀되심을 취하였으며 들은 사람들로 우리에게 확인된 것이며(믿을만한과 같은 단어, 동사형)
어떻게 우리가 도망하겠냐. 이렇게나 큰 구원을 우리가 무시한다고 하면
텔리카우테스(이렇게나 큰) : 매우 강조된 표현
멜로는 마음을 두는것 -> 마음을 안씀, 무시함.
이렇게 큰 구원, 그것은 확고하게 된다. 사도들에 의해서
주님에 의해서 얘기된것. 구원이 무언가를 얻어서 확고하게 되었다.
아르케는 어떻게 번역할까.
처음것이 주님을 통해 얘기될 기회를 얻어서 듣는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고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처음에 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시작이 가장 중요하다. 그저 이야기가 아니라 삶으로 행동으로 이야기하셨다.
고난.
4 그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적과 다양한 능력과 그분의 뜻에 따라 성령의 나누어주심으로 증명하였다.
하나님께서 그게 맞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더 확고하게 되었다.
τε καὶ~καὶ : ~뿐만 아니라 ~과 ~도
τε καὶ : ~뿐만 아니라 ~도
표저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들로 하나님께서 함께 증인이 되어 주셨다. 거기에 더해서 성령을 몫(분깃)으로 나누어 주는 것을 통해서, 그분의 원함(바람)을 따라.
구원의 견고함
청중들이 복음을 들었고, 표적, 기사, 능력, 성령의 증거(내주, 충만, 역사)를 경험했다.
6장 : 하늘의 은사를 맡보고 타락한 자는! -> 하나님께서 은혜주실때는 기쁘게 받고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그 근원, 구원이 내게 해를 끼친다면, 회개할 기회를 얻기가 어렵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셨는데, 고난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한다면 어떻게 피할수 있겠냐?
5
ὑπέταξεν 타소 두다. 밑에 두다.
하나님께서 장차 오실 거주지를 천사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6
어디에 누군가 증거하지 않았느냐()
*사람이 누구냐라고 하지 않고 무엇이냐고 했다.
사람이 무엇이냐 왜냐면 당신이 그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사람의 아들이 (무엇입니까) 왜냐면 당신이 그 인자를 돌아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람의 아들
기억하다=돌보다.
7
ἐλαττόω 하찮게 한다.
당신이 그를 얼마간 하찮게 만드셨습니다. 천사보다.
*지금까지 아들은 천사보다 높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못하게 되었다.
영광과 존귀로 당신이 그를 관씌우셨다.
8 모든 것들을 그의 발 밑 그위로
*발 밑에도 층이 있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여기에 나온 인자를 예수님과 연결
조금 하찮게 된 것은 죽음을 맡본 것이다.
시편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해석했다.
예수님의 위대하심, 탁월성, 구원의 크심.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예수의 비하속에, 고난속에 있었다.
우리의 구원도 승승장구가 아니라, 주님과 같은 삶속에 있는 것이다. 그길로 가는 것이 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 반대로 죽음과 같은 담대함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무서워서 가나안으로 못갔다. 결국 무서워서 못간 그길만이 생명의 길이었다.
1장 : 아들이 어떤분인가에 대해 구약인용으로 말함.
2장 : 시편8편, 독특한 해석. 우리에게 가져오고 그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경륜. 물론 시편 8편 자체는 인생에 대한 시편일수 있지만, 주님의 성육신을 보고나니 ㄱ그것이 예수님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설교
서론
우리는 지난 시간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대해 보았습니다. 왜 히브리서 1장에 갑자기 천사가 등장하는지, 그리고 천사와 그리스도를 비교하는지 보았습니다. 그것은 고난에 빠진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인지를 보여주며, 다수로 보이는 세상속에서 핍박받는 소수로 살아가고, 이해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마이너리티인 우리가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의 순간에 모든 천사들과 성도들의 찬송과 함께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 희망이 있지만, 이땅의 고난은 끝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성도들이 그랬으며, 종류는 다르지만, 우리역시 그런 고난속에서 살아갑니다. 이시간, 본문을 살펴보며, 고난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첫째,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복음을 붙잡으라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흘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고 하며 시작합니다. 앞에 나오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라는 것과 원문을 고려해보면 본문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듣게 된 것에 것에 더욱더 집중해야 한다. 왜?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다. 여기서 듣는 것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나오는 유념함으로라는 말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쪽으로 움직이라는 말입니다. 즉, 유념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을 향해서 움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 밀려 떠내려 갈 수 밖에 없다가 1절에서 말하는 뜻입니다.
이 말씀처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든 히브리서의 배경이 되는 시대이든지 세상은 결코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합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휩쓸어서 복음에서 떨어져나가게 하려고 합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주님을 생각하며 금식을 하고 있는줄 압니다. 그러나 그런 금식이 쉽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그만큼 큰 반발에 부딪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성향입니다. 나혼자서 하는 금식에 이런 반발이 있는데, 주님을 따라 사는 것은 얼마나 큰 저항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1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권면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붙들어라! 어떻게? 집중해서 붙들어라 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급류가 세차게 흘러도 반석위에 있으면 결코 급류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위에 서있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왜냐면 이 세상에 휩쓸린 사람들이 가는 곳은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심판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피난처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위한 큰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 구원은 어떤 구원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생명으로 베푸신 구원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천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시지만, 이 구원을 위해 천사들과 같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1장 9절 마지막에 예수님과 천사를 동류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유지하시는 성자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같은 직분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2장 7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천사보다 잠시동안 못하게 되었습니다. 못하게 되었다는 말은 원어로 하찮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하찮게 됨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께서 베푸신 구원이 큰 구원, 직역하자면, 이 엄청난 구원이라 표현됩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하찮게 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데도, 천사들과 같은 직분을 맡으셨습니다. 거기에 모자라 천사보다 잠시동안이지만 하찮게 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시간에 나누었듯이 이 하찮게 되신 한분이 전하신 복음이 이 세계 만방을 구원하십니다. 모든 민족과 방언으로 그분만이 오직 유일하신 한분,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임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이 영광스런 자리에 우리가 서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서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집중해서 꼭 붙잡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얼마나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초대교회에는 수많은 이들이 순교했습니다. 모두들 순교의 자리를 두려워했지만, 동시에 순교라는 것이 하나님께 드릴 가장 영광스런 행동으로 사모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청해서 순교의 자리에 나아간 이도 있었습니다. 그저 무시해도 되지만 자신의 신앙을 밝힌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합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임이 밝혀져 순교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알고 있던 두사람이 그를 변호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자연스레 그 두명 역시 그리스도인임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세사람이 같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순교를 사모하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밝혔지만, 정작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자 두려워하며 믿음에서 떠난 자도 있었습니다.
고난의 순간, 그때가 바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맞는지가 드러납니다.
1절에서 말했듯이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휩쓸어 떠내려가게 하려 합니다. 어떤 때는 좋은 말로 유혹하며, 어떤 때는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을 가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떠내려가게 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 만세 반석위에 서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기름을 예비하는 우리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둘째로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온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어떻게 해서 왔습니까. 그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있었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그저 이야기하지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삶으로 복음이 어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 복음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4절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뿐 아니라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았습니다. 표적이 있었고 기적이 있었고 다양한 능력과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셨고, 그 은사를 나누어주셨습니다. 우리 한명 한명에게 내주하시고 계십니다.
이 복음은 완전한 삼위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삶으로 전해주셨고,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속에서 인도하심으로 증명하시며,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은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권면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온전하기를 원합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2절은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라는 말을 통해 온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범죄함은 우리가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실수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범죄함이란 단어의 뜻은 빗겨간 것입니다. 닿긴 닿았는데 살짝 빗겨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자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씻고 밥차려놓은 것 먹고 다 챙겨서 학교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일어나서 다 했는데 한가지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소한 것 한가지를 어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소한 한가지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일성수도 하고 헌금도 내지만 사소하게 하나씩 빗나가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지만 적당히 바꿀수도 있습니다. 헌신을 한다고 하지만 하면서도 슬슬 뒤로 뺄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범죄함으로 나타납니다. 불순종은 이제 그 결과가 어떻게 됨을 보여줍니다. 이것 역시 한두가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씼었습니다. 밥도 잘 먹었고 다 챙겼습니다. 학교를 안갔습니다. 하나 어기지 않았습니까? 이 5가지중에 한가지만 어겼습니다. 괜찮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본문이 말하는 불순종입니다. 사소한 것을 하나씩 하나씩 빗겨가고 어긋나게 하다보면, 나중에는 가장 중요한 하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십계명도 다지키고 말씀도 열심히 읽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정작 중요한 선택에 순간에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내 이득과 내 안위를 위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함을 원하십니다. 결코 완전함이 아닙니다. 일찍 일어나지 못하지만 일어나 허겁지겁 챙기고 대충 씻고, 밥 입에 가득 물고 나가더라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을 붙잡는 온전함입니다. 이 온전함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결론
우리는 어디서든 승승장구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때, 거뜬히 완승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삶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길로 가면 손해보는 것같고, 심지어 망하는 것같지만,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담대함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정탐꾼을 보낸후 두려워했습니다. 무서워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서워서 못간 그 길이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구주께서 열어주신 큰 구원의 길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열어주신 큰 구원의 길을 온전함으로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때론 무섭기까지하지만 주님을 의지함으로 그 길로 담대히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고난이 있었기에 십자가가 있었고, 십자가가 있었기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온전히 주님을 붙잡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는 큰 은혜를 누리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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