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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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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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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석

Πολυμερῶς καὶ πολυτρόπως πάλαι ὁ θεὸς λαλήσας τοῖς πατράσιν ἐν τοῖς προφήταις
많은 부분과 많은 방법으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그 조상들에게 말씀하신(에오능분사단주남) 그 하나님께서
è 많은 부분과 많은 방법으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그 조상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더니
2 ἐπ᾽ ἐσχάτου τῶν ἡμερῶν τούτων
ἐλάλησεν ἡμῖν ἐν υἱῷ,
ὃν ἔθηκεν κληρονόμον πάντων, δι᾽ οὗ καὶ ἐποίησεν τοὺς αἰῶνας·
그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에오능직3단), 그를 모든 것의 상속자로 세우셨고(에오능직3단), 그를 통해 또한 그 세계를 만드셨으며(에오능직3단)
è 이 날들의 끝에
è 그분이 아들로 우리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è 그아들을 그분이 세우셨다 모든 것들의 상속자[클레로(제비뽑다)노모스(주다)]
è 그리고 그 아들을 통해서[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을 통해서] 세대를 만드셨다.
è 접속사가 생략되었다. – 문장강조.
3 ὃς ὢν ἀπαύγασμα τῆς δόξης καὶ χαρακτὴρ τῆς ὑποστάσεως αὐτοῦ,
φέρων τε τὰ πάντα τῷ ῥήματι τῆς δυνάμεως αὐτοῦ,
καθαρισμὸν τῶν ἁμαρτιῶν ποιησάμενος ἐκάθισεν ἐν δεξιᾷ τῆς μεγαλωσύνης ἐν ὑψηλοῖς, ( GNT)
그는 그 영광의 광채이며(현능분단주남) 그의 그 본질의 형상[대표][어떤 것을 도드라지게 함](이시며), 또한 그의 그 능력[전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유지하시며(현능분단주남), 그 죄를 정결케하는 일을 하셨으며(에오중분단주남) 높이 계신 존귀한 분[전능한 분]의 우편에 앉으셨으며(에오능직3단),
- 본체의 형상 ->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두드러지게 나타내시는 분이다.
- 2절과 3절에서 예수님이 대상이 되었다가 예수님 과정이 되었다가 예수님이 주체가 되신다.
n 2절의 혼과 후, 3절의 호스
- 전능하신 분의 우편에 앉게 되셨다.
-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승귀를 결코 예수님께서 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 하나님께서 앉히신 것이다.
- 1,2 절의 핵심동사는 이야기하시다이며 3절의 핵심동사는 앉다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이야기하시고 예수님은 앉으신다.
- 박해중의 성도들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는데, 그분이 어디에 앉아있는지 보는 것이다.
- 아우게(태양빛) -> 앞아우게(태양빛이 환하게 나옴)
- 독사(생각하다) : 많은 사람이 관심있게 보는 것.
n 히브리어 영광 : 무거움
n 헬라어 영광 : 관심을 받아야함
n 우리말의 영광 : 빛나야함, 우리말로는 앞아우게스마가 영광이다.
- 영광의 광채-> 주목할만한 것중에 눈에 보이는 것.
- 영광의 광채와 본질의 형상 :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을 잘 볼수가 없음, 예수님을 통해 그분을 볼 수 있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 수가 있다.
- 예수님께서 영광의 광채이시고 본체의 형상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만물을 가져오시되, 그분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가져오셨다.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 아니었다면 그러지 않으신다.
- 온은 그분의 존재를 페론은 그분이 하신 일을[창조], [구속] 예수님 자신에게 영향을 미쳤다.
n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가리킨다.
n 죄를[죄인들을] 정결케하신 일을 하신다고 할 때,
-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위엄의 우편에 앉아계신다.
4 τοσούτῳ κρείττων γενόμενος τῶν ἀγγέλων ὅσῳ διαφορώτερον παρ᾽ αὐτοὺς κεκληρονόμηκεν ὄνομα. ( GNT)
천사들보다 훨씬 뛰어나게 되셨으며(에오중분단주남) 그것만큼 그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셨다(완능직3단)
- τοσούτῳ : 정도를 강조하는 전방대용어, 남성이냐 중성이냐 – 하나님의 위엄의 우편에 앉으실 정도로
설교
서론
본론
히브리서는 여러 가지로 의문에 쌓인 성경입니다. 왜냐면 신약의 다른 서신서와 달리 누가 적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문제가 출발합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적었을까. 왜 적었는지를 모르니 히브리서는 무엇에 대한 책이라고 말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언제 적었는지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글아오디오의 박해 이후와 네로 박해 이전, 그 사이에 적었다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은 네로의 박해 이후에 적었다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 이후에 적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90년대까지 시간을 늦추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히브리서를 난해하게 만듭니다. 당연히 이 자리에서 그 모든 문제를 풀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2세기의 교부 오리겐은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가 지어진지 100년 정도 지난 시점과 그 전부터 히브리서의 저자는 누구인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성경입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누구인지는 몰라도, 초대교회에서 이름을 이야기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유명한 분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본 사도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바울이나 디모데정도의 위치는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히브리서의 저자는 탁월한 지식을 가진 분입니다. 먼저 그의 헬라어는 매우 세련되었습니다. 바울에 비견되거나 그 이상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입니다. 어릴 때부터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그에 대한 공부를 계속한 학자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만 탁월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도 매우 탁월한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구약의 본문들을 가장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철저히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있는 분이십니다. 그의 해석은 결코 예수님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유대교쪽으로 기울은 자들과 헬라쪽으로 기운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사도들도 유대를 중심으로 사역하는 분이 있었고, 헬라인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균형을 잡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탁월성만을 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납니다. 히브리서의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서신이 아닙니다. 원래 편지, 특히 그 당시 편지의 서두에는 자신이 누구이고, 이 편지를 받는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적게 되어 있습니다. 이 형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들은 이 형식을 지켰습니다. 이 인사는 심지어 요한계시록에도 있습니다. 히브리서와 요한일서에만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일서에도 목적은 나와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그런 것이 일절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함에 대해 설명을 하며 시작합니다.
이점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서를 설교라고 말합니다. 누군지 모르는 분이 설교한 것을 누가 대필해서 적었든지, 아니면 설교자가 다시 적었든지 그 적은 것을 편지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히브리서가 설교문이든지 편지이든지, 그 저자가 누구이든지, 그 기록시기가 언제든지간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히브리서의 대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로 박해받고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적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바로 아는 것만이 우리의 삶을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의 비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말씀합니다.
가장 먼저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근원뿐 아니라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선지자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면해서 받을 자격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부분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단 한번의 계시로 모든 것을 명쾌하게 드러낸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몇 번이고 계시하셨고, 그 속에 사는 역사의 상황들과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통해 그 뜻을 드러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면 사람은 죄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께 갈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일지라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 천지를 창조할 때의 그 말씀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여러 형태와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이후, 모세조차 하나님의 모습을 정면에서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죄를 지은 사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다가오시고 싶어도, 다가올 수 없고, 하나님을 볼수도 만질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계시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림자를 아무리 잘 관찰해도, 본체가 어떤지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1절의 내용입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자들은 고난 중에 있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네로의 박해 이후라면,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순교한 상황입니다. 어쩌면 바울사도도 순교했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전역에서 박해가 진행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쉬운 선택지가 있습니다. 원래 자기가 믿던 하나님께 돌아가면 됩니다. 구약만 믿고 있다고 말한마디만 하면 해를 입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려하는 것은 옛날 방식, 벌써 폐기되었고, 수준 낮은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림자는 이제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보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절 역시 이와같은 맥락에서 이어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선지자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직접적이고, 영광스런 자리에서 어떻게 우리가 물러나겠습니까.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다시 아이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다시는 죄의 자리로도, 율법의 자리로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배하는 것은 이제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들은 누구십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 세상 모든 만유의 상속자이십니다. 만유는 눈에 보이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과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들까지 모두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상속자란 말은 기업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업이란 말은 제비뽑아서 주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제비뽑기는 우리도 알다시피 하나님의 뜻을 물어볼 때, 쓰이는 말입니다. 기업이란 하나님께서 뽑아서 직접 주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속자라는 말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은 자로서 모든 권한을 쥐고 계시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우리가 가진 물질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쁨도 예수님께 속했고 우리의 슬픔도 예수님께 속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을 십자가에서 이미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도 예수님의 것이고 고난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슬픔과 고난, 죄책들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남았습니까. 바로 기쁨이 남았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께 속해있다는 사실을 잊지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더욱 강조됩니다.
그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아들로 말미암아라는 뜻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관여했으며,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원어에서는 이 세계라는 말을 특별히 ‘세대’라는 말로 적고 있습니다. 즉, 모든 세대의 창조는 예수님을 통하여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를 박해하는 이 세대도 예수님을 통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해도 우리는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부인하고 세상을 따라 가는 쉬운 선택입니까. 아니면 험하고 좁은 이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것입니까. 선택은 자명합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예수님에 대해 다시한번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며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영광과 광채는 좀 비슷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말과 헬라어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영광을 빛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빛난다면, 그 사람은 영광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헬라어에서 영광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때 쓰입니다. 어둠속에서는 빛이 주목을 받겠지만, 꼭 그런 상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헬라식으로 쓰면, 우리시대에 가장 많은 영광을 받는 대상은 돈입니다. 모든 사람이 돈에 주목하며, 돈에 관심을 두고, 돈을 얻기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된다고 본문을 말합니다. 영광의 광채와 본체의 형상이 그 의미입니다. 이 말을 풀이하자면, 하나님께서 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잘 볼수가 없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니을 볼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알수가 없지만 예수님을 통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하나님의 행하심에 따르는 분으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우편에 앉았다는 그 의미상 하나님께서 앉히셨다가 더욱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고 부활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됨을 2절과 3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세계를 받는 상속자, 대상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주체이십니다. 그분만이 대상이시며 과정이시며 주체이십니다.
또한 그분의 존재가 어떤지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역, 창조와 구속까지 다 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 그 사랑의 교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하나님없이 하신 것이 없습니다. 모두다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 하나님은 대상이 되게 하시고, 과정이 되게 하시고 주체가 되게 하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존재이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낱낱이 밟힙니다.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고 계십니다.
결론
이런 하나님의 큰 비밀을 무엇 때문에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 말하고 있습니다. 큰 고난과 어려움으로 흔들리고 낙담하고 좌절한 우리를 위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장은 예수님보다 내 앞에 일들이 너무나 힘겹게 느껴지고 무겁게 느껴지지만, 예수님만이 가장 무거운 분이십니다. 헬라어로 영광이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의 대상이라면, 히브리어의 영광은 바로 무거움을 뜻합니다. 세상이 주는 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무거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이 쏟는 관심, 돈에 대한 관심, 외모에 대한 관심, 세상살이에 대한 모든 관심보다 더욱 큰 관심과 빛을 받으실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모든 것의 상속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은 벌써 상속자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감당하셨습니다. 모든 질고는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으며, 그분의 죽음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부활하시고 승귀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무덤속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니 어떤 일에든지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이 계신 보좌를 바라보며 새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서 든든히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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