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2.저녁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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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을 사러 온 형들과 요셉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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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석

6 וְיוֹסֵ֗ף ה֚וּא הַשַּׁלִּ֣יט עַל־הָאָ֔רֶץ 1/4
ה֥וּא הַמַּשְׁבִּ֖יר 1/8
לְכָל־עַ֣ם הָאָ֑רֶץ 1/2
וַיָּבֹ֙אוּ֙ אֲחֵ֣י יוֹסֵ֔ף 1/4
וַיִּשְׁתַּֽחֲווּ־ל֥וֹ אַפַּ֖יִם 1/8
אָֽרְצָה׃1/2
( WTT)
그리고 요셉 그가 그 땅에서 총리였다1/4
그는 곡식 파는 자였다1/8
그 땅의 모든 사람에게1/2
그리고 요세의 형제들이 왔다(칼 바익톨)1/4
그들이 그에게 절했다(히필 바익톨) 머리를1/8
땅으로 향하고1/2
: 그리고 요셉 그는 그 땅에서 총리였고 그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곡식 파는 자였다.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이 와서 그에게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절했다.
- 총리=곡식파는자 = 생사여탈자.
- 요셉이 가진 엄청난 권세를 보여준다.
- 그 앞에 요셉의 형제들은 절했다.
7 וַיַּ֥רְא יוֹסֵ֛ף אֶת־אֶחָ֖יו 1/4
וַיַּכִּרֵ֑ם 1/2
וַיִּתְנַכֵּ֙ר אֲלֵיהֶ֜ם וַיְדַבֵּ֧ר אִתָּ֣ם קָשׁ֗וֹת וַיֹּ֤אמֶר אֲלֵהֶם֙ מֵאַ֣יִן בָּאתֶ֔ם 1/4
וַיֹּ֣אמְר֔וּ 1/8
מֵאֶ֥רֶץ כְּנַ֖עַן 1/16
לִשְׁבָּר־אֹֽכֶל׃1/2
( WTT)
그리고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보았다(칼 바익톨)1/4
그러나 그가 모르는 체 했다(히필 바익톨)1/2
그리고 그가 형제들을 모르는 체 하며(히필 바익톨) 그들에게 딱딱하게 말했다(칼 바익톨) 그가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너희는 어디에서 왔느냐(칼 완)?”1/4
그들이 이야기했다(칼 바익톨)1/8
“가나안땅에서”1/16
양식을 사기위해(칼 부정사)1/2
: 그 때,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보았지만 그는 모르는 체했다 또한 그가 형제들을 모르는 체 하며 그들에게 딱딱하게 말했다. 그가 이야기하기를 “너희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들이 이야기했다. “가나안 땅에서 양식을 사기 위해 (왔습니다).”
- 모르는 체 했다는 말이 2번 나온다.
- 일부러 딱딱하게 말한다.
- 요셉은 왜 처음에는 모르는 체 했을까? 형들이 자신을 알아보는지 한번 테스트해본 것은 아닐까?
8 וַיַּכֵּ֥ר יוֹסֵ֖ף 1/4
אֶת־אֶחָ֑יו 1/2
וְהֵ֖ם 1/4
לֹ֥א הִכִּרֻֽהוּ׃1/2
( WTT)
그러나 요셉은 알아보았다[모르는 체 했다](히필 바익톨)1/4
그의 형제들을1/2
그러나 그들은1/4
알아보지 못했다[모르는체 하지 못했다](히필 완)1/2
: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알아보았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 나카르, 모르는체 하다, 위장하다, 깨닫다, 인식하다, 알아보다로 번역되는 단어가 계속해서 쓰이고 있다.
- 분명 형제들도 13+7년+1년 총 21년이 지났으므로 못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요셉은 한눈에 알아봤다.
9 וַיִּזְכֹּ֣ר יוֹסֵ֔ף 1/4
אֵ֚ת הַחֲלֹמ֔וֹת 1/8
אֲשֶׁ֥ר חָלַ֖ם 1/16
לָהֶ֑ם 1/2
וַיֹּ֤אמֶר אֲלֵהֶם֙ מְרַגְּלִ֣ים אַתֶּ֔ם 1/4
לִרְא֛וֹת אֶת־עֶרְוַ֥ת הָאָ֖רֶץ 1/8
בָּאתֶֽם׃1/2
( WTT)
그리고 요셉은 기억했다(칼 바익톨)1/4
그 꿈들을1/8
꿨던(칼 완)1/16
그들에 대해1/2
그리고 그들에게 이야기했다(칼 바익톨) “너희는 첩자들이다(피엘 분사)”1/4
그 땅의 취약점을 살펴보기위해(칼 부정사)1/8
왔다(칼 완)1/2
: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 대해 꿨던 그 꿈들을 기억했고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너희는 첩자들이다. 그 땅의 취약점을 살피기 위해 왔다.”
- 잘못 해석하면 꿈을 기억하고 형들에게 밝히는 것처럼 보인다.
- 하지만 엉뚱한 말을 한다.
- 그런데, 온 땅에 식량이 없고, 애굽에는 식량이 넘치므로 이것이 허튼소리는 아니다.
- 실제 식량을 약탈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 그리고 요셉의 이 선언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 그래서 첩자란 분사가 피엘로 되어 있다. 여기에 특별한 강조가 있음을 뜻한다.
10 וַיֹּאמְר֥וּ אֵלָ֖יו 1/4
לֹ֣א אֲדֹנִ֑י 1/2
וַעֲבָדֶ֥יךָ בָּ֖אוּ 1/4
לִשְׁבָּר־אֹֽכֶל׃1/2
( WTT)
그들이 그를 향해 말했다(칼 바익톨)1/4
아닙니다. 내 주여.1/2
그리고 당신의 종들은 왔습니다(칼 완)1/4
양식을 사기 위해(칼 부정사)1/2
: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내 주여, 당신의 종들은 양식을 사기 위해 왔습니다.
1차 작성
6절에서 형들이 요셉에게 절한 것은 꿈의 성취를 나타낸다. 요셉은 이것을 깨달았고, 형들은 몰랐다.
7절에서 요셉은 형들을 바로 알아본다. 20년가량이 흘렀는데도 바로 알아본다. 하지만 형들은 알아보지 못하다.
이 본문은 나카르 동사로 두 형제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형제들을 나카르했지만, 형제들은 나카르하지 못한다.
요셉은 꿈을 기억했지만, 형제들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다.
요셉은 어떻게 20년이 넘는 세월만에 만났는데 바로 형제들을 알아봤을까? 본문에서는 형제들과 만나는 장면만 나오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요셉에게 양식을 얻기 위해 찾아왔을 것이다. 요셉은 하루에도 수십-수백명씩 그런 무리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형제들이 그렇게 쉽게 요셉을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사람과의 씨름을 하는 중에도 요셉은 형들을 즉시 알아봤다. 하지만 형들은 그러지 못했다.
요셉은 시종일관 침착하게 말하지만, 그의 내면은 어땠을까. 자신의 형임을 알아차렸을때부터, 그리고 베냐민이 아직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부터 그의 내면은 격동에 휩쌓였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덤덤히 형제들에게 스파이라고 하고 있다.
분명 요셉은 기뻐했을 것이다. 이 가뭄은 보통 가뭄이 아니었고, 요셉은 자신의 가족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아마 총리가 된 그날부터 그가 가장 처음 든 생각은 가족이 아니었을까? 물론 형들은 분노했겠지만,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은 정말로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분노했을 것이다. 나그네같은 모습으로 자신앞에 엎드려 있는 형제들을 벌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형들을 본 순간 그는 구덩이에 빠져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고, 그다음 자신의 간청에도 노예로 팔아넘겼던 형들의 모습을 기억해내었을 것이다.
반대로 형들은 요셉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나카르)
그 이유는 수없이 많다.
형들은 아마 요셉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통 애굽의 노예로 팔리면 밭에 물대는 역할을 하게 된다. 나일강의 물을 떠서 밭에 뿌리는 것은 고강도의 노동이고, 약 10년 이상 이런 노동을 쉴새없이 하게 되면 신체가 망가지게 된다. 애굽인들은 이런 망가진 노예를 끝가지 부려먹다가 버렸고, 당연히 노예는 빨리 죽을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은 그 당시에 잘 알려져있었을 테고, 형들은 당연히 요셉이 죽었거나, 살아있더라도, 결코 여기서는 볼 수 없을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현재, 수염을 밀고, 애굽의 의상을 입고 있는 상태다. 즉, 애굽의 복식을 그대로 하고 있는 상태다. 형들입장에서는 총리까지 올라간 애굽출신의 고위 관료로 생각했을 것이다.
특별히 중간에 통역을 세웠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 형들은 절대 요셉을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요셉이라고 불리지 않고 애굽식 이름인 사브낫바네아라고 불렀을테니,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동생의 모습이 남았었을 터인데도 10명중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나카르 동사는 그 전에도 나온다. 에서 형들이 요셉을 팔고 죽은 것으로 위장해서 채색옷을 야곱에게 가져왔을 때, 야곱은 그 옷을 알아본다.
에서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임신하고 죽임당할 위기에서 지팡이와 다른 증거물을 내밀었을 때, 유다는 그것들을 알아본다.
이처럼 이 본문에서 알아보는 사람은 주도적 인물이다. 족장의 위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다.
이를 통해 성경은 현재, 그 형제들중에 지도자의 역할을 할 자는 요셉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요셉은 형들을 알아봤을 때 느꼈을 모든 감정적 동요들을 결코 표내지 않는다. 이 역시 지도자의 소양이다.
요셉이 알아봤다는 사실은 7절과 8절에 2번 나옴으로 형들과 대비를 확실히 한다.
9절에 이르러 요셉은 형들을 첩자라고 고발한다. 그리고 우리 땅의 취약점을 염탐하러 왔다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취약점이라는 말, 성경에 틈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 뜻은 벌거벗음이다. 이 단어는 요셉이 노예로 팔릴 때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요셉이 형들에게 눈앞에 있는 사람이 벌거벗었을 때를 생각해봐라고 말하는 것같다. 또한 이 단어는 그들이 요셉에게 했던 폭력을 떠올리게 한다.
a가 b의 벌거벗음을 보다라는 말은 엄청난 죄악이나 폭력을 의미한다. (
요셉은 오늘 본문에서 총 4번에 걸쳐 형들을 공격한다(vv. 12, 14, 15, 20). 그리고 이 공격을 통해 형들은 완전히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게 된다.
요셉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제를 찾아온 자신에게 행한 그 폭력을 형제들에게 겪게 해주고 있다.
이것은 복수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동기는 바로 ‘꿈’이다. 그 때, 요셉은 바로 지금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꿈을 이루는 순간임을 확신하고 움직인다.
만약 형들이 요셉을 알아차렸다면 요셉은 즉각 그것을 고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요셉을 변호할 수 없음은 결국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기고 아버지에게 거짓말했던 형들처럼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형들을 3일간 가둔다. 이것은 자신이 했던 감옥살이의 절망을 조금이라도 맛보여주려 하는 것같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요셉은 결코 복수로 끝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을 다시 풀어주고, 양식을 준다. 꼭 다시 돌아오도록 시므온을 붙잡고 돈을 주어 그들로 오고 가는 길을 든든히 한다.
적용 : 요셉은 완전하지 않다. 형들앞에서 그는 다시 그 철부지때로 돌아간듯한 모습을 잠시나마 보인다. 그때, 형들에게 당했던 것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요셉의 목적은 복수가 아니라 가족들이 애굽으로 오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마지막까지 형들을 시험한다. 하지만 유다의 말에 그는 무너진다.
처럼 그는 오게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뜻임을 고백한다.
우리의 서러움, 아픔을 주님께 맡기자.
우리는 형제들을 서럽게 하는 자들인가. 위로하는 자들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채고, 형제들의 상황을 알며, 위로하는 자가 될수 있길
설교
서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 완전하지 않음이 가장 잘 나타나는 자리는 우리가 가장 친밀하다 생각하는 사람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쉽게 말해 가족과 있을 때, 우리는 쉽게 짜증내고, 내가 내키는대로 하게 되며, 상처주는 말도 너무나 쉽게 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서로 미워하고 서먹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요셉의 모습과 진행 과정들을 살펴보며, 다시한번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은혜가 있길 소원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알다’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요셉과 형들의 대담은 이 ‘앎’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이 단어의 뜻은 깨닫다, 알아차리다, 알고도 모른체 하다. 위장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먼저 본문은 요셉의 현재 신분을 말해주며 시작합니다. 그는 총리, 애굽에서 파라오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자입니다. 동시에 식량을 주관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그 뜻은 누구든지 요셉의 허락을 받지 않는다면 식량을 구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먼저는 요셉의 위치가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권세가 애굽뿐만 아니라 식량이 필요한 근동의 모든 국가들에게 미칠 정도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는 이런 요셉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요셉은 매일 그들을 찾아 식량을 배분하고 총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매우 힘든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들 인정하는 것이 사람 상대하는 일이 제일 힘들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했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식량을 달라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권세 때문에 윽박지르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을 만나 적당량의 식량을 나눠주는 일은 정말 상상도 못할 정도의 노동이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요셉은 아직 5년이나 흉년이 이어질 것을 알고 있지만, 식량을 구하러 오는 자들은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많은 마찰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의 형들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7절을 그냥 그렇구나라고 넘어가지만 이미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상태입니다. 그리고 하루에도 수많은 무리들이 식량을 구하러 요셉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자마자 이 10명이 자신의 형들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까요? 이것은 길가다가 스치듯 만난 사람이 20년도 전에 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란 것을 알아보는 것보다 힘들 것입니다. 특히 말한대로 요셉은 계속해서 사람을 상대해야 했기에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보자마자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7절은 2번이나 알았다라고 말합니다. 7절 처음에 형들인줄 아나에서 아나라는 말과 모르는 체하고가 둘다 알아차리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8절에 다시한번 상황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알아봤지만 형들은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형들입장에서는 충분히 못알아볼만합니다. 그 당시 애굽 노예의 다수는 농사에 투입되었습니다. 애굽은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일강물을 길어다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중노동이었습니다. 또한 애굽인들은 노예의 건강은 살피지 않고 부렸으므로 10-20년정도 지나면 무릎 허리 어깨등 온 몸이 변형되어 제대로 살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그 때가 되면 쓸모없어진 노예를 죽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0년이 넘었으니 형들은 당연히 요셉이 죽었을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철부지가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지금 애굽의 관습에 따라 수염을 깎고 의복을 입고 있습니다. 이름도 요셉이 아닌 사브낫바네아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요셉역시 형들을 한눈에 알아보기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핑계를 댈 수가 없는 잘못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을 곳으로 팔아놓고는 다시 만난 동생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무관심했습니다. 반대로 요셉은 아마 양식을 팔 때부터 형들이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머릿속에 두었을 것입니다. 이 조그마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셉의 입장이라면 어떨 것같습니까. 겨우 찾아온 자신을 구덩이에, 정확히 말하면 물을 가두는 우물에 던져넣고, 죽일까 살릴까 말하다가 옷을 벗기고 노예로 팔았습니다. 아무리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고난의 원흉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아니, 자신을 아예 잊은 것같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화가 날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분노한만큼 형들에게 앙갖음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조그만 차이로 인해 요셉과 형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밝히고 화해하는데 42, 43, 44장이 걸립니다.
요셉은 사실 은연중에 자신을 떠올릴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형들에게 이 나라의 틈을 보러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틈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 뜻은 벌거벗음입니다. 요셉은 이 벌거벗음이라는 말을 통해, 자신을 노예로 팔 때, 자신의 옷을 벗겨 벌거벗게 만들었던 때를 떠올리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틈, 벌거벗음이라는 말을 9절과 12절을 통해 일부러 2번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런 요셉의 의도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21절에 보면 형들은 죽은 요셉을 생각하고 그 때의 일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형들은 끝까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요셉임을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그렇기에 요셉은 격동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24절에 혼자 가서 울고 옵니다.
그리고 형들이 꼭 다시 돌아오도록 시므온을 잡아놓습니다. 또한 곡물 값을 다시 넣어서 그들이 가는 길이 평안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끝까지 요셉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물론 본문에서 요셉이 잘했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가 형들을 3일동안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첩자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거짓말을 하며 형들을 첩자로 몰아가서 고생을 시킵니다. 요셉 역시 사람인지라, 자신에게 해코지를 한 형들, 그러면서 자신을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는 형들을 그냥 두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국 형들을 용서합니다. 놀라는 형들에게 45장 5절처럼, 애굽에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까지 모셔와서 이스라엘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자식이 되었습니다.
서두에 말했다시피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가장 친밀한 피붙이들에게 가장 잔인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정을 돌아보며 이해해주면서, 가족들과 친지들은 결코 돌아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충분히 도울 힘이 있으면서도 서로 외면하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함께 보내며 함께 자라며 정을 나눈 세월이 깊은 만큼 미움도 깊어질 때도 있습니다. 이중에는 믿지 않는 가족들속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화평의 사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의 필요와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자입니까. 우리는 혹시 형들이 요셉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의 가족들 형제들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 형들처럼 애초에 그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명절에 우리가 서로를 돌아보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마치 요셉과 형들처럼 끝까지 알지 못하고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가 피해를 당했다면, 하나님앞에 나아와서 나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기를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나아가 내게 했던 그 형제의 마음도 알아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만약 내가 형제를 아프게 했다면, 그것을 알게 해달라 구할 수 있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그 아픔을 삭히고 있는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며 서로 화평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요셉과 형들이 화해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지나야 했고, 많은 고통이 있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돌아보며, 우리의 중재자 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며, 우리에게 있는 것이 고통이 아닌 기쁨이 되기를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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