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왕이신 하나님 (슥9:9-17)

스가랴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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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 시대는 진정한 지도자를 찾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지도자의 대한 실망과 지도자의 부재 상태에 대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대통령에 대한 실망과 대통령의 부재로 인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몇일전에 TV에서 대통령후보를 검증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관심있게 보았습니다. 나오는 후보들마다 말을 잘하고 좋은 공략을 가지고 나와서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통령을 보았을 때 공략은 모두 좋지만 그것을 어떻게 잘 실행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가정도 가장 먼저 돌봄을 경험해야 할 곳임에도 갈수록 부모의 지도력이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깨어져 가는 가정 속에 자녀들은 어른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자녀들이 사회에 나가면서 부딛히는 현실은 금수저, 흙수저 문화입니다. 올바른 경쟁도 하기 전에 이미 좋은 조건으로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리더십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직장에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사에 대한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우리는 교회에서도 목회자에 대한 실망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목회자라고 존경받는 시대가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지도자의 부재를 경험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지도력을 가진 자로 찾아 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좋은 대통령(왕)으로 좋은 아버지로, 좋은 상사로, 좋은 목회자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스가랴 시대도 지도자의 부재의 시대입니다. 스가랴 시대에는 포로시대였습니다. 왕이 없고 총독만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없는 억울함, 왕이 없는 열등감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왕으로 오실 것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스가랴서의 후반부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성전을 지은 후 40년이 지나서 다시 현실의 어려움에 갈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상과 타협하고 싶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통해 소망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9:1-7은 싸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올 메시야가 예언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왕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의 지도자와는 다른 진정한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주님이 왕이 되셔서 우리를 통치하셔야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왕으로 우리에게 찾아 오시는 지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1. 겸손한 왕(9)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시온을 딸을 향해 크게 기뻐하라고, 예루살렘의 딸을 향해 즐거이 부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너의 왕'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지도자로부터 어떤 실망감, 상처가 있더라도 왕이신 우리 하나님은 그것을 덮을 기쁨으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그 왕은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신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겸손하신 왕의 모습을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새끼를 타고 가심으로 이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겸손의 삶이였습니다. 본문의 겸손하다는 단어는 “고난을 당하다, 가난하다, 낮아지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육신 하셔서 낮아지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신비입니다. 우리가 강아지를 사랑해서 강아지처럼 되고 싶을까요? 우리가 개미를 사랑해서 개미처럼 되고 싶을까요?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써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욕과 고난을 담당하셨습니다.
가장 높은 왕이신 그분이 왜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요? 우리의 죄와 그 죄의 결과로 찾아오는 고통을 짊어지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기다린 왕 같은 메시야는 다윗과 같이 강하고 능력있는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겸손하신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를 포함한 구약에서 예언된 우리를 찾아오실 예수님은 겸손하신 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겸손하신 왕인 우리 주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도 겸손함으로 세상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2. 평화의 왕(10)

()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하나님께서 무기를 제거하시는데 적들의 병거, 말, 활을 끊는 것이 아니라 에브라임과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백성의 병거, 말, 활을 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의존하고 과시하는 무기와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세속적인 힘을 끊어버리실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끊고 나서야 예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화평을 전할 것이라고 합니다. 원어에서는 이 것이 강조된 표현으로 나옵니다. 말로만 화평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실제로 이루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중보자이십니다. 우리의 마음 속 뿌리 깊은 죄를 멸하시고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벽이 허물어지고 하나되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이 신비한 교회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평황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됨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똑 같은 무기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화평으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인 것을 보여줄 때 세상은 이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구원의 왕(11)

()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예수님은 언약의 피로 물없는 구덩이에서 구해주실 것입니다. 이 언약의 피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율법을 낭독하고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맺은 언약의 피를 생각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이 첫 언약에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떠나가며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않으시고 완벽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새 언약의 피를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언약대로 우릴를 구원하고자 찾아 오시는 구원의 왕입니다.
“물 없는 구덩이”는 물이 마른 깊은 우물을 말합니다. 마치 요셉이 빠졌던 우물처럼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서서히 죽게 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이렇게 물없는 구덩이와 같이 우리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하시며 오실 것이니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것 같은 스가랴 시대 사람들에게도 약속하셨고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소망이 없는 것 같은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은 약속대로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 이것이 바로 구원의 약속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요새로 돌아오게 할 것이며, 갑절이나 갚을 것이고 말씀합니다. 원수가 함락할 수 없는 높은 성, 피난처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15은 구원의 왕이신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구원의 왕이 우리를 통치하시기에 교회는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화살로 삼으며 시온을 칼로 삼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아까 무기를 폐하실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이신데 이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제 우리에게 세상의 무기와 다른 새로운 무기가 주어졌습니다. 바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칼과 무기로, 돈이나 사람의 능력으로 확장되지 않습니다. 오직 구원을 주는 복음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복음이야말로 교회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14절에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화살을 쏠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복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서 함께 계시며 친히 싸워주시는 모습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팔을 부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전쟁을 지휘하고 계심을 알려줍니다.
15절은 피흘린 싸움 뒤의 술이 있는 큰 연회의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향락에 빠진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교회의 즐거움을 묘사합니다. 사도행전에도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를 향해 세상 사람들은 새 술에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왕이 찾아오실 것을 알기 때문에 소망을 품은 자입니다. 소망없는 세상을 향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무기로 삼아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결론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왕으로 찾아오시는 분임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왕으로, 평화의 왕으로, 구원의 왕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약속된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찾아 오셨고 그분의 겸손과 평화와 구원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게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교회는 겸손의 통로, 평화의 통로, 구원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교회에게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은 여러분을 통해 겸손과 평화를 경험하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서부터 이러한 것이 쥐어 짠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통치하셔야만 겸손과 평화와 구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예수님이 왕이 되시어 통치하시도록 우리를 내어드립시다. 내가 의지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만 더욱 나를 통치하시도록 사모합시다. 내가 주님이 통치하시도록 내어드리는 만큼 하나님은 나를 통해 그 왕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교회가, 구원받은 성도가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왕이신 주님께 있을 때 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우리는 왕이신 주님의 왕관에 빛나는 보석입니다. 왕이신 주님의 통치를 받고 드러내는 보석같은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통해 어두운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겸손의 왕으로 평화의 왕으로 구원의 왕으로 소개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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